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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소음 Oct 27. 2024

12. 완벽한 울타리

물 위를 걷는 사람


  강 씨는 태산시로 돌아왔다. 업체와 관련한 사건이 뉴스로 퍼져 떠들썩한 도중 태산시에 머무르는 것은 멍청한 일이라고 판단해 며칠간 서울로 떠나 급하게 거처를 마련한 뒤 몸을 숨겼기 때문이다. 태산시를 떠난 며칠 동안 황산호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얼마 전 무언가를 조사한다며 사무실을 나간 뒤 연락이 두절됐다. 제 밑에 있는 놈에게 숲에 관한 자료를 요청했던 것 같은데, 숲에서 강 씨가 물러선 일을 기억하면서도 캐낼 만큼 분별없진 않았다. 언젠가 연락이 닿을 거라 생각하며 다다른 붉은 지붕의 주택의 대문을 열어 들어갔다. 울퉁불퉁한 돌계단을 오르고 세월이 스쳐 간 현관문 앞에 섰다. 열쇠로 여는 문이지만 집주인 성격에 열쇠를 들고 다니진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들고 다녔지만 잃어버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닐 테고, 눈에 띄지 않는 곳을 파악해 숨긴다기엔 허술하니까…… 강 씨는 발끝에 맞닿은 화분을 내려 봤다. 구두코로 작은 화분을 받친 물받이를 밀어내자 작은 은빛 열쇠가 나타났다. 이런 데 두지 말라니까. 강 씨는 주운 열쇠를 문고리에 꽂았다. 찰칵, 열쇠가 잠금장치를 밀어내며 문이 열리자 발소리가 나지 않게 들어갔다.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거실과 방이 캄캄했다. 문을 열자마자 코로 들어온 썩은 내의 근원지로 가자 음식물이 닦이지 않고 냄비째로 싱크대에 쌓여 있었다. 싱크대 옆 음식물을 담은 지퍼백들은 터질 듯이 부풀어 벽에 기대어 있었다. 바닥에 엎어진 쓰레기봉투 위에는 초파리가 맴돌았다. 뒤로 돌자 두 사람이 겨우 앉을 수 있을 작은 식탁에 수영이 두고 간 휴대폰과 종이가 어질러져 있었다. 강 씨는 부엌 불을 켰다. 어둠이 조금 걷힌 자리에 수영의 필체로 적힌 메모와 최근 10년간 일어난 자살, 실종 사건, 요괴에 대한 자료가 있었다.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왜?

  강 씨는 잘못 프린트되어 뒷면에 메모한 이면지를 들었다. 박혜경, 박경준, 10시, 세미나실, 초고 마감, 단순한 단어의 나열에서 유난히 정갈한 필체로 쓰인 메모가 눈에 띄었다. 이 새끼 이름이 왜 여기 있어? 강 씨는 살며시 눈살을 찌푸렸다. 신해영이라는 이름 밑에 두 겹의 밑줄이 그어져 있기까지 했다. 이름 옆 여러 갈래로 뻗은 줄기에 요약된 사정과 만남에 필요한 항목이 적혀 있었다. 강 씨는 해영을 처음 마주했을 때를 떠올렸다.

