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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수 Oct 20. 2022

어려운 텍스트를 독해하는 법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 독해하기


어려운 텍스트를 독해하기에 대하여 쓰려다가 그것이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이미 수능 국어의 몇 가지 관문을 통과해왔고, 그것은 우리가 글을 구조적으로 파악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내가 딱히 얹을 수 있는 말이 없다…



그렇기에 구조로 파악할 수 있는 전통적인 글보다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해석 틀에서 자꾸 벗어나려는, 의도적으로 문장의 패러프레이징에서 벗어나려는 텍스트를 가져오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다음은 파스칼 키냐르의 <음악 혐오> 일부이다.






공포와 음악. 음악 mousike과 공포 pavor. 이 두 단어는 영원히 결속된 것만 같다. 비록 그 기원과 시대가 어긋난다 할지라도, 성기와 그것을 덮고 있는 천과 같이.


> 수능 비문학에서 이 지문이 나오면 우리는 앞으로 두 가지 개념이 대비될 것이라 예상할 것이다. 음악과 공포.


바로 뒤 문장에서는 그 대응관계를 다시 천과 그 아래의 성기로 반복해준다. 첫 문장에서부터 미묘하게 끊어지는 연결고리에 당황스럽다. 도대체 음악과 공포가 어째서 천과 성기의 대응관계와 같은 거지?



천들은 벌어진 상처를 덮고 부끄러운 알몸을 가린다. 모태의 어둠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목소리를 발견하자마자 첫울음을 터트리는 갓난아이를 감싼다. 그 최초의 울음은 죽을 때까지 지니게 될 "동물적" 폐호흡 특유의 리듬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소리다. 고대 라틴어 동사인 solor는 끊임없이 괴롭히는 것에서 시선을 돌리게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것은 인간 가슴 깊은 곳의 짓누름을 완화하고 내부를 부패시키는 쓰라림을 달게 하는 동시에, 내면에서 시시각각 기회를 엿보고 불안과 고열에 사로잡힌 공황의 순간 몸을 일으켜 곧장 달려들 기세로 끝없이 위험하는 고통을 잠재우는 것을 의미한다. 프랑스어로 여신muse을 ‘고통으로부터 주의를 돌리게 하는amuse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 키냐르는 음악-공포의 이미지에서 천-성기로 이미지를 ‘던지고’ 그 던져진 이미지는 갓난아이 울음의 이미지로 다시 도약하는데, 사실 갓난아이 울음은 음악-공포의 이미지 바로 옆에 자리해있다. (아이는 공포에 휩싸여 운다)


결과적으로 큰 원을 그리며 의미망을 짜는 키냐르의 작법은 음악 하는 사람과 천 아래의 알몸, 그리고 알몸의 갓난아이의 툭툭 끊어지는 이미지들을 한데 묶어 조인다.


개념을 묶어 분류하려는, 개념의 위치를 잡으려는 우리의 시도와 그를 거부하며 도약하는 키냐르의 작법이 만나 보다 폭넓은 이미지들, 언뜻 연관성이 희미해 보이는 이미지들을 묶어 생각하게 한다.



이것이 '위안을 뜻하는 라틴어 명사 consolatio의 기원이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양분되었을 때, 사회적 유대 관계와 종교적 신심religio으로 통합되었던 영토가 그리스도교와 같은 그리스도교(엄밀히는 아리우스파)인 이방인들의 뜻대로 재편되기 위해 찢어졌을 때, 로마의 한 학자가 동고트의 왕 테오도리쿠스의 명에 따라 감옥에 갇혔다. 처음에는 칼벤차노 지역에서, 그 후 파비아의 탑으로 옮겨져 유폐되었다. 6세기 초의 일이다. 로마 귀족이자 신플라톤주의자, 포르피리오스와 암모니오스"의 신봉자이며 심마쿠스의 증증손녀의 남편으로 아내의 육체를 영원히 빼앗겨 버린 이 젊은 학자는, 감옥에서 「철학의 위안」을 썼다. 철학philosophia이 영혼의 위로 solor보다도 대담한 적이 한순간이라도 있었는가? 이 책은 어느 가을날 도끼질 한 번으로 중단되었다. 524년 10월 23일이었다. 그의 이름은 아니키우스 만리우스 토르쿠아투스 세베리누스 보에티우스였다. 그가 파비아의 감옥에서 참수되기 전, 죽음의 세계 에서 온 영혼인 상imago 하나가 여인의 모습으로 그의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위안의 형상"이었다. 나는 여기에 [철학의 위안] 제1권의 산문 1을 적는다. "내가 말없이 홀로 되새기며 침묵 속으로 밀어내는 탄식을 철필로 써 내려갈 때, 머리 위로 거대한 여인 하나가 꼿꼿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여인은 젊었다가 늙었다가 했다. 두 눈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음악학교 Conservatoire 위로를 위한 장소 Consolatoire. 요제프 하이든은 여행을다닐 때면 작은 가계 수첩을 지니고 다녔다. 그는 수첩에다 소리에서 비롯된 오래된 고통을 누그러뜨릴 방법을 찾노라 적었다. 그 고통은 하이든이 태어난 1730년대. 오스트리아와 형가리의 국경인 로라우에서 비롯되었다. 라이타 강의 속삭임, 수레를 만드는 목수의 작업실, 문맹의 아버지, 수레 제조용 목재들, 느릅나무와 물푸레나무와 떡갈나무와 소사나무에 관한 지식들, 수레의 끌채, 바퀴와 축, 대장장이의 모루, 망치의 진동, 톱과 톱니들. 요컨대 그의 유년 시절과 관련된 모든 연민과 슬픔이 그의 리듬 속으로 달려들었다. 그는 작곡을 하는 것으로 비탄의 감정을 견뎌 냈다. 하이든이 죽기 전 몇 달간, 그 리듬은 전보다 빠르게 그를 나락으로 떨어뜨렸다. 그는 리듬을 멜로디로 옮길 수도, 적어 둘 수도 없었다. 고정된 언어 형식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으면서도 이미 발현된 언어로는 소리처 부른다 한들 소용없는 것. 그리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언어화할 수 없음. 하이든은 어느 폭풍우가 몰아치는 날, 높은 언덕 위에서 십자가에 매달린 자신을 발견했다. 산 채로 손에 못질하고 두 발을 모아 두드리는 망치 소리가, 예수가 들어야 했던 바로 그 소리가 자신 안에 있었노라고, 그는 말했다.



