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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Oct 14. 2024

입원의 기억 2: 마냥 길지 않은 시간

입원 첫 3일은 마음이 한없이 가라앉아 있었다. 

첫 병원에서 받았던 것을 포함해 현재 병원에서 다양한 검사가 진행됐고 결과를 분석을 하는 시간이었다. 마치 인생을 건 시험을 초벌로 봤는데 결정을 할 수가 없어서 다시 시험을 치른 후 결과를 기다리는 심정 비슷했다. 

왼쪽으로 누우면 ‘이미 항생제가 듣고 있는데 별일이야 있겠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오른쪽으로 돌아누우면 그동안 들었던 암에 대한 온갖 얘기가 머릿속을 휘저었다

‘세상일이 희망대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다심증이 발동해 면구함을 무릅쓰고 담당 의사에게 먼저 물어보았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결과가 나오면 바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진중하고 정확해서 나무랄 데가 전혀 없는 정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말할 때 그의 표정을 읽으려 눈에 힘을 주었다. 그가 어느 대목에서 변화를 주는지 신경을 곤두세워 파악하려 했다. 대화는 단답형으로 끝났지만 나는 혼자 그의 대답을 여러 번 되뇌며 혹시 무슨 숨은 정보가 있지 않을까 따져보고 또 따져보았다. 


끔찍하게 어려운 시간은 밤이었다. 

병원의 밤은 분주한 낮 시간과 대비돼 더 적막했다. 나의 생활습관보다 병원의 전등불은 훨씬 일찍 꺼지고 나는 애써 잠을 청해야 했다. 그렇지 않아도 심란한 상황에서 잠이 쉽게 올 리가 없었다. 더구나 제법 분주한 척하며 지내다가 갑자기 병원에 꽁꽁 묶여 있는 상황이었다. 밤이라고 피로가 몰려오기는커녕 눈만 더 말똥말똥해졌다. 마음은 끝 모르게 불편하고 몸은 생기 없이 늘어져 있는 극단적인 괴리 속에서 잠이 쉽게 들었다면 이상한 일이었다. 없던 불면이 찾아오더니 그 시간은 점점 더 길어졌다. 

병실 밖으로 보이는 번쩍이는 광고판은 어쩌면 그렇게 휘황한지, 내가 갈 수 없는 아주 먼 나라의 신기루 같았다. 안과 밖 사이의 유리창은 투명하지만 기묘하게 이 세상과 저 세상을 나누는 완고한 차단벽이 됐다. 


누우면 사위는 쥐 죽은 듯이 조용한데 캄캄한 어둠을 타고 마음은 한 없이 비극으로 내달리곤 했다. 

상상은 상상을 물고 가며 기가 막힌 사연을 만들어 낸다. 그 세상에서 나는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심지어 이렇게 하리라 강한 다짐도 했다. 나중에 생각하면 너무 갔다 싶을 정도로 상상의 도가 지나치기도 했지만 때로는 진행되는 속도가 빨라 제동을 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힘이 쪽 빠지고 나서야 돌아올 생각을 하게 됐다. 다행히 길을 잃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왔지만 하루 밤에도 몇 차례씩 갔다 온 그 길은 너무 험하고 힘들었다. 다시 가고 싶지 않았지만 아무리 저항을 해도 밤마다 미끄러지듯이 그 길로 들어섰다. 밤이 두려워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3일 만에 들은 결과가 감염 가능성이 유력하다는 것이었다. ‘안 좋은 경우’의 가능성은 아주 낮은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단 항생제 치료를 강도 높게 유지하면서 경과를 더 보자고 했다. 단정적으로 ‘안 좋은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이 정도면 믿고 안심해도 되지 않을까, 이성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더구나 관련된 분야의 전문가 여러 선생님들이 협의한 결과라고 했다. 

그러나 그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마음도 관성이 있고 습관이 있는 모양이었다. 나쁜 습관도 습관은 습관이었다. 습관이 바뀌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다소 나아지기는 했지만 그날 밤에도 나는 또 원하지 않는 험한 길을 다녀왔다. 


시간에 모든 것을 맡기고 시간이 가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은 얼마나 지루하고 무기력한가. 

상황을 개선할 수 있는 행동이 없을까, 찾아도 찾아도 찾을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시간을 압축할 방법도 없다. 무신경하게 제 박자대로 제 길을 가고 있는 시간을 멀뚱히 쳐다보는 것만이 유일한 행동이었다. 