  신해영의 부친은 빚을 갚을 능력이 없었고 납작 엎드리는 것 외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는 인간이었다. 굽은 등으로 신음하며 바닥을 기던 남자는, 옆에 있던 대머리에게 내보내라는 눈짓을 보내려 할 때 다급하게 욱여넣듯 자신에게 아들이 있다고 말했다. 제 아들이 얼마나 총명하고 유망한지 무용한 말을 지껄이는 남자의 의도가 분명해서, 역겨움을 참지 못해 마른 몸뚱어리를 걷어찼다. 늘어나는 이자, 예상대로 갚지 못하는 남자의 집에 찾아갔을 때, 강 씨는 신해영과 처음으로 마주했다. 제 부친보다 비쩍 말라 품이 큰 옷을 입고, 얼굴이고 몸이고 피와 상처, 멍으로 가득한 채 남자의 손아귀에 멱살이 잡혀 있었다. 소리를 따라 열린 문 쪽을 돌아본 덥수룩한 머리카락 사이로 몇 차례 꺾인 눈빛은 여전히 형형한 빛을 띠고 있었다. 강 씨는 자신을 보자마자 사색이 되어 무릎을 꿇고 비는 남자를 바라보는 대신 추레한 모습으로 빌빌거리는 남자를 내려 보는 해영의 무감한 눈동자 속에 얼핏 비친 감정을 잡아챘다. 그러나 그대로 들추지 않고 묻어두며, 자신을 향하지 않는 시선을 돌리려 바지에 매달리는 기행을 보이는 남자를 거칠게 떼어내고 기한 지켜, 그 말을 끝으로 반쯤 열린 문으로 나갔다. 닫히는 문틈으로 깜빡임 없이 자신을 쳐다보는 해영의 시선을 피하지 않으면서.

  기한이 지나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남자는 없었다. 해영과 그의 어린 동생만 남아 있었다. 씨발, 튀었네. 뒤따라온 망치가 중얼거렸다. 네 아빠 어디 있냐. 침착하게 상황을 파악한 대머리의 물음에 해영이 물끄러미 시선만 올려 바라봤다. 안 돌아올 거예요. 그 새끼. 변성기가 지나지 않은 가느다란 소년의 목소리에 대머리가 눈을 껌뻑거렸다. 들어오자마자 화장실로 직행한 도끼가 여기도 없습니다, 혀를 차며 문을 거칠게 열었다. 강 씨는 손목에 찬 메탈 시계를 흘깃 바라보다 돌아가자고 눈짓했다. 그동안 잠자코 있던 해영이 목덜미를 주무르며 돌아서는 대머리의 소매를 약하게 잡았다. 아저씨 돈 많아요? 어린애는 저가 전문이라며 적당히 상대하던 대머리는 몸을 굳히고 강 씨를 돌아봤다. 전문이라며, 강 씨가 낮은 목소리로 눈썹을 씰룩이자 대머리는 머쓱한지 걸음을 물렸다. 그건 왜. 강 씨의 권태로운 목소리가 작은 집에 울렸다. 겁도 없이 강 씨와 눈을 마주친 해영이 대머리의 얼굴을 흘깃 바라봤다. 저도 빌려주세요. 뻔뻔한 낯짝에 강 씨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뭘 믿고? 반사적으로 묻는 대신 이유를 묻자 주저하다 침묵을 선택했다. 네 아빠가 진 빚이 이미 많아서. 에둘러 거절하는 강 씨에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제가 빌린 건 아니잖아요, 말하자 강 씨는 퍽 재미있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웃었다. 갚을 능력은 있고? 거기까지 이어갔을 때, 대머리가 웬일로 영양가 없는 대화에 참여하는지 모르겠다는 눈빛으로 고갯짓했다. 망치와 도끼에게 손짓한 강 씨는 적당히 대화를 마무리하고 명함을 던졌다. 해영은 대답을 고민하다 바닥에 던져진 명함을 줍지 않고 잠시 시선만 주었다.

  경쾌하게 울린 알림에 머릿속에서 상영되던 기억의 맥이 끊겼다. 강 씨는 화면이 켜진 수영의 휴대폰을 흘겨봤다. 이름은 등록되지 않았지만 발신인이 신해영인 건 알았다. 강 씨는 잠금 하나 없는 휴대폰을 들고 이전 대화를 빠르게 훑었다. 수영이 메모에 짤막하게 정리한 내용과 다름없이 서로를 해치지 않으려 모서리를 다듬고 늘린 대화는 결국 ‘요괴’로 연결됐다. 강 씨는 해영이 보낸 간단한 안부 인사와 짤막한 본론을 눈에 담고 식탁에 늘어진 자료를 손바닥으로 밀며 ‘이미희’라는 이름을 찾았다. 얇은 묶음으로 된 자료는 꽤 많았으나 어디에도 이미희라는 이름은 없었다.

