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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Sep 11. 2024

너무 이른 친구의 부음

일요일 아침 게으름을 부리며 늦게 일어나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을 때였다. 

전화기에서 ‘띵’하고 문자가 왔다는 소리가 들렸다. 일요일 오전에는 보통 전화기가 조용할 때여서 약간의 궁금증을 가지고 전화기를 열어 보았다. ‘근조’ 아래 하얀 국화 몇 송이가 있는 사진이 왔다. ‘어느 분이 돌아가셨구나.’하며 내용을 확인하는 순간 비현실적 충격이 머리를 강타했다. 


부부 모두를 잘 아는 친구의 아내가 세상을 떴다는 소식이었다. 모두 함께 학교를 다니며 가깝게 지내게 됐는데 알게 된 순서로 보면 아내가 먼저이니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을 친구 남편이 알려준 셈이다. 결혼한 후에는 함께 보는 경우가 많았고 얼마간은 이웃해서 살았다. 한동안 자주 만나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뜨막해 근황은 잘 모르고 있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활달하고 쾌활한 모습이었기 때문에 그 친구가 숨을 쉬지 않고 누워있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원히 눈을 뜨지 않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그를 떠올릴 수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몇 년은 족히 됐으니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해결됐거나 혹은 더 나빠졌을 수 있는 시간은 충분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의 모습과 죽음은 도저히 연결이 되지 않았다. 

그 나이에 그 시간은 항상 더 좋아지는 것은 아니라고 해도 보통 자연스럽게 별스러운 일 없이 흐를만한 때이고 그만큼의 시간이었다. 체력의 한계가 감지된다고 해도 대체로 그것이 왔다 갔다 하는 정도일 뿐인 시기이다. 접촉 불량의 전구가 가끔 깜빡이듯 간헐적으로 알람이 울지만 그것이 느닷없이 죽음으로 연결되는 때는 결코 아니었다. 

이 어처구니없는 비약을 조금이라도 현실과 연결시켜 보려고 최근에 연락이 있었을 법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 역시 암이었다. 그 친구도 정확한 기간은 모르지만 “1년은 된 것 같다.”고 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이렇게 연결되지 않는 격차가 현실이 되기까지 절벽 같은 시간을 그는 얼마나 혹독하게 겪었을까.’

빈소에 찾아가 떠나는 길을 배웅하고 온 지금도 여전히 그의 죽음은 그저 추상적 개념일 뿐 현실화되지 않고 있다. 


가까운 친구의 부음이 충격을 준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십여 년 전 죽마고우 중 하나가 세상을 떠났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의 동아리가 돼 엉켜 지낸 친구들 중 하나인데 그는 누구보다 그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정성을 기울인 사람이었다. 갑자기 발동한 심장쇼크가 원인이었다. 빨리 인지하고 신속하게 병원을 가기만 했어도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이른바 골든타임을 놓치는 바람에 그가 세상을 뜨게 됐다고 친구들은 말했다. 

‘설마 그가 죽었을라고.’ 

말이 안 되는 부음 앞에서 망연자실한 나는 그 소식을 소화해 낼 수가 없었다. 행인지 불행인지 마침 나는 당시 해외에 있어서 갈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어제도 그를 보지 못했고 오늘도 그를 못 보고 내일도 못 볼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생사와 상관없이 예정된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의 죽음을 확인할 수가 없었고 아직 받아들이지 않아도 됐다. 내일도 그를 못 볼 것이 분명하지만 그것은 그의 죽음 탓이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예정된 시간적 경로에 내가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한동안 그의 부음을 그냥 들고 있었다. 귓가에 맴도는 불편한 소음으로 놔두었다. 그렇게 어정쩡하고 여러 겹 어수선하게 엉켜 있는 시간도 흘러는 가고 있었다.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던 나는, 그러나 그와 나 사이의 실같이 작은 연결에서 그의 죽음을 실감하고 말았다. 그가 보낸 우편물을 우연히 보게 된 때였다. 무엇인가를 뒤적거리다가 그가 나에게 보낸 우편물에 갈겨쓴 주소 글씨를 본 순간 그가 이제 더 이상 이 세상 사람이 아님을 한꺼번에 깨닫게 됐다. 

‘더 이상 그는 글을 휘갈길 수가 없구나. 그의 글씨는 이제 다시 올 수 없구나.’ 

그의 손길과 솜씨가 묻어 있는, 나에게 보낸 몇 글자가 그의 죽음을 알리는 준엄한 전령이 되고 말았다. 

비로소 ‘그는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구나.’ 

나의 여정이 끝나도 볼 수 없다는 절망이 순식간에 온몸으로 퍼졌다. 갑자기 울음이 퍽 터져 나왔다. 나는 그때 그의 죽음을 받아들였고 그를 떠나보냈다.


죽마고우의 부음은 이미 오래된 기억이지만 다시 떠올리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일찍 보낸 몇몇 친구들의 원인은 대체로 사고 아니면 암이다. 예상 밖으로 당한 일이거나 급성으로 진행되는 질환이 아니면 아직 죽음 근처에 다가가 있는 연배는 아니라는 뜻일 것이다. 지금까지는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그러나 거대한 자연사는 어느 누구랄 것도 없이 우리 모두의 자리를 통째로 이동시키고 있다. 아마도 친구의 부음은 조금씩 잦아질 것이고 그만큼씩 일상의 일이 될지 모른다. 


평균적으로 아주 가까워져 심지어 ‘죽음과 벗하며 산다.’고 해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부드럽게 이어지는 언덕길은 아닐 것이다. 세상의 시간은 삶과 죽음을 찰나의 순간으로 연결하고 물처럼 흘러가지만 그 사이는 천 길 낭떠러지보다 더 급격한 파국이 존재하는 자리일 것 같다. 세상은 무념무상으로 제 길을 가고 있고 그 촘촘한 시간은 끊어진 우리의 무수한 인연으로 이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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