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들어가며 내가 받은 큰 선물이 시계와 만년필이었다.
뺑뺑이로 들어간 중학교가 무엇이 그리 대단하다고 국민학교 시절에는 구경도 못하던 큰 선물을 받았나 싶기도 하다. 아마 내가 중학생이 되기보다 오래전, 시험을 치르고 중학교에 들어가던 시절에 만들어진 관례 같았다. 합격 축하에 더해 어린이에서 청소년으로 승격하는 것을 기념하던 의례가 그때까지 남아 있던 것이 아니었을까 추측한다.
내가 받은 시계는 기본적인 기능 정도를 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시계줄이 반짝이는 검은색 가죽끈이어서 당시 일반적인 쇠줄 시계보다 돋보였다. 나는 왼손에 시계를 찼다. 시계를 차고 나가는 날이면 오른손은 있는지 없는지 무관심해졌다. 오로지 왼손만 점점 커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다. 그러다가 왼손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불편해지고 걸음걸이에 맞춰 자연스럽게 흔들리던 팔이 말을 듣지 않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평상시에는 왼 손목이 별달리 어디에 닿거나 긁힐 일이 없었는데 시계만 차면 이상한 현상이 나타났다. 아무리 신경을 써도 왼손이 여기저기 부딪치곤 했다. 많이 사용하는 오른손은 오히려 눈에 안 보이는 보호막이 있는지 부딪치는 법이 없었다. 시계 위에 따로 덮개를 하고 다닐 수도 없고, 이 일은 당시에 큰 고민거리 중 하나였다.
결국 시계 유리에 약간 흠이 가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시계를 풀어놓고 다닐 수는 없었다. 시계를 차고 있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다. 손목을 안쪽으로 슬쩍 돌리며 들어 올려 손등의 시계를 보는 기분은 짜릿하기 이를 데 없는 멋진 동작이었다(그렇다고 시간을 더 잘 지키게 된 것은 아니라는 점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계는 길에도, 건물에도 여기저기 많았다. 그 실용성이 나에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전철이 없던 시절 외출을 하면 주로 버스를 타게 되었다. 버스는 대체로 붐비는 편이어서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손잡이는 위에도, 앞에도 있었지만 나 같이 작달막한 키는 앞에 있는 의자를 잡는 것이 힘도 덜 들고 수월한 방법이었다. 또한 오른손잡이는 오른손으로 잡고 있어야 버스가 흔들릴 때 몸을 부지하기가 훨씬 나았다. 국민학교 시절에 버스를 타면 당연히 그렇게 했다.
그러나 중학생이 된 이후 나는 불편을 무릅쓰고 꼭 천정에 고정된 손잡이를 잡았다. 그것도 힘을 더 쓸 수 있는 오른손보다는 왼손을 치켜들었다. 그렇게 되면 옷소매가 적당하게 흘러내리고 팔목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팔목에 걸린 시계가 자연스럽게 노출되는 완벽한 자세였다. 힐끗힐끗 내 손목을 쳐다보는 것이 얼마나 흐뭇했으면 한동안 버스에 타면 자리가 없기를 바랄 정도였다.
특히 학교에 갈 때는 시계를 절대로 잊지 않았다. 중학교에 입학한 선물로 받은 것이기도 했고 가장 긴 시간을 보내는 곳이 학교였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중학생이 시계를 차고 학교에 가는 것은 유별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유난스럽지 않게, 그렇지만 마음 한가득 내가 시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던 것 같다.
중학교는 국민학교와 달랐다. 교복을 입는 것이 국민학교 때와 외형적으로 가장 큰 차이라고 할 수 있지만 그뿐이 아니었다. 과목이 늘었는데 과목별 선생님이 모두 달랐다. 담임 선생님은 조회와 종례 시간에만 볼 수 있었다.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도 많아지고 선후배 사이의 관계도 훨씬 엄격해졌다. 같은 반에 예전에 알던 친구가 하나도 없는 것도 국민학교에서 단순히 학년을 오르던 것과는 완전히 달라진 환경이었다.
나는 다행히 좋은 짝을 만나서 초기의 적응이 그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친구와 나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중간키 정도로 비슷했다. 앞뒤로 서다 보니 우연하게 짝이 되었다. 키는 그만그만했지만 나는 통통한 편이었고 그는 약간 마른 편이었다. 그 역시 반에 전부터 알던 친구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나와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됐고 우리는 그만큼 빠르게 친해졌다. 어디에 사는지, 형이나 동생은 있는지, 집안 사정에 대한 얘기도 자연스럽게 하게 됐다. 그의 집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렇지만 그것에 대해 그는 전혀 가리려 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았다. 특별히 당당한 것도 아니고 그냥 스스럼없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우리 집도 눈에 띄게 넉넉한 것은 아니어서 그것이 그와 나를 불편하게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우리는 같은 교복을 입었고 같은 모자를 썼으며 같은 교과서와 공책을 사용했다. 제법 큰 직사각형 가방도 색깔이며 모양이 그게 그거여서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그 시절에 까까머리 중학생에게 딱히 패션이라는 것이 있을 리 없었다. 검은색 운동화조차 우리는 비슷한 것을 신고 있었다. 딱 하나 차이가 있다면 나는 시계를 차고 있고 그는 차고 있지 않았다는 것뿐이었다.
