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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Aug 26. 2024

글을 읽어 주기 바라는 마음 1

일상의 소소한 잡동사니 글을 쓰면서 주변에 대한 기대가 하나 생겼다. 내가 쓴 글을 읽고 반응을 보여줬으면 하는 것이다. 

꼭 좋은 얘기만 듣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지만 나쁜 반응보다는 칭찬이 훨씬 좋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많이들 하는 말로 긍정이든 부정이든, 반응을 보이는 것은 어쨌든 관심 표시이지만 가장 안 좋은 것은 무반응이라고 한다. 남 얘기 듣듯이 늘 가볍게 상식적으로 그럴 것 같다는 정도의 동의를 해 온 말이다. 그러던 그 말이 요즘처럼 맞춤으로 와닿는 때도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사람의 노력에 무반응이란 정말 사람이 해서는 절대로 안 될 일이다!


처음에는 글을 쓰고 달리 전할 방법이 없으니 카카오톡에 이미 가입돼 있는 이런저런 토론방을 이용하게 됐다. 그렇다고 공식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정도의 광장 같은 방에 글을 던지지는 않았다. 그런 종류의 토론방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서로 간에 관심을 기대할 수 있는 관계들이 아니다. 설령 그럴만한 관계들이라고 해도 개인의 소소한 글 하나가 공동의 관심사로 얘기될 수는 없다. 그래서 글을 올리는 것 자체가 생뚱맞은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 더구나 내가 눈으로 관찰하는 정도의 참여만 하고 있는 입장이라면 다른 사람에게도 나의 행동에 대해 그 이상의 관심을 가져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가깝거나, 적어도 제법 상세하게 근황을 주고받는 관계의 토론방에만 글을 올렸다. 그러면서도 계면쩍음을 피하려 최대한 조용하게, 슬쩍 전달할 방법을 찾았다. 사실 읽어 주기를 바라면서도 꼭 그런 것은 아닌 듯 체면을 차리려 하니 처음부터 아주 복잡해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비판도 좋고 주문도 좋고 수다도 좋고 심지어 무관심도 괜찮고.’ 글을 보내는 앞에 이런 글을 간단하게 걸고 전송을 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냥 지나가는 말’ 정도로 생각하고 가볍게 봐도, 혹은 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뜻을 담은 말이다. 

그렇지만 이를 액면 그대로 이해한다면 오해도 그런 오해가 없게 된다. 이 말은 아주 복잡한 속내를 교묘하게 섞어 놓은 것이다. 엄밀하게 따져보면 본심을 밝히면서도 본심을 숨기는, 겹겹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구조를 가진 문장이다. 


‘비판과 주문’을 앞에 넣은 것은 본심을 먼저 강조한 것이다. 내가 글을 보내니 관심을 가져 달라고 강하게 촉구한 것이다. 비판을 하고 주문을 하려면 얼마나 꼼꼼하게 신경을 써서 읽어야 하는가. 그러나 그것은 너무 강한 요구여서 실현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것을 나도 안다. 

연이어서 다른 의미의 표현을 잇댄 것은 바로 그 현실성을 고려한 것이다. 

‘꼭 주문을 하라는 것은 아니고 내 글을 둘러싸고 별생각 없이 수다를 떨어도 좋겠다.’고 한껏 요구의 수준을 낮추었다. 그러나 이 역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나의 글이 한낱 농담거리가 돼도 괜찮다고 ‘허락’한 듯 보이지만 실은 이것은 허락이 아니라 그렇게라도 관심을 가져주면 좋겠다는 간절함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 단계 수위가 낮아졌다고 해도 여기에는 여전히 관심을 촉구하는 본심이 관통하고 있다.  

그리고 맨 끝에 짐짓 스스로 아무 생각이 없는 양 ‘무관심해도 괜찮다.’고 한마디 툭 던져놓았다. 사실 이것은 실망스럽지만 가장 현실성이 높은 반응에 대한 자기 방어 장치이다. 이 바쁜 세상에 느닷없이 날아온 글에 누가 5분 이상을 들여 정독을 할 수 있겠는가. 빼곡하게 배열된 글이 20-30 줄을 넘어가면 일단 숨이 찰 것 같다. 그것을 끝까지 읽는다는 것은 엄청난 관심과 비상한 인내력이 필요한 일이다. 읽는 이가 글을 쓴 이에게 ‘내가 당신의 일거수일투족에 얼마나 관심이 있는지 알아 달라.’고 해야 하는 상황에 있거나, 조금 후에 그 내용을 가지고 생사여탈권을 가진 사람 앞에서 아는 척을 해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나라도 넘겨 버릴 것 같다. 

따라서 ‘무관심 운운‘은 보내는 마음의 본질과는 완전히 반대의 의미를 담고 있지만 현실이 그렇게 냉정하다는 것을 깨달으며 곧 직면할 상황에 대해 미리 안전장치를 걸어 놓은 것이다.  아닐 것이 분명한데 정말로 믿는 착각을 하다가 덜컥 실망하는 일은 피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몇 마디 글 하나를 보내면서 나는 이처럼 혼자서 기대와 현실을 다채롭게 펼쳐 놓고 북 치고 장구 치고를 다 하고 있었다. 


이렇게 오만가지 짓을 해도 ‘그래도 읽고 얘기하는 친구가 있겠지.’하는 기대를 접을 수는 없다. 다행히 간절함을 눈치챈, 마음 약한 친구들이 감사하게 반응을 보내 주었다. 처음에는 어떤 것이든 반갑고 감사하고 하던 것이, 사람의 꿈은 갈수록 야무져지는 모양이었다. 영혼이 쏙 빠진 외마디 반응과 어느 한 구절에라도 잠시 머물렀을 것 같은 분위기의 답신은 등급이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반응의 길이와 깊이를 보고 그가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글에 관심을 기울였는지 측정을 하기도 했다. 그에 따라서 나는 심지어 그의 인문적 소양에 점수를 매겼다. 나의 글을 어떻게 읽었느냐에 따라 그의 교양 수준이 결정될 판이니 이 사실을 나의 친구들이 알았다면 얼마나 기가 막혀했을까? 

더구나 무반응은 여기서 아예 제외돼 버렸기 때문에 한껏 마음을 써서 친절을 베푼 사람이 오히려 따귀를 맞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중 일부는 잠깐의 실수로 평생 쌓은 교양을 한순간에 날려 버리기도 했다. 나는 칼 같이 평가하고 인정사정없이 냉정하게 등급을 부여했다. 


그렇지만 나는 한두 번의 실수로 사람의 미래까지 결정해 버릴 정도로 모질고 매몰찬 사람은 아니다. 글을 쓰는 교양인은 관대해야 한다. 지금 몰교양의 인간으로 취급된 많은 친구들도 앞으로 개선의 여지가 있다. 나는 앞으로 글을 계속 쓸 계획이어서 그만큼 그들에게도 기회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의 교양이 제자리를 찾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글을 계속 써야 할지도 모르겠다. 

한 두 번의 실수로 고매한 교양을 모두 상실당한 나의 친구들이여, 앞으로 부여받는 기회는 절대로 놓치지 않기를 마음 모아 간절하게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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