>갑자기 다시 위안consolatio로 점프한다. 키냐르의 이런 툭툭 끊어지는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앞서 이해한 것을 소중하게 그러모으고 일단 계속 읽어나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언젠가는 다시 연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자.


위안consolatio는 음악으로 보인다. 그러나 키냐르는 단순히 ‘음악을 위안으로 고통을 견뎌낸다’는 문장을 반복하지 않는다. 그는 조금 더 복잡한 이야기를 들고 와 독자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이 문장에서의 주체는 철학자와 음악가인데 철학자는 음악이 아닌 철학을 택한 까닭에 위로에 가닿지 못한다(철학이 영혼의 위로보다 대담한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그는 죽음의 문턱에서야 위로의 형상을 마주 보는 비극적 인물이다. 또 음악가는 고통을 견뎌내는 방법으로써 음악을 택하는데, 사실 그 고통의 기원이 소리이다.



그렇게 키냐르는 도식에 실패한 사람 혹은 그 도식의 순서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사람을 가져온다.


키냐르가 도식에서 자꾸 벗어나려는 이유는 그 도식은 너무 단순해서 오해받을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도식이라는 평면에 혼란의 빛을 비추어 대상의 입체적인 면을 드러낸다.


특히 음악가는 도식의 순서를 혼란스럽게 하는 인물인데, 음악을 불러오는 고통이 사실 소리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통해 음악과 고통이 단순히 반응과 원인의 관계가 아니라 밀착해있는, 선후관계의 구분이 의미가 없는 관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음악은 공포를 다스리지만, 그 공포는 다시 음악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렇게 키냐르는 음악과 공포의 두 겹을 단단하게 못질하고 가장 중요한 문단으로 넘어간다.




우리는 소파에 앉는다. 우리는 우리의 허구적 정체 성보다도 유서 깊은 아주 오래된 눈물을 닦는다. 그 눈물은 보티우스의 침대 옆에 선, 젊었다가 늙었다가 한 여인 같은 것이다. 두 가지 방식의 말하기가 있다. "우리는 음악을 듣는다' 우리는 성 베드로의 눈물과 같은 것을 닦는다". 나는 후자의 것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농가 안뜰에서 들려오는 수탉의 울음소리에 현관 모퉁이에 서 있던 남자 하나가 갑자기 오열하기 시작한다. 4월 초순, 새벽빛이 희미하게 밝아 오며 어둠을 몰아내기 직전의 일이다. 그 이래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교회 종탑 위에서 울리는 수탉의 울음소리(그것은 아마도 수탉의 울음소리를 통해 예고하고 확인했을 그 극도로 북받치던 순간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리라. 유물은 미래의 시간에 대해 말한다. 몇몇 음들, 즉흥적으로 떠오르는 흐릿한 선율들은 우리 안에 어떤 "과거의 시간'이 현존하는지를 알려 준다.



> 키냐르는 여러 이미지를 빙 둘러서 비로소 ‘나’, 혹은 ‘음악을 듣는 나’의 이미지로 돌아온다.


음악을 듣는 나는 (성 베드로의) 눈물을 닦는 나와 나란히 놓일 수 있다. 음악과 눈물 사이에는 수많은 사물이 놓인다. 음악은 종소리를, 그리고 종소리는 수탉의 예언적 울음을 함축하고 있는데 앞선 도식처럼 고통이 음악을 불러오는 게 아니라 음악(수탉의 울음)이 베드로에게 고통을 불러온다. 수탉의 울음이 그에게 예수의 순교를 상기시켰기 때문이다.


그렇게 우리는 위안의 방식으로, 혹은 고통의 매개물로 음악을 떠올리며 오래된 눈물을 흘린다. 눈물은 고통일까 음악일까. 두 개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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