우리는 시계에 대해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내가 그에게 내놓고 시계를 자랑한 적도 없었고 그 역시 나의 시계에 대해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시계를 차지 않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다. 그렇지만 곧 그 차이조차 의식하지 않게 됐다. 사실 당시에는 시계를 차고 있어도 서로 상표를 비교하거나 값을 따져보거나 하지는 않았다. 같은 반에 ‘누가 차고 있는데 어느 것이 낫고 또 어느 것은 못한 지.’ 같은 류의 대화가 오고 가는 경우는 없었다. 적어도 나는 그런 대화에 끼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냥 내가 시계를 차고 있다는 사실이 뿌듯했고 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만방에 확인시키는 것 같아 좋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사실 시계의 상표가 무엇인지, 얼마나 값비싼 것인지는 잘 몰랐고 기억에도 없다(그것은 분명히 중학교 입학 선물로 흔히 받을 수 있는 정도의 시계였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왼팔의 무게가 점차 정상으로 돌아오던 어느 날, 그 차이가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날도 우리는 소소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가 나에게 말했다.
"나도 시계를 차고 싶어서 엄마에게 얘기했다가 야단만 맞았어.”
나는 순간 움찔할 만큼 놀랐지만 내색을 하지는 않았다. 그의 형도 시계를 차지 않았다고 했다. 심각하게 말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집안 형편을 얘기할 때처럼 과하게 당당하거나 굽죄이는 것 없이 가볍게 툭 던진 것이다. 나도 그의 분위기에 맞춰 무심한 척 듣기만 했다.
그는 마치 남 얘기처럼 그렇게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나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그와 나 사이에, 나는 모르는 사이에, 깊은 도랑이 파여 있었다. 그는 그날 그것을 나에게 슬쩍 들쳐 보여주었다. 그리고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덮어버렸다. 그 도랑은 분명히 내가 팠는데 그만 볼 수 있고, 그가 보여 주어야 나는 알 수 있는 이상한 도랑이었다. 내가 적극적으로 어떤 것을 하지 않아도 내 모습 자체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비로소 나는 깨닫게 됐다.
나는 시계를 벗어 놓기로 마음먹었다. 시계를 벗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집안 식구들은 내가 시계를 애지중지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시계를 차지 않으면 당연히 이유를 물을 것이었다. 그 대화 이후 티 나게 시계를 풀어버리면 그 친구 또한 어색해질 수 있는 일이었다. 한동안 띄엄띄엄 시계를 차다 말다를 반복했다. 차지 않는 시간을 점차 늘려갔다.
그리고 어느 날 시계를 풀어 나의 책상 서랍에 넣었다. 나는 다시는 시계를 차지 않았다. 나의 짝이 어떤 변화를 느꼈는지는 모른다. 그와는 시계에 대해 더 얘기한 기억이 없다.
얼마나 지났을까, 우리 어머니가 한번 물어보셨다.
“너 시계 잃어버렸니? 요즘은 왜 시계를 차지 않고 다니니?”
“시계 줄 때문에 손목에 땀띠 같은 것이 나서 불편해졌어요.”
언젠가 필요할지 몰라 준비해 놓은 대답이 요긴하게 쓰였다.
긴 세월이 흐른 후, 그 친구에 대한 기억조차 가물가물해질 즈음, 나에게 크게 축하할 만한 일이 생겨 집안 식구들이 여러 의미를 담뿍 담아 시계를 선물로 주었다. 중학교 1학년 때 벗어 놓은 시계가 떠올랐다. 시계를 차지 않던 습관이 오래돼 잠깐 어색했지만 이제 나의 시계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할 일은 없을 것이었다. 그리고 왼팔이 커지는 느낌도, 공연히 왼손으로 버스 손잡이를 잡는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기쁜 마음으로 항상 지니고 다니면 되는 것이고 그 외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나는 그 시계를 애지중지하며 지금도 외출할 때면 항상 왼 손목에 차고 다닌다.
다만 한 가지, 우리 어머니가 아주 오래전 일을 기억하셨다.
“나이가 들면서 체질도 바뀐다더니, 너 이제 시계를 차도 손목이 불편하지 않은 모양이구나.”
오랫동안 어머니께 꾀병치레를 하던 왼팔이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