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사람
처음은 우연. 이다음은 계획.
정빈은 요괴라는 좋은 구실 덕분에 자신에게 모욕을 준 두 사람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갈 수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후에야 돌아온 성원과 승현은 다친 곳 하나 없이 성하게 살아 돌아왔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았다. 성원은 극심한 불안을 호소하며 학교에 얼굴을 비추지 않다가 조용히 이사 갔으며, 승현은 해리성 기억상실로 숲에 갔던 기억을 통째로 지워 치료받다가 소식이 끊겼다. 학부모 사이에서 아이들의 실종이 큰 화제가 되면서 많은 사람이 귀추를 주목하는 사건이었는데, 비슷한 시기에 실종 신고가 들어온 사건이라 경찰은 승현이 무의식중 중얼거린 ‘요괴’라는 주목해 동일범의 소행으로 보고 수사를 진행했다. 성원과 승현의 이야기는 엇갈리는 부분이 있었으나 단 하나 동일점은 ‘숲’과 ‘요괴’라는 단어를 들으면 발작하며 울부짖고, 구석으로 숨어들어 머리를 때리고 자해하며 큰 트라우마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다. 정빈은 두 차례의 실종 사건 모두의 마지막 목격자이자 용의자였지만 진술이 명확하고 증거와 정황이 없다는 이유로 목격자 신분으로 남을 수 있었다. 묻는 이들에게 요괴를 만난 일에 대해 떠벌리는 건, 일종의 보상 같기도 했다.
정빈은 오랜만에 떠오른 만큼 좋을 대로 희석된 기억을 도로 덮어두었다. 한참을 걷다 보니 간판에 ‘새먼’이라고 적힌 커피숍이 모퉁이에 살짝 가려져 보였다. 정빈은 망설임 없이 유리문을 열었다. 딸랑, 경쾌한 소리와 함께 소음으로 들어갔다. 정빈은 카운터와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37번 음료 나왔습니다. 갈라진 목소리로 소리치는 20대 여자 아르바이트생의 옆에 두 명의 남자 아르바이트생이 있었다. 정빈이 휴대폰을 찾으려 주머니를 뒤적일 때 영어로 ‘스태프 온리’라고 적힌 문에서 카운터의 아르바이트생들처럼 갈색 앞치마를 맨 여자가 나왔다. 정빈은 움직임을 멈추고 바라보다, 여자가 카운터로 향하기 전에 휴대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지체하지 않고 다가갔다. 구두 소리에 돌아본 여자의 얼굴이 희게 질려 천천히 굳어졌다.
네가 왜 여기에…….
정빈은 주춤거리는 희소를 보며 해사하게 웃었다.
아는 사람 만나러.
나가. 당장.
나 손님인데.
장난스럽게 웃자 희소가 어금니를 으득 짓씹었다. 마침 주문하는 사람이 없어 창고와 카운터 사이에 우두커니 서 있는 희소를 아르바이트생들이 기웃거렸다. 이따 얘기해, 희소가 급하게 마무리 짓고 카운터로 향하자 정빈은 아무렴 좋다는 듯 싱글거렸다.
의자 끄는 소리가 들리자 타자 소리가 그쳤다.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든 희소가 시선을 주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정빈은 장단을 맞추듯 천천히 노트북을 덮고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을 빼며 희미하게 웃었다. 희소는 불쾌함을 표현하지도, 팔짱을 끼고 따지듯 묻지 않고 가만히 그를 마주했다. 먼저 시선을 피한 쪽은 정빈이었다. 정빈은 입술을 작게 벌렸다 다물며 셔츠 소매를 손가락으로 당겨 걷었다. 환한 조명과 비스듬하게 기운 하얀 우드 블라인드 사이에 몸을 끼워 넣은 햇볕이 시계 위로 쏟아졌다.
요괴 기억나?
탁자 위에 올려둔 음료를 집으려던 희소가 멈칫하자 정빈이 연속된 오답으로 비껴가다 답 맞춘 아이처럼 웃었다. 그 말이 왜 나오냐고, 할 말이 그것뿐이냐고,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뭐냐고, 보통의 대화처럼 흘러가려다 튀어나온 말은 고작, 아직도 그러고 사니, 희소는 유리컵을 쥐며 냉소 없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너 그거 정신병이야. 현실을 살아. 요괴 따위는 없어.
