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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음 Oct 27. 2024

10. 페이스트리(2)

물 위를 걷는 사람


 소년은 그날 이후로 줄곧 시소 중간에 걸터앉아 열등과 불안 사이에서 한쪽이 내려가거나 올라가지 않게 균형을 조정한다. 분명히 소년의 가정은 가난하지 않았다. 적어도 절대적인 기준에서 바라본다면. 구태여 저울질하자면 그럭저럭 평범한 중산층에 가까웠다. 그러나 언제나 존재하는 상대적인 기준은 늘 자신을 가장 불행하고 가난한 집안에 살게 만든다.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초라함이 돌연 점화됐다. 그 애 때문이야. 모자란 척 음침하게 낮은 마음을 발가벗긴 그 애가 이렇게 만든 거야. 소년은 마주한 적 없던 시선이 오차 없이 맞닿았을 때 눈을 피하고 싶었다. 찰나의 순간 소년은 수풀 속에 숨어 있다 부름을 받은 아담이었다.


  성원은 등교하지 않았다. 조회 시간에 출석을 부르던 손 선생은 성원의 이름을 두 번째로 호명할 때야 성원의 부재를 눈치챈다. 조례를 마치고 문을 나서는 손 선생의 손에 휴대폰을 들려 있다. 탁 소리 나게 문이 닫히고 아이들은 오지 않는 성원에 대해 말을 꺼내지 않는다. 소년은 망부석이 되어 책상에 올려둔 교과서 표지에 시선을 고정한다. 조명에 반사되어 반들거리는 표지에 커다랗게 도덕이라고 쓰여 있다. 찔린 가슴이 벌렁거린다.

  왜 안 오는 거야? 어제 집에 못 들어간 건 아니겠지. 설마, 아직 숲에서 헤매고 있는 건…… 초조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로 향하는 손을 의식적으로 내리고 의자에서 일어난다. 교무실로 향하는 빠른 걸음에 상반되는 감정이 교차하고 넘나든다.

  나를 얼마나 더 엉망으로 만들 셈이야?

  소년은 힘을 주어 걸음을 내딛고 악에 받쳐 소리치고 싶었다.     


  소년은 처음으로 조퇴를 결심한다. 눈을 게슴츠레 뜨고 고개를 비뚜름하게 내리며 작은 목소리로 우물거리자 손 선생은 곧바로 휴대폰을 든다. 옆에 있던 양 선생도 몇 마디 거든다. 아파도 말없이 참고 지각과 결석은 용납하지 못하는 아들의 첫 조퇴에 모친은 다급해졌으나 집에서 쉬겠다는 완강한 소년의 태도에 한 걸음 물러난다. 소년은 가방을 짊어지고 학교를 빠져나온다. 걸음이 빨라진다. 박동도 커진다. 육교와 몇 개의 신호등, 편의점을 지나 공원 가에 다다르자 눈동자가 빠르게 굴러간다. 임성원. 부르려다가 삼킨 이름이 열 개는 넘었다. 산책로를 따라 성원을 남겨두고 떠났던 곳으로 걷는다. 소년이 때리고 성원이 넘어졌던 곳에 해소되지 못한 욕망과 두려움이 망망하다.

  야.

  소년이 작게 소리 내어 부른다.

  야.

  목소리에 힘이 실리자 작은 울림이 동행한다. 소년은 두리번거리며 주위를 살피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숲으로 걸어 들어간다. 땀이 찬 작은 손이 가방끈을 꽉 쥔다. 걔 하나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야. 전가는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부는 바람에도 스산한 기분이 들어 멈칫거리다 걸음을 떼기를 반복한다. 소년은 내내 뒤를 돌아본다. 환한 초입이 가려지기 전까지만 찾을 요량이었다. 소년은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불쑥 들 때마다 멈춰 서 주위를 둘러본다. 소년에 비해 숲은 너무 거대하고 을씨년스럽다. 소년은 괴물의 아가리에 걸어 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떨칠 수 없어 결국 뒷걸음질 친다. 돌아가기로 마음먹기까지 시간이 걸렸지만 실행하기까지는 짧았다. 진동하는 다리에 힘을 싣기 전 바람에서 달콤한 냄새가 나서 바람결을 따라 고개를 돌린 소년은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동자를 마주한다.

