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영수 Oct 27. 2022

아름답고 당혹스러운 성(性)

01. 역겨움


섹슈얼리티는 어디에 위치하는가? 규범과 동물성 사이에, 혹은 육체와 정신이 만나는 곳에, 길에서 만나는 모든 광고판에, 부박한 일상의 틈새 사이마다 끼어있는 비일상성에 그 자그마하고 반짝이는 덩어리를 놓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것을 역겨움과 매혹 사이에 두고 싶다. 


우리가 성()을 마주할 때, 특히 공적인 상황에서 우리는 종종 당혹감과 함께 노골적인 역겨움을 드러낸다. 이 역겨움은 난잡하게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볼 때의 그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는 단지 숨겨두어야 할 성을 거북스럽게 드러내었기 때문일까? 그보다는 역겨움의 감정이 섹슈얼리티의 본질에 생각보다 가까이 위치하기 때문이다. 


나는 "성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성Fascinus에 매혹Fascinatio되기 위해서는 우선 그것의 본질적 역겨움을 인식해야 한다" 고 라스 폰 트리에가 <님포매니악>을 통해 말했다고 생각한다. 


<님포매니악>에서 조는 마치 저주받은 사람처럼 그려진다. 부여받은 성이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지나치게 많아 이를 처리하기 위해 그녀는 평생을 색정광으로써 살아간다. 성에 관한 한 가장 극단적이면서 '역겨운' 인물의 시점으로 영화가 진행되는 까닭은 그녀가 성의 본질에 가닿은 인물이기 때문일 것이다. 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이렇게 말하는 듯 하다. "성은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어쩔 수 없다는 것은 가장 국가Polis적이지 않다는 것, 문명과 법규와 사회와 그 모든 것에서 한발짝 물러서 있다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동물적 본능, 우리의 계보를 벗어나는 욕망에서 우리는 역겨움을 읽어낸다. 조가 어쩔 수 없는 욕망에 아들을 버리고, 가정을 파괴하는 장면에서 그 역겨움은 극에 달한다. 


그 이유는 국가Polis적이지 않은 모든 것은 역겹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도시 바깥의 질척이는 자연의 진흙탕, 거리의 너저분한 쓰레기들, 계급이 다른 사람의 천박한 웃음소리. 다시 말해, 모든 역겨움은 국가적이지 않다고 치환될 수 있다. 


그러나 국가를 포기한 사람에게 그런 규정은 더이상 의미가 없다.


조가 성 중독자Sex Addict를 위한 그룹 치료에서 "나는 성 중독자가 아닌 색정광Nymphomaniac이고, 경찰morality police과 같이 음란함을 도려내려는 당신들과는 다르다"고 항변하는 장면에서는 그녀가 Polis와 대척점을 이루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색정광이라는 단어에 있어 반전을 이루어낸다.


이어 "나는 나의 추잡한Filthy Dirty 욕망을 사랑한다"며 조는 성을 옭아매던 경찰의 굴레를 풀고(국가의 포기-역겨움의 인정)  그 자리에 사랑을 대신 삽입한다(매혹)


02.매혹


국가를 포기한 자에게는 매혹이 기다리고 있다. 이에 앞서, 국가와 국가 바깥에 위치한 사물들을 비교해보자. 우선 국가는 매끈한 선으로 구획된 덩어리들에 가깝다. 네모나게 조각된 돌들과 선의 도로들이 잘라낸 도시의 정경은 보는 이로 하여금 복종하게 한다. 


반면 국가 바깥의 것들은 어떠한가. 경계없는 사물들, 서로 엉켜있는 식물들과 서로를 '큰 물방울이 작은 물방울을 흡수하듯이' 죄의식 없이 삼키는 동물들. 질척이는 흙을 밟으면 흙의 일부는 잠시 나와 함께한다. 국가 바깥으로 도망친 자들은 경계 없는 것들의 쾌락인 디오니소스적인 쾌락을 누린다. 그리고 이 쾌락에는 슬픔이 포함되어있다. 


가장 내밀한 시간에 슬픔을 느끼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이는 경계가 허물어진 그 시간 동안 잠시 자아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개와 늑대의 시간에 까닭모를 서러움을 느끼는 이유는 무엇일까? 밤바다를 마주하면 느끼는 기묘한 감정은? 이 기이한 아름다움은 경계가 사라질 때, 다시 말해 더럽고 역겨운 과정을 지나쳐야만 만날 수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아름다움이다. 혹은 세이렌이 오디세우스에게 꿀처럼 달콤한 목소리로 약속했던 '이곳'의 아름다움, 오르페우스의 규범적이고 규칙적인 멜로디와 대비되는 광적인 아름다움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도 있다. 


조는 님포매니악으로서의 자신을 인정한 뒤에 여러 종류의 슬픔을 겪고 하나의 상징과 마주한다. 어릴 적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말, 모두에게는 영혼의 나무가 한 그루씩 존재하고 보면 바로 알 수 있다는 그 말이 구체화된 순간이었다. 이 때 나무의 모습이 상당히 인상적이다. 나무는 도시 아주 바깥에, 기이하게 비틀어진 모양으로 어딘가를 향해 가지를 뻗고 있었다. 나무는 의심할 바 없이 그녀의 '추잡한 욕망'을 상징하지만 그것은 무언가를 애타게 바라며 가지를 뻗고 있을 뿐, 정작 그 주변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녀는 도망친 곳에서도 위안을 얻을 수 없게 저주받은 운명이라고 말하는 듯 했다. 


03. 성녀

그러나 영화는 그녀를 둘러싼 상황을 조직하여 그녀를 저주받은 마녀에서 성녀로 탈바꿈시킨다. 저주를 푸는 주문은 간단하다. 부여받은 미덕Virtus를 버리면 된다. 전통적으로 Virtus는 남성으로의 덕성, 즉 성적인 상황에서의 남성성 혹은 능동적인 교접능력을 뜻한다. 그녀에게는 자동권총이라는 미덕이 부여되었는데, 그녀는 이를 사용해 떠나간 애인과 연결되고 싶어한다. 그러나 그녀는 그녀에게 부여된 남성성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녀 자신은 설명할 수 없는 실수라고 표현한 이 의도된 행동으로 그녀는 성녀가, 섹스의 이방인이, 침묵의 수도자, ‘어쩔 수 없는 성’을 다스리는 자가 된다.

이전 14화 도파민 중독자 우리가 전쟁영화를 보는 방식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