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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Sep 18. 2024

글을 쓰기가 편안해진 이유 2

의미 있는 글감을 포착해야 한다는 부담이 항상 어깨를 짓누르는 구조적 무게였다면 글의 표현과 문장의 구성은 글을 쓸 때마다 매번 바늘로 찌르는 것 같은 미시적 통증이었다. 

글을 쓰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사방에서 바늘이 나와 도열을 한다. 그리고 문장이 조금만 길을 벗어나면 찌른다. 일상적으로 다치면 군살이 배길 만도 하건만 이 상처는 당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찔릴 때마다 새롭게 아팠다. 


나에게는 간단한 제안(혹은 지시) 몇 개로 일종의 글쓰기 원칙 같은 것을 던져주는 선배가 있었다. 내가 원칙이라고 이해했던 것은 의도가 무엇이든 그의 말에 대해 나는 ‘그런 기준을 가지고 글을 써야겠다.’고 공감했다는 의미이다. 주변의 평가는 상당히 다차원적이지만 나에게는 많은 가르침을 준 선배였다. 

그가 나에게 처음 툭 던진, 그래서 나에게 첫 번째 원칙이 된 것은 문장을 짧게 쓰라는 것이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말이고 가장 흔히 듣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주었다. 

“한 문장이 원고지 두 줄을 넘지 않도록 해봐라.”(당시에는 200자 원고지에 글을 쓸 때였다),

단번에 3-4 줄은 보통으로 나오는 문장을 두 줄 이내로 끊는 것은 고문에 가까웠다. 한 번에 쓰면 될 것을 토막을 내야 하니 글이 톡톡 끊어지는 것 같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서로 물려 들어가지 않는 낱개의 문장을 모아서 하나의 글로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글은 마무리해야 했다. 서론도 있고 본론도 있고, 그것을 모아서 결론도 내려야 하는데, 토막이 나 제각각 따로 노는 문장으로 그것을 완성해야만 했다. 

한번 상상해 보라. 잘 이어지지 않는 불규칙한 조각들로 정연한 형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짝이 맞지 않아서 여기저기 뚫린 빈틈이 보일 것이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조각들이 겹쳐 두께가 달라지거나 형상이 제 모양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가지런하면서 제대로 갖춘 형상을 만들기는 불가능할지 모른다. 문장의 조각으로 구성된 글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쓰고 나면 마음의 거북함을 넘어 몸이 불편해질 지경이었다. 

현실적으로 모든 문장을 ‘두 줄 이내’ 철칙에 넣어 찍어 내지는 못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것을 하나의 원칙으로 수용한 이상 글을 쓰는 내내 강한 압박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넘어도 약간만 넘어야지 어느 정도 이상 길어지면 다시 쓸 수밖에 없었다. 문장을 다시 쓰려면 많은 경우 그 문장을 고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거기에 맞게 그 앞부터 다시 조정을 해야 한다. 조각 문장으로 이음새가 어색하지 않게 이으려면 불가피한 작업이다. 


글을 하나 완성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습관대로 쓸 때에 비해 두 배 이상의 시간을 들이고도 글은 자꾸만 엇나갔다. 더구나 이음새에 신경을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글 전체의 흐름과 구성이 허물어지기가 일쑤였다. 

그렇게 밥인지 죽인지 모를 것을 가지고 선배에게 가면 의외로 글의 흐름에 대한 지적은 많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기가 한 말이 있으니까 그 노력을 고려해서 어느 정도 봐주는 것인가.‘했다. 

그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읽는 사람들이 알아서 잘 이어가. 걱정하지 말고 진전시키면 돼.”