  투명한 온몸은 어둠과 빛, 녹음과 푸른빛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둘러싼 어둠이 모두 그의 것인 줄 알고 놀라 소리 지른다. 나무와 엇비슷한 키와 미동 없는 거대한 무언가. 거두지 않는 푸른 여의주 같은 눈동자는 색이 채워지지 않는 원 테두리가 나이테 문양으로 형형하다. 소년은 주륵 흐르는 땀의 존재를 뒤늦게 눈치채고 전력 질주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드는 위압감, 경외심과는 조금 달랐다. 죽는다. 죽는다. 살점 하나 남기지 않고 먹힌다. 분명한 공포였다. 입에서는 귀는 들을 수 없는 괴상한 비명이 끊임없이 한 호흡으로 이어지고 땅을 박차는 다리가 지면과 수직을 이루지 못하고 빗나가는 바람에 몸이 휘청거렸지만 뒤를 돌아볼 겨를 없이 성치한다. 바람이 땀에 젖은 얼굴과 발등으로 떨어진 심장을 가르고 지나간다. 얇은 한지가 눈 위에 덧대어지듯 온 세상이 뿌옇게 흐려진다. 솨아아. 솨아아. 어린 울음소리가 숲에 메아리친다.   

   

                                         *     


  그냥 그대로 사세요.

  해영은 눈동자만 들어 올려 정빈을 바라봤다. 정빈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숟가락을 들었다.

  백이면 백, 다 그걸 선택할 겁니다.

  다들 그리 살던데, 나이아의 중얼거림이 겹쳤다. 해영은 자신이 놓친 게 있는 것 같았다. 그 여자가 말한 무기를 든 사람이 떠올랐다. 안위만 좇고 추해지길 바라는 사람. 정빈의 말은 꼭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말처럼 들려서, 해영은 제 말을 되짚어보았다. 사라진 동생을 찾아 숲의 요괴를 찾아갔고 좋을 대로 해석해 죽으라고 악에 받쳐 소리쳤고, 얼떨결에 소원이라 말했다. 사채업자에게 쫓겨 숲에 들어갔을 때 그 요괴가 자신을 살려주었고 이름을 알려주었다고, 죽지 않았으면 한다는 말을 들었고 그 과분한 말에 숨이 가빴다고. 그런데 내가 빈 소원이라는 게 나를 살리고 그 요괴를 죽이고 있는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은데. 물음표 없는 물음의 대답에 망치로 머리를 맞은 것처럼 정신이 들었다.

  가게의 문에 달린 종이 경쾌하게 울렸다. 두 명이요, 소리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중후한 남자 두 명이 닫히는 문을 잡고 가게 밖으로 나가는 대여섯의 무리를 피해 벽 쪽으로 몸을 붙이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닫힘이 연기된 문밖에서 경적 소리와 점심즈음의 햇살이 침투했다. 차체 위에 영어로 택시라고 적힌 자동차 몇 대가 길가에 일렬로 주차된 동네 작은 기사식당의 점심시간은 비좁게 채워진 내부의 소란과 주방의 조리하는 소리로 북적였다.

