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노미라는 단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 고등학교 국민윤리 시간이었던 것 같다. 청소년기에 나타나는 신체와 정신의 불균형 현상을 아노미라고 설명했던 기억이 난다.
몸은 성인과 다를 바 없이 성장했지만 정신이 그에 맞게 자라지 못해 생기는 몸과 마음의 불균형 상태를 의미한다. 그 증상은 심리적 불안정으로 나타나는데 방황이나 일탈 등의 행동으로 전개된다고 했다. 고등학생에게 아노미를 가르치는 것은 자신에게 나타날 수 있는 ‘이상 현상’을 이해하도록 하기 위한 목적일 것이다. 그와 함께 불안정 자체가 그리 비정상적인 것이 아니니 안심하라는 의미도 있었을 것이다.
사람에 따라 그 시기를 지독하게 겪는 친구도 있고 그렇지 않은 친구도 있었다. 대부분이 그렇듯이 나는 대체로 후자에 속하는 편이었다. 그렇다고 평온하기 만한 10대 후반을 지나온 것은 아니지만 심각한 고통을 느꼈거나 세상과 맞 장 한번 떠보자고 덤비지는 않았던 것 같다. 당시 고등학생에게 요구되던 규율을 대체로 수용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소심하고 용감하지 못한 성격 탓일 수도 있다.
다시 아노미를 듣게 된 것은 대학교 시절 사회학 관련된 수업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번에는 사회의 급격한 변화, 규범의 붕괴와 관련해서 아노미 현상을 거론했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의 아노미 이론을 배우기도 했다. 고등학교 때는 ‘바로 네가 아노미 상태에 있다.’고 얘기한 것이어서 강렬했다면 대학교에서 아노미는 관찰자 입장에서 들어 그런 것인지 여느 지식과 다르지 않게 하나의 개념으로 흘러갔다.
그 이후의 삶과 생활 속에서도 어떤 측면에서든 끊임없이 불일치와 불균형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별나게 아노미라는 단어를 떠올려 본 적은 없다. 처한 상황을 해석할 겨를이 없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불균형의 수준이 아노미라 할 만큼 전면적이지 않아서 그랬던 것일 수도 있다. 아노미는 그렇게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성장의 불균형과 연결돼 있던 어렸을 적 개념, 아노미를 더 성장할 시간도, 여지도 거의 없을 것 같은 나이에 다시 떠올리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몸이 마음 같지 않다.’는 말을 종종 들으면서, 나 역시 그런 일을 자주 당하면서 아노미를 생각하게 된다. 장년을 지나 노년기에 접어들면서 신체와 정신의 불균형이 서서히 그러나 전면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전 같으면 당연했던 것이 당연하지 않게 된 것은 이루 셀 수 없이 많다.
“집중력이 떨어져서 밤을 새우는 것이 별로 효과가 없어.”
이런 얘기를 들은 지는 벌써 꽤 오래됐다.
“하루 밤 억지로 새우고 나면 몸만 엉망이 되고 며칠 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
효과를 따지기도 전에 몸만 망가진다는 것이 요즘들 주로 하는 말이다.
필요하면 언제든 꺼내 쓸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몸의 저금이 바닥나 버린 것이다.
반사 신경의 그 자동 반사가 잘 작동하지 않아 전과 달리 천천히 수동으로 움직여야 하는 것도 그중의 하나이다. 나는 계단의 오르내림에서 유독 그러한 변화를 느낀다. 전에는 눈 감고도 발이 안 보이게 오르고 내리던 계단을 이제는 눈 뜨고도 세듯이 걸어야 한다. 서두르려 하다가는 몸이 기우뚱하기 십상이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마음대로 하면 안 된다. 앞서 가는 마음을 꽉 부여잡고 몸의 반응 속도를 따라야 한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그렇게 계단을 내려가고 있는데 옆을 스치고 지나가는 젊은이는 눈을 스마트폰에 두고도 사뿐사뿐 날듯이 미끄러져 간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나?'
기억의 저편조차 희미하다.
어쩔 수 없이 이런 격차에 익숙해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 시선과 속도의 차이만큼 나는 몸과 마음의 괴리를 절감했다.
한 번은 의사를 직업으로 하고 있는 가까운 친구에서 물었다.
“나는 요즘 계단을 오르내릴 때 제대로 발을 내딛는지 순간 불안할 때가 있어.”
“너만 그런 거 아냐. 나이가 들어서 그래.”
그 까칠한 친구의 한마디 대답은 이렇게 냉정했다.
‘그것 참, 저도 비슷하다면서…’,
노화를 그렇게 멋없고 쌀쌀맞게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따지고 보면 이런 현상은 예정된 것이었다. 불균형은 신체와 정신의 성장이나 변화 속도의 차이에서 왔다. 처음에는 몸이 앞서 갔다. 그리고 한동안 동반하던 몸과 마음 사이에서 ‘나이가 든’ 어느 시기부터 몸이 먼저 꺾이기 시작한다. 물리적 기능을 하는 생물학적 몸이 기계처럼 계속 작동을 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것이다. 어렸을 때 통과한 몸과 마음의 괴리를 다시 한번 겪는 것인데 ‘마음이 몸 같지 않’ 았다면 이제 ‘몸이 마음 같지 않’은 것이 다르다면 다른 것이다.
언젠가 겪을 일이기는 해도 사실 지금 노년의 아노미 인구는 발전한 의학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세대이다. 의학이 미리미리 점검하고 도와주면서 아주 긴 몸과 마음의 균형기를 거쳤고 예전에 비하면 한참 늦게 아노미의 시간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다. 예전에는 40대 50대부터 아노미가 시작됐을 텐데 그 시절의 어른들은 그것을 어떻게 소화했을지 궁금하다. 환갑이 되면 정말 어른 같았던 예전 노인들의 지긋한 모습은 아마도 그런 과정을 모두 거친 후 다시 맞는 균형기의 여유와 평온함에서 나온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무리 늦춰봐야 겪을 것은 겪어야 하는 모양이다. 격렬한 내부 전투를 벌이고 있는 요즘 환갑내기들이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연된 아노미라고 해야 할까.
순서는 달라도 아노미는 아노미이기 때문에 어려서나 나이 들어서나 고통스러운 증상은 비슷하게 나타난다. 불안정과 불균형 속에서 방황하고 우울해하고 일탈을 하기도 한다. 물론 이번에는 몸이 처진 것이어서 예전처럼 몸이 먼저 나가는 행동주의자가 되지는 못한다. 보통 마음이 먼저 나가다가 몸의 벽에 부딪혀 보이지 않는 심적 동요가 커진다.
철없는 청년기는 주변이 관대하게 봐주기라도 하지만 방황하는 노년은 ‘나이 값도 못한다.’는 핀잔이나 안 들으면 다행이다. 그래서 마음은 청춘인 노년의 아노미는 자신의 몸에 갇히고 타인의 시선에 부딪혀 겹겹이 벗어날 길이 없다.
미루어 놓은 숙제가 더 되게 느껴지는 것인가? 준비 없이 마주한 노년의 아노미이지만 자연스럽고 평온하게 소화할 방법은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