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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Sep 16. 2024

글을 쓰기가 편안해진 이유 1

예전 일간지 기자로서 직업적으로 글을 쓸 때와 지금은 느낌이 사뭇 다르다. 

그때를 기억해 보면 보람도 있었지만 거의 대부분 부담을 가지고 글을 시작했던 것 같다. 보람은 대체로 글을 쓴 후 일단 완성했다는 후련함에서 오곤 했다. 글에 대한 긍정적 반응이 있을 때 사후적으로 선물처럼 만족감이 주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그렇지만 쓰기 전에 설렘이 있거나 손끝이 근질근질하거나 하는 증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의무라는 것의 억압적 성격이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글을 꼭 써서 제출을 해야 했으니까, 의무는 속성상 벗어날 때 해방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니까. 


적지 않게 의미를 부여할만한 주제를 잡았던 것도 사실이고 작게나마 성과를 낸 기사도 더러 있었다. 제법 반향을 일으키는 글을 쓰기도 했다. 무용담을 늘어놓자면 이런저런 얘기 거리가 줄지어 떠오르기도 한다. 

그러나 훨씬 더 많은 글은 쓰기 위해 쓰는 것이었던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요건을 갖추지 못한 얘기를 억지로 꾸며서 썼다는 뜻은 물론 아니다.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일 것 같은 주제의 글이 오히려 일상적이었다는 것이다. 

'허구한 날 글을 쓰는데 어떻게 매번 의미 있는 주제를 다룰 수 있겠는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쓰는 사람 입장에서는 그런 정도의 상식적 위안으로 마음이 편안해지지는 않는다. 위로는 조금 될지언정 문제의 해소와는 거리가 먼 그냥 건네는 얘기일 뿐이다. 

몇 번에 한 번씩은 의미 있는 글을 쓰게 된다는 규칙이 있다면 혹시 모르겠다. 그런 것이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글을 쓸 때마다 ‘더 나은 것이 뭐 없을까?’하는 경감되지 않는 똑같은 부담을 매번 느끼게 된다. 의미 있는 주제는 어쩌면 운 좋게 찾아왔고 그런 운은 결코 자주 등장하지 않았다. 


어떤 문제를 처음부터 꾸준히 추적하다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그렇지만 이것이야말로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부지하세월인 경우가 많았다. 이런 종류의 일은 하나를 완성하기 위해서 확인할 것이 많고 어디라도 막히면 진전시키기가 어렵게 된다. 애초에 그것을 알고 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에 일단 상당한 시간을 들여야 한다. 그런 연후에야 비로소 진퇴에 대해 고민을 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이런 시도를 하다가 길을 잘 못 들어 날려 버린 시간은 이루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물론 경험이 쌓이면서 감이라는 것이 생겨 가능성을 파악하는 눈치가 늘기는 했다. 그렇지만 기사는 혼자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어찌 보면 취재원과 그리고 상황과 함께 완성해 가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나의 의도가 주도하지만 주변 역시 주요한 변수가 된다. 그래서 사전적으로 완벽하게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사이에 끊임없이 지속되는 매일은 의미를 찾아 헤매며 기계처럼 무엇인가를 쓰는 방황의 시간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써야 했다. 직업적 의무이니까. 


이런 연유로 글을 쓰는 것과 직업은 어울리기 어려운 조합인지도 모르겠다. 글이 풀려 나오는 조건과 매일 찍어내야 하는 직업적 의무는 박자가 달라도 너무 다른 것이다. 흔치 않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도 못한 상태에서 글이 와르르 튀어나올 때도 있으니 글쓰기에 일정한 박자가 있기나 한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래서 글을 매일 의무로 짜내야 하는 시간이 많았다면 그 작업의 전체적인 과정을 회상할 때 즐거움으로 떠오를 가능성은 높지 않을 것이다. 글빚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왔을 것이다. 글을 쓰는 직업인은 늘 빚에 깔려 신음하는 사람인 셈이다. 요즘도 신문 기사를 읽다 보면 가끔 글 쓴 이의 그런 안간힘이 느껴질 때가 있어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나 역시 그랬던 시절의 기억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요즘 글쓰기가 편안해진 이유는 무엇보다 이러한 의무적 상황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매일 무엇인가를 써야 하는 책임에 묶여 있지 않으니 글감을 찾는 부담이 거의 없다. 글감을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리기는 하지만 잡히면 좋고 아니면 그만이다. 

글을 쓰겠다는 생각은 늘 머리에 담고 있으니 그냥 그만은 물론 아니다. 찾기는 찾되 시간을 두고 또 다른 곳을 어슬렁거리면 된다. 의무에 쫓기지 않고 시간적 여유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다. 

‘사람 사는 곳, 세상사가 모두 이야기 투성이인데 어디선들 글감이 나오지 않겠는가?’

마음을 열고 완상을 하다 보면 머지않아 그대로 된다. 

‘머지않아 그렇게 된다.’는 인식도 대단히 주관적 시간관일지 모르겠다. 별 얘기 없이 제법 시간이 흘러가도 조급해지지 않는다는 마음 상태가 그렇게 인지된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때로는 내가 글에 다가가기보다 글이 나에게 오는 것 같은 심리적 경험을 하기도 한다.  


글감이 포착돼도 충분히 익은 것이 있고 아직 설익은 상태로 얼굴만 내밀고 있는 것이 있다. 아직 다루기에는 이르다는 생각이 들 때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된다. 글감을 탐색할 때는 마치 사냥꾼 같은 심정이 강렬하게 솟아난다. 다급한 정도에 따라서 강도 차이는 있지만 글감 사냥의 심리는 어느 경우이든 유사하게 작동한다. 현재의 상태에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어떻게든 요리를 하려는 집착이 생긴다. 예전에는 당연히 더욱더 그랬고 여간해서 놓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의 계측할 수 없는 조리술을 사람이 따라갈 수가 없다. 시간은 예상 밖의 많은 요소를 버무려서 예상도 할 수 없는 일을 만들어 낸다. 시간은 무엇보다 그것을 그려 낼 나의 생각을 바꾸어 놓는다. 상황도 익어야 하지만 많은 경우 나의 생각도 숙성될 시간이 필요하다. 그에 따라 그림의 기조와 색깔이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아직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놔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마치 자연에 순응하는 낚시꾼이 치어는 방생하듯, 산에 동화된 등산꾼이 아기약초는 다시 묻어 주듯. 그래야만 자연스러워진다. 그 사이 나의 시야도 풍성해질 수 있다. 제자리를 잡을 수 있다. 잡히면 잡히는 대로 안 잡히면 안 잡히는 대로 오고 가는 것에 그대로 마음을 실으려 노력하는데 다행히 지금은 그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 


글감의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숙성이 돼서 손에 잡히는 주제는 크든 작든 의미가 있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것은 부족한 것이다. 태생적으로 크고 심각한 주제가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삶의 많은 것은 사소한 일상이 모여 의미를 만드는 것이다. 예전에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이었던 기사 중에도 얼마든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글감이 될 만큼 익었다면 그래서 나름대로 소중한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글 쓰는 사람의 역할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니 글을 쓰기가 편안해졌다. 글감에 따라서는 가끔 손끝이 근질거리고 마음속 잔파도가 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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