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이주, 워킹맘시절이 생각났다. 지금도 문득 그 장면이 뇌리에 스쳐 지나가면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난다. 시어머니는 강원도 춘천으로 올라가시고 나서 제주도에 우리 네식구만 있을때다. 나는 회사다니고 가게는 남편이 혼자 저녁 장사준비를 했다. 저녁 6시에 아르바이트생이 왔다. 평일 저녁 5시가 넘어 일하는 남편이 전화가 오면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아르바이트생들은 저녁 6시에 오고, 갑자기 단체예약이 들어올 때 혹은 손님이 이른 시간 몰아치듯 들어오면 전화해서 일찍 좀을 수 없냐고 전화 했다.
회사는 출근 9시해서 퇴근 6시 맞춰 해야지만 월급을 받아야 하는 실정인데 남편에게 오는 전화를 받는 건 마음도 몸도 아주 불안했다. 구제주에서 신제주 노형까지 눈썹이 휘달리듯 차를 몰고 오던 중 전화가 또 왔다. 초등학교 2학년 아들의 전화였다. 회사에서 퇴근하고 가게에서 같이 일을 도와주다가 저녁9시가 다 되서야 집으로 아이들을 데리고 들어가곤 했다.
초등학교 다니던 아들과 딸은 학교, 학원을 가게 근처로 다니기 때문에 끝나고 가게로 와 놀이터에서 놀다가 같이 들어갔다. 아들과 딸이 둘 다 아파서 집에 일찍 들어가고 싶다고 하길래 집으로 걸어가라고 했다. 노형초등학교에서 연동에 있는 집까지는 어른이 걸어서 20분 되는 거리였다. 혼자서 고분분투하듯 손님을 맞이하고 있는 남편에게 아이들까지 챙길 여념이 없길래 아들도 눈치껏 나와서 전화를 했으리라 짐작했다.
이제 와 생각하면 택시라도 챙겨서 보낼걸. 그때 왜 그런 생각을 못 했는지 아쉬울 뿐이다.
몹시도 추웠던 겨울이었다. 노형동 오거리에서 추운 듯 잔뜩 웅크리고 가는 나의 두 아이를 내 두눈으로 보았다. 아들이 아픈 동생의 어깨를 토닥거리며 잘 걸어가 보자며 얘기하는 것만 같았다. 책가방을 메고 걷던 두 아이의 모습을 노형오거리 신호 대기 중에 마주쳤다. 1차선에 있어 꽉 막혔던 퇴근길 차선을 변경할 수는 없었다. 가게가 먼저 우선이라고 생각이 들었으니까. 여기서 더 지체되면 가게 쪽으로 주차도 못 했을 거니까.
그냥 보낼 수밖에 없었다. 차 안에서 바라보며 가슴이 미어질 듯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무 지인 없는 제주 하늘 아래 아이들이 아프니 돌봐줄 사람이 없다니. 나의 처지와 상황이 야속하기만 했다. 춘천에 있었으면 시댁, 친정에 누구든 집 와서 아이들 봐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가끔 친정엄마에게 전화하면 가까이에 살면 혹시 가게가 와서 바쁘기라도 하면 설거지라도, 아이들이라도 돌봐줄텐데라고 말씀하신다. 그날도 여느때와 마찬가지로 사무실 퇴근후 가게로 다시 출근할수밖에 없었다.
이제 아이들은 자라서 중학생, 초등학생이 되었다. 그때 그 시절 따뜻했던 오빠의 모습을 사라진 채 현실 남매 모습이다. 집에 같이 있지만, 각자의 방에서 생활하며 생사만 확인하는 현실 남매. 서로 같이 있으면 으르렁거리다가도 있는 듯 없는 듯이 하는 사이가 되어 버렸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의 나의 못된 기억이 가슴에 남았다.
차마 아이들에게 너희들을 보았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에겐 그 누구한테도 털어놓지 못할 평생 하지 못할 말과 기억들이다. 그렇지만 나는 기억해야만 일이었다. 지금까지 가게를 버텨오며 가정의 삶에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는 힘의 원천. 오늘도 나는 가게로 출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