  그날, 해영은 몇 번의 메일을 더 주고받았다. 여자에 대해선 모르지만 요괴에 대해서는 도움을 줄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만남을 주선하는 정빈과 약속을 잡고 호수가 보이는 길가에서 그를 만났다. 적당히 큰 키에 마른 몸, 강박적일 정도로 정돈된 차림새. 손목에서 끊긴 셔츠는 자국 하나 없이 새것처럼 뽀얗고 왼쪽 손목에 채워진 명품 브랜드의 시계는 금색으로 반짝였다. 윤정빈입니다. 확신에 찬 목소리는 가볍지 않고 정중했다. 무늬 없는 맨투맨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도 아닌데 시선이 잘 다려진 셔츠에 오래 머물렀다. 아마도 한끝만치 머금은 부끄러움이 있었던지, 대답은 느렸고 인사는 부자연스러웠다. 해영은 자꾸 되짚게 되는 며칠 전 자신의 메일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정빈은 예상 그대로의 남자였다. 반듯하고 절제 있는 태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을 눈치채고 자신의 얘기부터 꺼내는 배려가 완벽에 가까운 사람. 가족을 찾으시는 건가요? 해영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하고 아는 사람이라며 얼버무렸다. 정빈은 더 캐묻지 않았다. 요괴를 본 건 열세 살즈음입니다. 정빈은 휴지 두 장을 뽑아 올려두고 식탁 옆 서랍을 열어 꺼낸 젓가락과 숟가락을 그 위에 가지런히 두었다. 친구를 집까지 바래다주던 날이었습니다, 장애가 있는 친구였거든요. 가는 길에 숲을 지나야 했는데, 내기를 좋아하는 놈이었어요. 가방까지 내려두고 숲까지 달리는 시합을 하자더군요. 말릴 틈도 없이 숲으로 뛰기 시작하는 녀석을 따라갔는데, 그곳에서 요괴를 봤습니다. 저는 운 좋게 살았지만, 친구는 그러지 못했고요. 마침 음식이 나와 정빈은 말을 멈추고 물컵을 들어 올렸다. 이야기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더 이상 해줄 말이 없는 건지, 혹은 적당히 제 패를 보였으니 네 이야기를 하라는 의미인 건지, 각자의 앞에 하나씩 놓인 공깃밥과 된장찌개, 열 개는 넘어 보이는 반찬을 눈짓하며 정빈은 살짝 미소를 지어 보였다.

  뭐가 불편하신 겁니까?

  정빈의 목소리에 해영은 눈을 깜빡이며 깊어지려는 생각을 끊었다. 어느새 정빈의 공깃밥은 숟가락으로 떠먹은 자국이 듬성듬성 파여 있었다. 정빈은 노릇하게 구워진 고등어의 옆구리를 젓가락으로 가르며 차분하게 덧붙였다.

  어차피 요괴일 뿐인데요.

  해영은 고개를 들어 정빈을 바라봤다. 정빈이 어서 먹으라고 눈짓했다. 해영은 시선을 내려 천천히 젓가락을 집었다. 정빈의 말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현실적이고 틀림없이 옳은 말이었다. 여자는 요괴였다. 물 위를 걸었고 나무와 대화를 하고 손짓으로 꽃을 피웠다. 얼굴도 발끝도 무엇 하나 인간을 닮지 않은 곳이 없어 언젠가 저도 모르게 경계를 흐린 적도 있었다. 해영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분명히 못 안에서 익숙한 낯의 남자들을 목도했다. 강 씨에게 찾아가 삼일만 더 달라 이마를 조아리며 비굴하게 빌었던 날에도, 무심히 담배를 문 남자에게 무자비하게 밟히던 날도, 개처럼 끌려가 지장을 찍었던 날도 늘 강 씨의 뒤에 배경처럼 서서 이죽이던 얼굴을. 그러므로 넌 죽이지 않았어, 확신을 담아 뱉은 기만과도 같은 그 말에는 한 줌의 믿음도 없었다. 그날 가졌던 확신은 사람을 죽이긴 하는구나, 라는 우스운 배신감과 그래도 해원을 죽인 건 아닐 것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완신과 알량한 안도감의 속절없는 교집합이었다. 못 안에서 본 얼굴이 해원이었다면, 죽지 않기를 바란다거나 이해한다고 속삭이는 달콤한 말 따위, 얼마든지 속이고 꾸며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여자가 죽인 게 맞대도, 그곳에서 해원의 얼굴을 보았대도, 해영은 취할 수 있는 행동이 없었다. 제정신을 놓고 죽으라고 소리치던 그날이야 무지한 기개라도 있었지만 모든 것을 전해 듣고 알게 된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죽인 적 없어, 누구도. 맞지?

