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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Aug 23. 2024

노안

노안이 꼭 노년의 증좌는 아니다. 신체적 전성기는 대체로 30대 전후라고 하니 몸의 기능적 노화는 이미 30대 중반부터는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가장 예민한 신경을 가진 신체 부위 중 하나가 눈이라고 한다. 그래서 노안은 이름과 걸맞지 않지만, 상황과 관리 정도에 따라서 중년에도 발현될 수 있다. 우리가 인지하게 되는 것은 증상이 조용하게 진행되다가 어느 임계점을 지났을 때일 텐데 그 시점은 사람에 따라 상당히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안은 노화 현상인 것이 틀림없고 신체 기능의 ‘충격적’ 저하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노안을 노년과 연결시키곤 한다. 그래서 그 이름도 노안일 것이다. 


국민학교 때 눈 검사를 시작한 이래 눈 하면 나름대로 자신이 있었고 안경 한번 안 쓰고 불편 없이 살았다. 그러던 눈에 어느 날, 정말 어느 날 아침에 예고도 없이 불현듯 노안이 왔다. 

그날따라 하필 아침부터 작은 글씨를 볼 일이 생겼는데 초점이 맞지 않아 몇 차례 눈을 비비고 다시 읽으려 했다. 이상하게 눈곱이 단단히 붙었는지 여전히 시야가 선명하지 않았다. 아침에는 간혹 그런 일이 없지 않아 맑은 물로 눈을 닦아 내고 다시 초점을 맞춰 보았다. 멀어지면 약간 선명해지다가 더 멀어지면 작은 글씨여서 가물가물해지고 가까이 오면 초점이 맞지 않았다. 아무리 씻고 또 씻어도 나아지지 않았다. 


눈곱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침이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신경 쓸 일 없이 자동으로 맞던 나의 초점이 시야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렸다 

‘어, 나에게도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순간 엄습한, 아뜩한 생물학적 한계라니! 


내가 강골이라고 자신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일상생활에서 불가능하다고 느낄 만큼 몸의 절대적 한계 같은 것을, 그때까지는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약하고 부실한 부분도 있어 한계가 없을 리 없지만 그것을 인지하고 수용하며 보완해 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있다고 확신하던 눈에, 어느 맑은 날 아침, 세상은 화창한데, 갑자기 철컥하고 막 하나가 씌워지는 느낌을 받게 된 것이다. 아주 옅은 막이지만 그것은 질기고 견고해 걷어 낼 수 없는 꺼풀이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좀처럼 가지 않던 병원을 다 가고 주변에 알 만한 사람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찾아보고 듣고 하면서 노안 증상이라는 것을 알았고 다소 이르지만 그럴 때가 됐다는 것도 이해했다. 나에게 그 증상을 설명한 누구도 전혀 걱정스러워하지 않았다. 당연한 것이었고 안경만 쓰면 될 일이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한없이 진행되지는 않습니다. 가다 보면 보통 멈춰요. 그에 맞춰 안경만 바꿔주면 됩니다.” 한 의사는 심드렁하게 얘기했다. 

‘저자가 내 심정을 눈곱만큼이나 알고 있을까?’ 

그럴 수 있다고 이해하는 것과 나의 일로 수용하는 것이 아주 다른 차원의 심리작용이라는 것을 아마 그때 깨달았던 것 같다. 


자신이 있던 부분에 생긴 이상은 좀처럼 인정하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처방을 거부하고 몸으로 버텼다. 눈에 힘을 주면 그런대로 볼 수는 있었다. 예전과 같지 않지만 한동안은 안경 없이 지내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서 눈에 힘은 점점 더 들어가고 피로감은 더 빨리 찾아왔다. 책을 읽어도, 컴퓨터 화면을 보아도 길지 않은 시간에 눈이 침침해지고 무거워졌다. 눈이 마르고 충혈도 잦았다. 무엇인가를 보려면, 결국 안경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됐다. 


어떤 물건을 귀에 걸고 코에 걸쳐야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삶은 참 복잡했다. 어디에나 있어야 하는 아주 번거로운 필수품이 생긴 것이다. 외출할 때는 항상 지니고 있어야 한다. 자주 머무는 곳에는 가급적 하나씩 떨어 뜨려 놓는 것이 편리하다. 

그러다 보니 책상 앞에, 침대 옆에, 소파 옆에, 심지어 화장실에도, 집안 곳곳에 안경을 하나씩 놓고 살게 됐다. 노안용 안경은 아주 간단한 돋보기여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집안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안경이 비싸고 간수하기 조심스러운 것이었다면 어떻게 감당했을까? 

자동차 안에서도 안경은 필수품이다. 내비게이션을 포함해 차 안에서 보아야 할 작은 글씨가 많아졌다. 자동차의 실내 반사경 위쪽, 천정으로 접히는 안경통을 달아 놓은 것을 비로소 알게 된 순간 무릎을 쳤다. 

‘이게 그것이었구나! 어쩌면 이렇게 손이 딱 닿는 곳에 안성맞춤으로 설치할 생각을 했을까.’ 

이미 당연했던 세상일의 소용을 그렇게 하나씩 깨닫게 됐다. 


안경 인구에 합류하면서 안경잡이 친구들의 행동이 전과 달리 각별하게 눈에 들어왔다. 같은 노안이지만 그들의 행동은 다르게 진화했다. 글씨를 보려면 반사적으로 안경을 들어 올리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종이를 이마 위로 쳐든 채 눈에 잔뜩 힘을 주고 사정없이 치켜뜨는 친구도 있다. 

지니고 있다가 귀에 걸고 코에 얹어야 하는 사람보다는 덜 수고스러울지 모르지만 안 하던 행동을 해야 하는 그들 역시 새로 적응해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안경을 쓰기만 하면 편안했던 그들도 갑자기 초점이 어긋나던 순간의 기억이 충격적이지 않을 리 없다. 이제는 눈도 굴리고 안경도 움직이며 새로 호흡을 맞춰야 하니 그 충격을 일상으로 흡수하는 일이 더 힘들 것 같다. 


누군가 먼저 시작했을 터이니 그것이 처음에는 돌출 행동이었을 것이고 놀림감이었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차별적으로 오는 것 같으면서도 결국 모두에게 관철되는 엄격한 원칙을 지키는 것 같다. 그 이상한 행동이 서로 자연스러워지는 즈음, 왕성하던 청년들의 모임은 누런 사진으로 남고 이제는 많은 기억을 간직한, 이름하여 노인회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오랫동안, 앞에 무한대처럼 있을 것 같은 시간을 지나가고 소화하며 대신 뒤에 기억을 남겼다. 어느새 앞에 놓인 시간이 뒤에 쌓인 기억보다 적다고 직감할 때쯤 노안이 오는 것 같다. 뒤의 무게를 순간 느끼며 몸이 기우뚱하는 것 아닌가 싶다. 

시야 전환이 느리고 한 번에 많이 보기 어려워지는 것은 앞으로는 많이 보기보다 천천히 깊게 보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앞이 다소 불투명해지는 대신 뒤를 밝게 비춰 신중하고 현명해지라는 몸의 반응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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