그렇게 하기를 몇 개월, 글이 나아지는 것인지, 내가 적응한 것인지, 어쨌든 결과적으로 몸의 불편함이 점차 가벼워지고 있었다. 예전 같으면 각기 노는 것으로 느껴졌을 짧은 문장들이 종종 서로 어깨를 겯고 견고하게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이기도 했다. ‘힘이 들다 보니까 이런 착각의 치유가 작동하기도 하는구나.’라고 생각했지만 문장이 대체로 짧아진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짧은 문장의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우선 비문의 가능성이 낮아졌다. 주어 술어의 호응이 어긋나거나 능동과 피동이 꼬이는 경우가 많은데 짧은 문장에서는 그렇게 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그렇게 비문을 만들기가 오히려 어려웠다. 

글의 속도감을 높이는 데에도 짧은 문장은 큰 역할을 했다. 기사와 같은 실용문이 지루하게 늘어지면 독자들이 끝까지 읽지 않는다. 나름대로 열심히 쓴 글이 내용 전달도 못하고 수명을 다하게 된다. 재미가 있는 글이면 가장 좋을 것이다. 그것이 쉽지 않다면 적어도 지루하지는 않아야 한다. 

톡톡 짧게 끊어지는 문장은 그 형식 자체가 리듬을 만들어 낸다. 맥락의 전환을 간결한 개별 문장들로 이어갈 경우 글에 긴박감까지 담아낼 수도 있다. 때로는 밋밋한 내용의 글에 형식적 변형 몇 개로 강하거나 단호한 단층을 만들어 넣을 수도 있다. 이런 느낌은 대체로 현저하기보다는 미묘한 것이지만 짧은 문장이 다양하게 글을 구사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효과를 자유자재로 구현해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한참 글의 물이 오를 때는 가능하다. 착각인지 몰라도 손끝에서 어느 정도 구사가 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조금만 감이 떨어져도 손끝은 무뎌지고 구사는커녕 거꾸로 앞문장의 끝에 매달려 그다음은 어디로 갈지 모르고 방황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이 역시 미묘한 분기이지만 갈림길은 순식간에 찾아온다. 그리고는 구사가 가능했던 잠시간의 영화를 떠올리며 오래 번민하게 된다. 


그때와 비교하면 요즘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기본기가 잘 다져졌는지 자신할 수 없지만 공연히 문장을 길게 쓰지 않게 된 것은 분명한 것 같다.(혹시 아니면 또 어떠랴!) 오랜 기간 압박과 번민의 세월이 그 정도의 흔적은 남긴 것이라고 해도 이상하지는 않다. 

지금의 편안함은 그러나, 그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어서 부담에서 벗어나게 됐다는 뜻이 아니다. 쓸데없이 문장이 길어지는 것이야 피해야 하겠지만 긴 호흡은 긴 문장으로, 짧은 호흡은 짧은 문장으로 표현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겠냐는 생각을 하게 됐다. 예전의 버릇이 남아 있어 긴 문장은 여전히 경계의 눈길을 주게 된다. 다시 읽으며 잘게 나누는 짓을 지금도 자주 한다. 습관은 참 질기다. 

그렇지만 요즘은 글을 쓴 후 다시 읽다가 토막 낸 문장을 반대로 다시 길게 잇기도 한다. 다시 생각해 봐도 긴 것이 자연스러우면 그게 더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예전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원칙을 버리지는 않았다. 지금도 원칙 주변에서 마음의 부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짧은 문장의 중요성은 기본기로서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른 문장을 다시 이을 때는 훨씬 더 신경을 쓰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다만 경직적이지 않으려 한다. 불편을 무릅쓰고 자른 짧은 문장이 누구에게 편안할 수 있을까? 글쓴이에게 부자연스러우면 읽는 이도 부자연스럽지 않을까? 그것이 쓰는 사람과 읽는 사람 사이의 교감이 아닐까? 눈치 볼 것도 없고 지시하는 사람도 없는 판에 이렇게 한번 밀어붙여 보려 한다. 


글의 생명은 공감이라는 생각을 한다. 형식을 벗어나야 할 때가 있다.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글을 써보고 싶다. 물 흐르듯 부드럽게 읽히는 글을 써보고 싶다. 쓰는 이와 읽는 이가 글 속에서 편안하게 어우러지는 글을 써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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