  돌이켜보면 그 말은 불신을 의미했을지도 모른다.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말,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말, 그 가벼운 울림조차 없는 말과 진배없이 허울뿐인 말. 죽여 달라 울부짖으면서도 살기를 바라, 못 안에서 그 무엇도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는 듯이 입을 다물겠다는 일방적이고 암묵적인 약속.

  얼굴에 비친 필연적인 두려움은 처음부터 여자도 느꼈을 것이다. 기억을 읽는 잘난 능력 없이도 물에서 건져낸 이래로 줄곧 숨길 수 없는 증오와 슬픔을 마주했으니까. 그럼에도 약점이 될 수 있는 자신의 패를 꺼내 보이고, 손에 쥐여주었다. 어쩌면 숲에 몸을 숨긴 그날 횡설수설하며 뇌까렸던 말을 기억하고 소원의 내용에 몇 줄 덧붙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의 불안도 안도도 혼란도 그때 발목을 감은 줄기로부터 시작된 건지도 모른다. 여자는 해영에게 무기를 들고 온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오지 않았으면 했다는 말로 그를 구원했고 거듭하여 안심하기를 바랐다. 정제된 표정과 움직임으로 그를 격앙 상태로부터 떨어뜨렸고 묵은 슬픔과 수치와 열등과 증오를 읽었음에도 그를 물에서 건져내고 먹을 것을 주었다.

  때로는 그 별거 아닌 것들 때문에 미워하던 사람을 믿고 싶어지기도 한다. 그 마음은 꼭 그러면 안 되는데, 라는 자책과 함께 와서 화살을 자신에게로 돌리거나 그 사람을 배로 미워하며 종결되곤 했다. 그러나 가끔 그럼에도, 라는 말이 따라붙을 때면 그대로 결과를 맺을 뻔한 것들을 다음 문장으로 넘겼다. 해영은 지금, 그럼에도 믿고 싶었다. 여자의 말로 그는 가난과 애정에 허덕이던 삶에 종착지를 만난 것 같았다. 여자의 말은 그가 살기를 바란다는 말과는 달랐으나 같았다. 그 말 하나로 온 생이 흔들렸고 온통 구원받은 듯이 가슴이 두근거렸다. 해영은 마음속으로 조용히 정정했다. 그 말이 허울뿐이었다는 건 완전히 거짓이다. 정빈의 말대로 어차피 요괴일 뿐인 여자의 불행의 시작인지 끝인지 알 수 없는 호의가 그를 여러 번 살렸다. 그리고 그는 여자의 무수한 증명을 뒤늦게 되새긴 참이었다.

  해영은 정빈과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정빈의 말은 대수롭지 않았고 그것은 아마도 타인이기 때문일 것이지만 해영을 흔들어 놓았고 확고하다고 생각했던 결심과 다짐에 균열을 가했다. 해영은 처음 마주했을 때부터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었던 것을 완벽이라고 생각했던 정빈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정빈은 자신과 닮았다. 요괴의 존재를 아는 것뿐 아니라 언뜻 비치는 증오나 두려움, 의식하지 않아도 젓가락의 열을 맞추던 강박 같은 것들을. 그러므로 해영의 정정은 정빈과는 다른 길을 걷기로 한 선택이었다.

  여전히 달라진 마음 같은 건 없었다. 정빈의 말은 이미 알고 있는 것에 확신만 얹었을 뿐이다. 해영도 여자가 살았으면 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돌이킬 수 없었다.     