요괴는 허울이다. 희소는 죽고 싶은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살 숲에 제 발로 찾아가고 쉽게 입을 올리고 요괴에게 당했다는 말로 포장하는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의자에 등을 기대 가만히 경청하던 정빈은 날 선 희소의 말에 헛웃음 흘렸다.
아직도 그 안에 사는 건 너지. 정빈이 비소했다. 희소는 가만히 입술을 깨물며 멍울이 맺힌 눈에 힘을 주었다.
그때 좋다고 따라온 건 너야.
넌 다 알고 있었어.
희소가 푸르게 눈을 빛내며 분노를 짓씹었다. 커다랗게 뜬 눈에서 혈루가 흘러나올 듯 불그스름했다. 정빈은 태산시를 떠나던 날부터 이 순간을 기다리지 않은 날이 없었으나, 눈앞에 둔 분노는 예상보다 시푸르고, 깊고, 달갑지 않아서 심드렁하게 눈썹을 위아래로 실룩거렸다.
오랜만에 만나서 할 얘기는 그게 끝?
너랑 뭔 얘길 더 해.
신해영한테 내 얘기는 왜 했어?
희소가 당황과 줄지 않은 분노가 뒤섞인 얼굴로 미간을 찌푸리자 그저 짐작했을 뿐이라며 팔목이 드러나도록 당긴 셔츠 소매 단추를 풀어 팔꿈치 위로 걷어 올렸다.
요괴 얘기 같은 거 이제 지겹거든, 관심도 없고. 왠지 이름이 익숙해서 만나봤지. 묘하게 날 아는 것처럼 대하더라고.
오늘 만났다는 사람이……
뒷말을 흐린 희소는 얼굴을 구기며 무슨 얘기를 했냐고 따지듯 물었다.
웬 여자를 찾던데 요괴에게 가족을 잃은 모양이라고 술술 털어놓자 희소의 얼굴이 희게 질렸다. 신해원. 그런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 이름이 갑자기 머릿속에 들어왔다.
해영에게 동생이 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다. 지친 얼굴로 카페를 나서면서 하루도 거르지 않고 출구를 앞둔 터널처럼 환한 달빛을 담은 사진을 누군가에게 보내며 새어 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것도, 닮았지만 조금 더 앳되고 생기 있는 여자아이의 사진을 휴대폰 배경 사진으로 설정한 것도. 무단으로 결근한 날 이후 유독 퀭한 얼굴과 굽은 어깨는 비약일 것을 알면서도 짜맞췄다. 그런데 내가 보기엔 아니야, 정빈의 중얼거림은 들리지 않았다. 희소의 시선이 허공을 향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정빈은 꿋꿋하게 말을 이어갔다.
만났을 때도 이름은 절대 언급 안 하더라고. 흔한 얼굴이었는데, 어디서 본 것도 같고…… 독백하며 골똘히 생각하던 정빈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손가락을 맞부딪쳤다. 그러나 곧 눈매를 가늘게 만들며 걔는 남자인데, 고개를 갸우뚱했다.
*
납골당에서 소현을 만난 것은 우연이었다. 오랜만이에요, 어색함인지 민망함인지 모를 웃음을 지으며 슬쩍 손을 든 소현은 해영의 옆에서 멀뚱하게 서 있는 경준을 보고 어깨를 세웠다. 아저씨? 소현이 목소리를 낮추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경준도 얼떨결에 인사했다. 까만색 반팔 셔츠에 슬랙스를 입고 긴 머리를 하나로 묶은 소현은 울었는지 붉어진 눈가로 경준과 짤막한 대화를 나누고 도로 안쪽으로 들어갔다. 박혜경이라 적힌 함 앞에 우뚝 선 것을 보니 혜경의 오랜 친구인 듯했다.
정빈을 만나고 며칠이 흘렀다. 해영은 수영이 준 자료를 토대로 여자에 대해 알아봤지만 진전이 없었다. 자살 숲이라는 별칭이 생긴 5년 전 사건부터 정리된 자료는 대부분 원인을 알 수 없는 불가사의한 자살에 관한 자료였다. 아무리 관련 없는 타인이라 해도 안쓰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했다. 이들도 그리움을 따라갔는지, 혹은 알지 못하는 고충이 죽음으로 이끈 건지, 감정이 배제된 기사와 메모지만 시간이 지나도 싱숭생숭한 마음이 가라앉지 않아 주변을 걷다 경준과 만났다. 경준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지만 금세 반갑게 다가왔다. 혜경의 죽음에 대한 자료를 보고 나온 터라, 납골당에 간다는 경준의 말에 덜컥 동행하겠다고 말했다.
