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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영수 Oct 27. 2022

짜증날만큼 남자답지 못한 매너로 크로와상을 먹는 방법

루겔러흐는 일종의 페이스트리인데, 거기에 케이크 포크를 곁들이는 건 웃기죠.


Rugelach, in my opinion is a pastry, which there is no excuse for eating with a cake fork.



짜증날만큼 남자답지 못한 매너에요.


to serve it with a cake fork is, irritatingly unmanly.



여성스럽다고까지는 못해도...


not to say downright feminine...



사소한 사건이나 습관에서 문화 전체의 병증을 관찰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그 이유는 문화라는 것이 그 내부를 공고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일관성 있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가지 유의해야 할 점은 문화에 길들여진 경우라면 그 병증을 예리하게 알아채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문화라는 것이 이따금 뇌 회로의 일부를 대체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문화 없는 곳, 즉 모두가 악수를 제각기 방식으로 하는 곳에서 살기에는 우리의 자비와 에너지와 마음의 크기가 너무나 작다. 때문에 우리는 문화라는 유사-사고회로를 이용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는 것을 방지한다. 유사-사고회로는 뇌에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기에 이미 문화에 적응했다면 그것이 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채기는 쉽지 않다.

그렇기에 문화의 독특한 증세를 알아채려면 문화 바깥에서 자유롭게 떠다니는 그 찰나의 시간을 잘 이용해야 한다. 곧 문화의 중력이 우리를 잡아채기 때문이다.

<님포매니악>에서는 케이크 포크가 하나의 징후로 등장한다. 늙은 남자가 루겔러흐에 케이크 포크를 곁들여 주자 여자가 질타한다. 페이스트리를 케이크 포크와 같이 주는 것은 '짜증날만큼 남자답지 못한 매너irritatingly unmanly'라고 말한다. 처음에 나는 이 장면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케이크 포크가 남자답지 못한 일이지? 케이크 포크의 모양이 지나치게 곡선적인가? 레스토랑에서는 포크를 잘만 사용하던데..? 이 낯섦의 행운, 잠시동안 문화 바깥에서 떠다닐 수 있는 특권을 잘 사용한다면 서구 문화에서 케이크 포크와 그 예절이 자리잡고 있는 병증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영화에서의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두가지 맥락에서일 것이다.

첫번째는 음식과 관련한 불필요하게 느껴지는 절차들이다.


문화 안에 존재할 때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수행했던 음식과 관련한 절차들이 밖에서 바라보았을 때는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거추장스러움은 일종의 과잉이고, 과잉은 곧 결핍의 표면적 증상이기에 우리는 음식과 관련한 장황한 절차에서 인간의 어떤 결핍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우리 몸이 음식을 섭취하지 않고는 살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결핍이다.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다분히 우리의 동물적인 측면을 상기시키며, 이것은 우리에게 몇 남지 않는 야생적인 일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원초적인 행위 중 남들과 같이 하는 것이 있었나? 잠자리, 위생활동, 식사 중 유일하게 식사만 사교행위로 남았다. 우리가 식사의 동물적인 면모를 일상적으로 마주할 수 없기에 그렇게 많고 복잡한 식사예절이 만들어졌다고 생각할 수 있겠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자신이 고귀한 존재가 아니라 동물의 일종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논의를 따르면 그것은 곧 우리 몸이 곧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두번째 맥락은 남성성과 동물성의 공모관계이다.


영화에서 여자는 케이크 포크를 사용하는 남자에 대해 혐오감을 드러낸다. 그것이 남자답지 못한 매너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후 장면에서는 '진짜 남자'가 페이스트리를 먹는 방법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손으로 집어먹는 것이다.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것은 포크같은 거추장스러운 도구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남성성과 동물성의 뿌리깊은 근친관계가 엿보인다. 앞에서는 정교한 방식으로 식사 예절을 만들고, 이를 통해 동물성을 의식 깊은 곳에 감추어두었던 인간이 어째서 남성의 경우에는 동물성을 도리어 드러내는가?


이 부분부터는 공부 부족으로 논지가 아주 거칠게 진행될 수밖에 없지만, 굳이 계속하자면

그것은 예절 혹은 문화라는 질병이 상당 부분 남성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는, 살아남은 문화는 모두 여성의 지위가 낮은 부계사회이기 때문이다. 자연에서 성선택의 권한이 모두 암컷에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 문화는 다소 기이하게 느껴진다. 자연의 어느 종이던 수컷과 암컷을 나누는 결정적인 차이는 성세포의 가격인데, 정자는 언제나 값이 싸고 양이 많은 반면 난자는 자원이 많이 필요하고 양이 적어 수컷은 언제나 자신의 일부를 깎아 자원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암컷에게 자신을 바친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모계 사회여야 마땅할 것인데, 언제부터 인간 사회는 부계가 되었을까?

그것은 밀을 경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수렵 사회에서는 존재하지 않았던 잉여 생산물이 농경 사회로 접어들면서부터 인간은 식량을 저장하기 시작했고, 이 식량을 약탈하거나 지키기 위해 '남성 전사'들의 지위가 중요해졌다. 문명은 이렇게 전쟁이 생물학적인 시소를 뒤집으면서 남성 중심적으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밀이 전쟁문명을 발명했고, 이후 문명은 문자를 낳았다. 문자는 자의식을 낳는데, 나는 아주 용감하게도 이 시점에서부터 인간이 자아와 죽음을 인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며, 이것이 앞서 언급한 음식 문화의 뿌리라고 여긴다. 의식과 문화는 언제나 죽음과 자연을 리추얼이라는 얇은 천으로 가리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이다.

문화라는 천은 모든 사람을 동일화해 죽음과 야생성을 얇은 천으로 덮고 우리는 그 위에 서있지만 그 천이 짜여져있는 실 역시 남성에서 유래된 야생성의 일종이며 현대의 남성들도 모두 야생성과 얇은 실로 접속되어있다. 때문에 남성은 동물성을 드러내는 것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렇다면 남성은 이 문화의 위풍당당한 주인이자 독재자인가? 안타깝게도 그것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결과적으로 남성은 남성성을 자신의 자랑스러운 징표로 보기보다는 잃어버리기 일쑤인 굉장히 연약한 것으로 보아 매번 전전긍긍하기 때문이다. 여성성은 잃어버릴 수 없는 성질의 것이지만 남성성은 걸핏하면 깨지고 손상되는 연약한 것이다. 왜 남자가 이렇게 조마조마하는지는 아직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아마 천이 너무 얇아서, 천으로 덮어놓은 시커먼 자연이 언제든지 판을 뒤집고 다시 자연의 섭리대로 시소를 원상복구 시킬 것이 두려워서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문화로서의 남성성은 언제나 천 아래의 여성성을 두려워한다. 왜 여자에게 할례를 시행하고 히잡을 씌울까? 왜 문화는 남자를 전쟁터로 내몰고 여자를 안전하게 집에 가두는가? 개인적인 차원에서는(나에게도 그랬듯이) 그것이 남성에게만 부과된 비극적인 불평등이지만 문화 전체적인 차원으로 보면 남자는 희생함으로써 문화의 임시적인 시소 구도를 지키는 희생자가 된다. 남자는 여자를 위해 희생했다기보다는 얇은 천을 유지하기 위해 희생되었을 수 있다. 부계사회의 억지스러운 구도를 지키려면 전쟁이라는 막대한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문화는 이렇게 개인으로서의 남성에서부터 벗어나 자발적인 생명체처럼 움직이면서 남성에게는 희생을, 여성에게는 감금을 강요하며 자연스럽지 않은 구도를 유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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