                                        *     


  고집스럽게 내딛는 걸음이 빨라졌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구두에서 슈크림 냄새가 진동했다. 정빈은 며칠 전을 회상했다. 우연히 본 글에는 사람을 찾는다는 짤막한 사정과 함께 그림이 첨부되어 있었는데, 동그란 눈매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의 여자 그림이었다. 평소라면 적당히 넘겼을 글인데, 기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림이 사람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이 분명하나, 어디에서 본 얼굴인 것처럼 가물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눈을 감고 떠올려도 실마리는 잡히지 않았다. 대신 떠오른 것은 게시물 작성자의 이름이 왠지 모르게 익숙한 이유였다. 신해영. 신해영. 정빈은 손가락을 부딪치며 희소가 올린 SNS 게시물에 골뱅이 표시와 함께 언급된 이름을 기억해 냈다. 어디서 본 이름이다 했어. 희소에게 일방적으로 끊긴 연은 이어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너저분하게 찢어진 데다 증오까지 동반했다. 정빈은 희소의 증오가 그럭저럭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조금 우스웠다. 그날이 아니었다면 영영 이어지지도, 지금껏 증오라는 가느다란 실로 연결될 구실도 없었을 것이다. 정빈은 희소의 장단에 맞춰주었고 오븐에 갓 넣은 빵처럼 부푼 증오가 시간이 흐르고 차가운 공기를 머금어 가라앉을 때를 기다렸다. 물 위를 부유하듯 멀어지는 희소를 움켜쥐기 위해 필요한 뱃사공이 신해영이었다.

    

  신해영은 예상 그대로의 남자였다. 적당함의 표본, 직설적으로 말하면 애매함의 극치.

  윤정빈입니다. 공들여 차려입은 옷으로 내려가는 시선은 꾸밈없이 진실이었고 그 속에 약간의 수치심도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대화 장소로 찾은 곳이 고작 기사 식당. 정빈은 조소를 지우고 문을 열며 주황색 앞치마를 걸치고 카운터에 있는 중년의 여성에게 눈인사를 보냈다. 식기를 세팅하고 망설이는 신해영을 지켜보다 먼저 제 패를 보였다. 신해영은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난다는 걸 모르는 것이 확실했다. 유감입니다. 겨우 뗀 입에서 나온 건 고작 그 한마디. 고르고 골라 입에 담은 말이라는 걸 알지만 정빈에게 해영은 한참 느리고 재미없는 사내였다.

  마침내 시작한 신해영의 말에 일말의 관심도 없지만 적당한 반응을 해주자 이야기는 순풍에 돛을 단 듯 유려하게 흘러갔다. 그냥 그대로 사세요. 정빈은 말투가 심드렁해지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백이면 백, 다 그걸 선택할 겁니다. 신해영의 고민은 너무 사소하고 무용한 것이라 단 한 문장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정빈은 자신이 느낀 대로 확실하게 조언했다. 누구든 같은 생각, 같은 대답을 했으리라 믿었다. 적어도 보편성에 속하는 사람이라면 현실적인 조언을 듣고 깨닫는 기색이라도 보일 텐데, 신해영은 무엇으로 받아들인 건지 이어지는 대화 내내 넋을 놓고 있었다. 정빈은 이만하고 희소 이야기로 화제를 돌리고 싶었으나 요괴에 대해 안다고 연락했으니 성의는 보여야 했다.

  제가 본 요괴는 눈이 새파랬어요. 눈에 과녁처럼 크기가 다른 원이 있었고요. 몸집은 거대했고 위압감이 대단했어요. 마주친 건 기껏해야 십 초겠지만…… 정빈은 말꼬리를 흐렸다. 제대로 들리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허탈한 숨을 쉬며 젓가락을 집어 든 정빈은 밥을 퍼 입에 넣었다. 무례하고 이상한 사람. 신해영을 표현하는 말에 조용히 한 문장을 추가했다.

  뭐가 불편하신 겁니까? 기다리다 못한 정빈은 해영의 회상을 끊었다. 어차피 요괴일 뿐인데요. 물고기의 눈알에 쇠꼬챙이를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을 참아내며 통통하게 살이 오른 지느러미 밑을 쿡 찔러 가르며 심상히 말했다. 결이 남아 있는 비늘을 슬쩍 들춰 떼어내고 하얗고 순결한 살만을 입에 넣자 결을 따라 부스러져 흩어졌다. 천천히 젓가락을 집는 신해영은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요괴에 관한 이야기는 흘려듣고 고심하지 않았으면서 툭 던진 말에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글에 올린 여자에게는 일말의 관심도 유감도 없지만 가족이나 친한 지인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정빈은 대수롭지 않게 여러 번 씹고 삼켰다.     