  강수영, 신해영, 이미희. 강 씨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나열된 이름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을 수 있는 기묘한 연결고리라고 한다면……

  떠오르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     


  해영은 진동이 울린 휴대폰을 곁눈질했다. 수영이 보낸 문자였다. 목을 뒤로 젖혀 목덜미에서 올라오는 뻐근한 감각을 누르고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던 경준에게 양해를 구하며 옆으로 미뤄둔 휴대폰을 집었다.

  -만납시다.

  행복 마트 건너편 상가 1층에 있는 제과점 앞에서 보자고 보탰다. 만나서 할 말이 있는 건가. 해영은 의아함을 접어두고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자살은 기사에도 안 나와. 경준이 한숨 쉬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해영이 조금 쉬자고 말하자, 지친 얼굴로 금세 자세를 바로 했다.

  그날, 납골당에서 나오는 경준의 걸음걸이는 들어갈 때와 사뭇 달랐으나, 말없이 옆으로 다가온 해영에게 붉어진 눈가로 괜히 퉁명스럽게 궁시렁거렸다. 도울 일 있으면 말해. 한결 짧아진 말에 해영은 괜히 웃었다. 마주치는 빈도가 늘고 공통된 분모를 공유한다는 것에서 친밀감을 가지고 심적 거리를 좁힌 듯했다. 납골당에서 발견한 것을 경준에게 털어놓자 흔쾌히 도와주겠다고 나섰다.

  분명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그 밖에 정보를 알지 못해서 그런지, 벌써 한 시간이 지났지만 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자살이 기사화되지 않는다는 건 알지만 정확한 날짜와 이름을 쳐도 관련 없는 기사만 수십 개씩 올라왔다.

  암만 그래도 사람이 죽었는데……

  경준은 혼잣말하며 고개를 돌려 허공을 응시했다. 해영은 코로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납골당에서 사진을 발견한 순간 드디어 근접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더 멀어진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은 해영의 어깨를 경준이 툭 쳤다. 막막함을 견디지 못하고 호흡을 가다듬는 걸 짙은 실망에 절망하는 것으로 여긴 모양이었다.

  그동안 난 이만큼 가까이 온 적이 없어. 경준은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딸이 죽고, 말을 흐린 경준이 두 눈을 힘주어 감았다. 그 뒤로는 해영도 어느 정도 아는 얘기였다. 믿을 수 없어서 그 동호회 사람들을 붙잡았지만 돌아오는 건 늘 같은 대답, 요괴를 찾지 못해 헤매던 와중 발견한 못에 혜경이 뛰어들었다고. 증거를 찾지 못한 경찰은 혜경이가 우울증을 앓고 있단 걸 알고 자살로 결론 냈다고. 경준은 의자 등받이에 기댄 그대로 미동 없이 말했다. 가슴에 메꿀 수 없는 구멍이 뻥 뚫린 것처럼 버석한 얼굴은 고즈넉하고 메말랐지만, 실종으로 처리하려던 걸 희소가 울며 말렸다고, 이제 아버지 인생 사시라고 그리 말했다고, 내뱉는 목소리만큼은 차분했다.

  요괴는 허울일 지도 모르지. 근데 어떻게 받아들여? 어떤 부모가 그걸 받아들여. 허상이라도 붙들고 싶은 게 아빠의 마음인데……

  경준은 그렇게 말하면서 해영이 아닌 먼 곳을 바라보고 있어 혼잣말처럼 들렸다.

  왜 어떤 슬픔은 마음에 박혀 떨치지 못하는 걸까. 웃으며 보내지 못하고 미련처럼 붙들고 있는 걸까.