경준의 차를 타고 그를 따라 들어온 납골당은 고요하고 무거운 분위기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가운데 커다란 원 모양의 공간을 둘러싸는 형태로 여러 개로 나뉜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들어찬 안치단에 비좁을 정도로 함이 빽빽했다. 해영은 우두커니 선 경준의 옆에서 짧게 묵념한 뒤 걸음을 옮겼다. 겨우 참고 있던 울음을 공허 속에 터뜨리며 가늘게 떨리는 경준의 굽은 등이 한없이 작아 보였다.
잘 지냈어요?
해영의 뒤에 따라붙은 소현이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해영은 안치단을 따라 움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저하며 그건 잘 해결됐냐고 물어보려던 소현은 금세 풀이 죽은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이고, 안치단 가를 둘러 걷는 해영을 졸래졸래 따라 걸었다.
어떤 함에는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과 빈 곳을 채운 꽃이, 어떤 함에는 유리에 붙은 유족들의 편지와 딱딱한 사각의 형태를 감싸 안는 납골당 리스가, 어떤 곳엔 새빨간 십자가가 새겨진 납골함 앞에 어린아이의 사진이 있었다. 해영은 때 묻지 않은 하얀 배냇저고리와 주먹보다 작은 손 싸개가 가지런히 놓인 함 앞에 멈췄다가, 조심스럽게 걸음을 뗐다. 집에 가자고 떼쓰던 아이도 잠자코 입을 다물 만큼 공간에 깃든 수많은 눈물과 안식이 느껴졌다. 어느 때보다 가까운 죽음과 섞인 덜어낼 수 없는 아픔을 무겁게 실감하며 경준의 울음소리가 잦아들 때까지 다른 곳을 둘러보려 방 밖으로 나왔다. 문으로 연결되지 않고 벽으로 분리된 공간은 바로 옆에도, 밑층과 위층에도 많았다. 그것은 마치 자그마한 함 안에 있는 영혼들에게 자유와 안식을 건네는 동시에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나누지 않는 교차로 같았다.
해영은 바로 옆에 있는 공간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안치된 함은 저마다의 사정과 아픔을 끌어안고 있었다. 화려하게 꾸민 납골함에도, 사진도 편지도 꽃도 없는 납골함에도, 가만히 바라보며 떠난 이를 그리워했을 누군가의 온기가 남아 있었다. 해영은 온기가 사라지지 않도록 붙잡아두며 안치된 이의 지난 삶을 유족들이 남긴 물건으로 짐작했다. 해영은 할 말을 삼킨 얼굴로 졸졸 따라오는 소현이 신경 쓰여 말을 걸려다 말고 걸음을 늦춰 세 번째 줄 다섯 번째 칸에 시선을 고정했다.
팔 년 전 날짜가 적힌 유골함 유리에 중년의 여자와 자주색 교복을 입고 활짝 웃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의 중학교 졸업식 사진이 붙어 있었다. 테두리 부분이 닳은 사진에는 모녀로 보이는 두 사람의 뒤편에 ‘세란 중학교 졸업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로 된 커다란 현수막이 있었다.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굳어져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는 해영의 뒤에서 소현이 기웃거렸다. 해영은 혼란이 가득한 얼굴로 유골함에 적힌 이름과 사진을 번갈아 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 여자다.
분명했다. 웃고 있는 얼굴은 낯설었지만, 분명 나이아였다. 대체 왜 이곳에 여자의 사진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해영은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함에 세로로 표기된 이름, ‘이미희’는 여자의 모친일 것이라고. 함에 적힌 연도와 사진에 나온 현수막에 적힌 연도는 동일하게 팔 년 전이었다. 여자의 외형에서 짐작할 수 있는 나이와 사진으로 추정한 나이도 얼추 비슷했다. 해영은 날짜와 사진, 함에 쓰인 이름을 휴대폰 메모장에 옮겨 적었다. 외형만 사람의 것을 빌린 요괴인지, 그저 기적을 만드는 사람인 건지,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지는 여자의 정체를 움켜쥐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