  들어가세요. 해영이 마주 인사하고 돌아섰다. 괜한 오기가 생겨 해영이 스스로 침묵에 이상을 느끼고 말을 걸 때까지 함께 침묵을 지키며 언제까지 저러나 두고 보려고 했던 정빈은 황당함에 헛웃음을 흘렸다. 뭐가 그렇게 충격인 건지. 실례를 논하거나 이유를 묻기엔 남의 인생에 관여하는 것은 질색이라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서울로 이사한 후로 태산시에 찾아온 적은 없었다. 요괴를 마주했던 일이 강한 공포로 자리 잡은 것도 있지만 눈에 띄면 죽여버리겠다는 지찬의 엄포에 잠시 겁을 먹고 물러났었다. 희소와 연락이 닿을 방도를 찾지 못한 채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서울에서 졸업했다. 학업에 치여 요괴에 대한 것은 거의 잊고 어렴풋이 악몽처럼 기억에 남아있었는데, 희소의 SNS를 엿보다 발견했던 신해영 이름 석 자를 블로그의 게시물에서 보고 불현듯 악마 같던 요괴의 눈이 떠올라 섬찟했다. 자신의 몸과 맞닿아 있는 일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최면처럼 빨려 들어 미동도 할 수 없던 눈동자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저편으로 넘어간 실낱같은 기억을 끄집어냈다.     


  너 엊그제 걔랑 하교했지.

  승현이 정빈의 책상에 손을 올린다. 원 플러스 원처럼 지찬도 옆에 선다. 허리를 숙이고 가방을 뒤적이던 정빈이 고개만 올리자 눈을 부리부리하게 뜨고 팔짱을 끼며 입을 살짝 내민다. 자기 엄마가 걔네 부모랑 아는 사이라 엊그제부터 학교 갔다가 집에 안 들어온 거 다 안다고, 경찰에 실종 신고하고 난리도 아니라고, 묻지도 않았는데 순순히 실토한다. 아는 거 없냐. 없다고 몇 번을 말해. 마지막으로 본 게 너잖아. 정빈은 한숨을 짧게 쉬고 말한다. 그렇게 잘 아는 사이면 왜 걔를 도와주지 않았어? 승현이 멈칫한 순간을 틈타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낸다. 도와준 건 난데 왜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추궁을 받아야 하지? 난 그냥 도왔을 뿐이야. 걔가 안쓰러워서. 말문이 막힌 승현이 그럼, 하고 더듬거리자 정빈이 침착한 어조로 말한다. 집 앞이 아니라 공원 쪽에서 헤어졌어. 어디로 갔는지 나도 몰라. 그 공원이 어딘데, 지찬이 진지한 얼굴로 묻는다. 태산 공원. 선선한 대답에도 의뭉스럽게 바라보는 승현을 바라보던 정빈이 비릿한 웃음을 짓는다. 궁금하면 가보던지. 경찰이 알아서 찾을 테지만. 정빈이 고개를 빼 칠판 옆에 붙은 시간표로 다음 시간 과목을 확인하며 무언의 눈치를 주자 승현이 가만히 멀어진다. 아, 하고 작게 뱉은 말에 귀신같이 반응한 승현과 지찬이 멈춰 선다. 정빈은 조소를 숨기며 서랍에서 교과서를 꺼낸다. 숲의 요괴가 있다는데. 무서워서 못 가려나? 조롱 조가 아니라 담백한 어조였기에 요괴라는 말에 미간을 좁히던 승현은 입술만 조용히 일그러뜨린다. 요괴? 곱씹듯 중얼대는 지찬의 말을 뚫고 언제까지 반드시, 공원으로 나오라고 통보한 승현은 벌게진 얼굴로 때마침 울리는 종소리를 따라 자리에 앉는다. 정빈은 조용히 미소를 머금고 있다.      