다행이라면 주기적으로 받는 검사에서 아주 조금씩이나마 상태가 호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일이었다. 그러나 호전의 정도 역시 천천히 가는 시간의 속도와 밀접하게 연결된 것이다. 있는 듯 없는 듯, 같은 검사결과를 놓고 희망을 얘기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잘 보이지 않는 변화였다. 마음만 앞서 있고 시간은 한참 뒤에서 게으름을 피우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 와중에 시간의 역할은 정작 다른 차원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시간의 경과 자체가 처지에 대한 생각을 바꿔주는 것 같았다. 조금씩 견딜만하게 되고 있는 것이 바로 가장 큰 변화였다. 어디에선가 귀동냥을 했던 ‘분노의 5단계’가 생각이 났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 발생했을 때 부정으로 시작해서 분노 타협 등을 거쳐 최종적으로 수용을 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나중에 찾아보니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라는 미국의 정신과 의사가 죽음과 관련해서 연구한 내용이라고 했다. 퀴블러 로스가 얘기한 단계를 내가 충실히 밟았는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는 없다. 나의 경우는 수용이라기보다는 어느 시간부터인지 현재의 상황에 익숙해지는 상태가 됐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 같다. 어쩌면 퀴블러 로스의 ‘수용’이 바로 그런 ‘익숙’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찌 됐든 고통스러운 밤에 깔려 질식하나 했는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밤마다 가던 험한 길은 점차 짧아졌고, 나빠지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에 희망을 걸고 시간과 보조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게 됐다. 사실 급한 마음에 수없이 빨리 가봤지만 매번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타난 반응일 수도 있다. 너무 힘이 들어서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태가 먼저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나의 오랜 잠 습관까지 바로 병원 시간에 맞게 조정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병원 불이 꺼지고 잠들기 전까지, 혹은 그 후 얼마동안 더, 제법 긴 시간 동안 나의 밤 여행은 계속됐다. 행선지는 조금 바뀌어 현실적인 미래로 향하게 됐다.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 없는 평균수명이 눈에 들어왔다. 

더더욱 생각해 본 적이 없는 건강수명이라는 개념도 시야에 잡혔다. 내 또래 남자의 기대수명은 80세 정도에 이른 것으로 예상된다. 건강수명은 평균적으로 거기서 4-5년은 제하는 것 같다. 평균적으로 75세 전후까지 건강을 유지하며 살다가 4-5년 동안 병치레를 한 후 세상을 떠난다는 얘기이다. 

어떻게 예순이 넘도록(‘예순이 넘도록’은 옛날 어른들이나 쓰는 말인 줄 알았다.) 남은 시간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고 살았는지 스스로 어이가 없었다. 평균은 평균일 뿐이어서 누구에게도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고들 한다. 하지만 평균은 또 대체로 수렴되는 지점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누구도 가벼이 볼 수 없는 강력한 인력이 있다. 남은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생각이 번개 치듯 다가왔다. 더구나 멀쩡하게 판단하고 멀쩡하게 움직이며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시간은 더 짧다는 생각이 벼락처럼 몰아쳤다. 


남은 시간은 가보지 않은 곳이어서 가늠할 길이 없다. 비교해 볼 대상이 없었다. 그래서 지나온 시간을 생각하게 됐다. 아, 그것은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 끔찍한 심적 충격이었다. 지난 온 10년, 심지어 20년

조차 순식간이었다. 2년씩 쪼개서 5번, 10번으로 곱하면 그래도 길지 않을까 싶어 2년 단위로 나의 지난 시간을 곰곰이 따져 보았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쪼개면 쪼갤수록 시간은 오히려 더 짧아졌다. 2년 전의 일은 어제 같았다. 

다시 묶어서 10년, 혹은 20년, 아니면 조금 더? 남은 시간이 그것을 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평균으로 따져보면 그 범위 안의 어느 시간만큼만 나에게 주어질 것이다. 운 좋으면 후반이고 운 나쁘면 초반일 것이다. 아니다. 운은 어쩌면 그 반대를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종착지를 가늠하고 거기서 현재까지로 역산을 해보면 남은 시간의 한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통스럽기보다는 분주해졌다. 밤의 여행시간이 다시 길어졌다. 


어느 정도 회복된 것을 확인하며 퇴원하는 날, 이 입원 여정의 전과 후로 내 삶의 생각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나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어느 의사의 미숙한 대화법이 나에게는 어떤 충고보다도 강력한 예방주사가 됐다. 아직 명료한 계획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시간의 한계가 있다는 것, 그 끝으로 점차 다가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됐다. 

지각을 습관적으로 하던 내가 어쩌면 처음으로 미리 준비하는 시간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니, 나는 여전히 습관대로 지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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