  해영은 기억도 잘 나지 않는 부친을 떠올렸다. 빚이 많고 술을 좋아했고 걸핏하면 때리던, 단 한 줄로 정리할 수 있을 정도로 일관되고 비루한 기억을 남긴 남자. 팔 한쪽을 못 쓰게 된 사고 이후 최소한의 경제 활동을 포기하고 틈만 나면 모친이 벌어온 돈을 야금야금 감추며, 다른 남자와 스치기만 해도 견디지 못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강박을 이미 이혼으로 남이 된 모친에게 푼 뒤에 만취할 때까지 술을 퍼마시곤 했다. 가끔 도살장으로 향하는 양처럼 끌려가는 모친을 보다 못해 대들면 후천적인 콤플렉스를 떠올리기라도 했는지, 꼭 주먹으로 때리곤 했다.

  권위가 뭐길래 잡지 못해 안달했을까. 빚을 지더라도 실행하고자 했던 사업을 향한 그의 꿈이 위태롭게나마 이어지던 평화에 균열을 가했다. 부친은 자주 끌려다녔고 맞았으며 짐승처럼 꺽꺽 울며 빌었다. 불쑥 일상에 틈입한 강 씨는 부서져 내리던 모래성을 짓밟고 해사하게 웃는 아이처럼, 남몰래 상상했던 내일을 깨뜨렸다. 빚을 감당하지 못한 부친은 어느 날 돈이 될 만한 물건과 함께 사라졌다. 돈이 얼마 들어 있지 않은 통장과 빼돌린 비상금, 모친이 성경책에 끼워둔 헌금과 텔레비전을 팔아 무용해진 리모컨. 사라진 건 모친도 마찬가지였다.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내리던 손길은 뭐였나. 가난보다 사랑이 크다는 말은 뭐였나. 파도처럼 거대한 배신감이 밀려드는 건 적어도 사랑에 거짓은 없었다는 것인데, 왜 엄마라는 말을 끝내 알려주지 않았을까.

  자발적으로 간 건지, 부친이 데리고 간 건지, 그랬다면 사랑이 맞는지, 목숨이 중한 와중에도 욕망을 무시하지 못한 것뿐인지, 아무런 결론도 내리지 못하고 무엇도 실감하지 못한 채 강 씨를 마주했다.

  해영은 강 씨가 간 뒤에야 명함을 주웠다.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빳빳한 종이를 오래도록 바라보며 뒤늦게 눈물을 흘렸다. 잉크처럼 번지는 슬픔에 소리를 죽이고 벽에 기대어 울었다. 부친의 빚을 갚아야 할 의무는 존재하지 않지만 두려움은 침묵하고 따르게 했다. 모든 것을 가지고 간 부친이 미우면서도 그라도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해영은 오래전부터 가족은 완벽한 울타리가 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가족이라는 이름은 불가능한 것들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도. 같으면서도 다른 지점이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 또한. 해영은 수영을 만났을 때 반사적으로 느낀 두려움을 부끄럽다고 생각했으면서 강 씨와 연락이 끊겼다는 소식에 솔직한 심경을 내비칠 뻔했다. 수영과 강 씨를 구별하여 대해야 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으면서 학습된 두려움이 완벽한 지점을 찾지 못해 불쑥 이런 마음이 드는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자위했다. 해영은 깊어지려는 잡념을 떨치려 양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어느새 갈림길에 서 있었다. 해영은 손을 흔들며 멀어지는 경준을 배웅했다.

  명함 어디에 뒀더라. 돌아가면 버려야겠다.     


                                        *     


  아인슈페너 한 잔 주세요.

  키오스크로 주문해 주세요.