  토요일의 대낮은 눈부시다. 정빈은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 찾아와 같은 말을 반복한 승현의 성의에 어울려주듯 공원 근처 카페 앞에 서 있다. 멀지 않은 곳에서 승현이 정빈의 이름을 부른다. 고개를 돌린 정빈의 얼굴이 흠칫 굳는다. 조잡한 프린팅이 있는 후드티를 입은 지찬 옆에 희소가 있었다. 길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고 하얀 레이스가 들어간 분홍색 티셔츠에 회색 치마바지를 입고 재잘대며 걸어오는 희소를 보자 표정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나 성큼 다가온 승현이 말을 걸자 금세 갈무리한다. 승현은 희소가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얼굴이 상기되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숲에 들어갈 건 아니지? 길어진 머리가 눈썹을 찔러 머리를 매만지며 지찬이 말한다. 승현은 희소를 힐끔 바라보고 자신은 들어가겠다고 한다. 임성원이 여기 있다는 보장이 없잖아. 이상한 낌새를 느낀 지찬이 지금이라도 그만두자고 말하지만 희소까지 가세하자 입을 다문다.

  나는 빠질래.

  지찬이 단호하게 반대표를 던지자 승현은 심기가 뒤틀린 얼굴로 그러던가, 대답한다. 정빈은 제삼자인 양 듣고만 있다 불쑥 시야에 고개를 들이민 희소에 뒷걸음질한다. 왜 피하고 그러냐. 희소가 장난스럽게 씩 웃는다. 양쪽으로 시원스레 벌어진 입술 사이로 고르게 난 작은 치아가 보인다. 정빈은 심장이 쿵 떨어져 저도 모르게 주섬거리며 심장께를 쥔다. 정빈은 희소와 마주 선 적도 눈을 맞춘 적도 말을 섞은 적도 없다. 붙임성이 좋은 희소는 대답 없이 멀뚱하게 바라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말을 건다. 진짜 요괴가 있어? 그렇다고 대답하자 와아, 감탄하며 말간 웃음을 터뜨린다. 기다리다 못한 승현이 불퉁한 얼굴로 희소의 소매를 잡아끌며 안 가냐고 채근한다. 정빈은 반쯤 포기해 먼 곳을 바라보는 지찬을 흘기다 마침내 입을 뗀다.

  여자는 못 들어가.

  왜?

  순진한 눈망울을 보자 저도 모르게 실룩 웃어버린다. 아차, 입꼬리를 축 내린 정빈은 부담스러울 정도로 죽상이 된 얼굴로 갸웃거리는 희소를 보며 하고많은 이유를 가늠하다 적당한 구실을 고른다.

  너… 너 생리하잖아.

  뭐?

  여자는 불결해서 못 들어가.

  희소의 얼굴이 서서히 빨갛게 익는다. 덧붙이는 말이나 변명의 여지도 없이 완전히 종결된 정빈의 말이 실수나 오해에서 비롯됨이 아님을 인지한다. 기지개를 켜던 지찬은 굳고 승현은 입을 작게 벌린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천천히 뒷걸음질한 희소는 지찬과 승현을 번갈아 보다 작은 입술을 새초롬하게 깨물어 눈물을 삼키고는 등을 돌려 뜀박질한다. 정빈은 그런 중에도 희소를 지켰다는 생각뿐이어서 빙글빙글 웃기만 한다.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는 꼴이 꼭 뭐 마려운 개 같은 승현이 희소처럼 미간을 있는 대로 좁히며 바라보다 울면서 뛰어간 희소를 망연히 바라보기를 반복한다. 그 모습이 하나의 극처럼 희소를 흉내 내는 것같이 우스워서 손바닥 안으로 웃음을 내보내자 팍 인상을 쓴 지찬이 미친 새끼, 짓씹으며 소년의 가슴팍을 힘을 주어 밀치고 희소를 따라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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