  남자는 형식적인 어투에 고개를 흔들거리며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능숙하게 커피를 주문하는 정빈의 뒷모습을 보며 희소는 부글거리는 속을 진정시켰다. 아무리 방학이래도 바쁘지도 않은지 자신이 아르바이트하는 시간대에 귀신같이 찾아오는 것이 여간 소름 돋는 게 아니었다. 멀리 이사 간 게 아니었던가. 희소는 카페에 방문할 때마다 키오스크에 눈길도 주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주문하려는 정빈의 의도를 짐작하고 있었기에 한숨만 길게 쉬었다. 정빈은 희소가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까지 망부석처럼 자리에 앉아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노트북 화면만 들여다봤다. 처음엔 카페 밖으로 나서는 희소를 따라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 따라오곤 했는데, 스토킹으로 신고하겠다는 말에 주춤했는지 요즘은 나서는 희소를 돌아보기만 할 뿐 다급하게 따라 나오지 않았다. 희소는 혹여 해코지라도 당할까 일하는 내내 마음을 졸여야 한다는 것에 욱했지만, 며칠 전처럼 아는 척하거나 대놓고 따라오진 않으니 찝찝한 마음만 남기고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카페에 사람이 많았다. 쾌활하게 웃으며 대화하는 교복 입은 학생들부터 작은 테이블에 홀로 자리를 잡고 귀에 이어폰을 낀 채 바쁘게 타자 치는 20대, 담소를 나누는 중장년층까지. 음악 차트 1위 곡부터 연속 재생되도록 설정하고, 크게 틀어놓은 최신 유행 노래 사이로 들리는 불륜 얘기나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로 포문을 여는 비밀 얘기는 못 들은 체하며 바쁘게 주문받다 보면 깊게 생각할 겨를 없이 교대 시간이 된다.

  희소는 교대를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이끌어 유리문을 열었다. 맑은 종소리와 함께 따뜻한 실외 온도가 온몸을 감았다. 걸음을 떼는 순간 닫히던 문이 도로 열렸다. 종소리에 노랫소리가 묻혔다. 희소는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뒤따라오는 걸음 소리도 둔탁해졌다. 초록빛으로 깜빡이던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자 구보하던 희소는 허망하게 걸음을 늦췄다. 따라온 정빈이 뻔뻔한 낯으로 옆에 섰다. 아무것도 들지 않고 겉옷만 겨우 걸친 채로 슬쩍 미소를 지었다. 가방이나 노트북 같은 건 카페에 다 두고 온 모양이지, 아무나 훔쳐 가라. 희소는 반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며 신경질적으로 숨을 내쉬었다.

  왜 따라와.

  정빈은 말없이 멀뚱하게 서 있었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어서 신고하기 전에 꺼지라는 말을 단호하게 덧붙인 희소가 지나쳐 걸었지만, 정빈은 아랑곳하지 않고 따라붙었다.

  8년이나 지났는데 왜 그러는 건데.

  희소는 걸음을 멈추고 돌아섰다. 정빈의 무구한 표정은 정말로 모르는 것처럼 답답함을 드러냈다. 어처구니없는 실소를 흘린 희소는 화내려다 그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탄식하듯 숨을 뱉은 정빈이 성큼성큼 걸음을 앞질러 희소의 앞을 막아섰다.

  그건 사고였어.

  희소는 가로막은 정빈을 둘러 가려다 또다시 걸음을 멈췄다. 사고라니. 고작 한다는 변명이 사고라니. 실소조차 나오지 않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네가 양심이 있으면 그딴 말은 하면 안 되지.

  서늘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를 부릅뜨자 되레 푹푹 한숨만 쉬었다. 멀끔한 차림새도 나긋나긋한 목소리도 증오스러웠다. 이번에 따라오면 정말로 신고하겠다며 희소는 씩씩하게 걸음을 옮겼다. 뭐라도 깨달은 게 있는 건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건지, 뒤따라오는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가만히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모양이었다.

  신해영은 그 여자 찾았대? 정빈이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뒤편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희소는 괜히 울컥했지만 멈춰 서지 않았다. 수작이 분명했다. 해원의 일은 자신과 관련이 없고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뒤였으니, 걸음을 멈춰 경청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됐다. 희소가 걸음을 멈추지 않자 정빈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그 여자 닮은 사람을 안다고 신해영한테 전해. 희소는 별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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