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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Aug 19. 2024

커피와 멀어지기

나는 커피 없이 못 사는 정도는 아니다. 

종종 먹고 싶을 때도 있지만 쉽게 닿는 곳에 있지 않으면 안 먹어도 그만이다. 동료들과 함께 밥을 먹는 경우 습관적으로 커피를 마시는 경우가 많다. 그렇지만 며칠 먹지 않아도 못 견디게 그립지는 않다. 

젊어서는 하루에 커피를 열 잔 이상 마시기도 했다. 아마 그 시절에 이런저런 필요로 인해 다른 사람을 만나야 하는 직장인들은 대체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이다. 자판기로 뽑아 먹는 것부터 좌정을 하고 멋진 잔에 담긴 것을 받아먹는 것까지, 형태는 다양했지만 대체로 커피 믹스의 배합규칙(커피+설탕+프림)을 준수하는 ‘한국식 커피’였다. 

한 때 커피가 건강에 좋지 않다는 논란이 벌어지면서 커피가 녹차로 대체되기도 했다. 그렇지만 대화를 나누는 사람 사이에 놓인 커피의 지배적 위치가 심각하게 하락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90년대 말부터 이른바 커피전문점이라는 범주의 새로운 점포가 등장하면서 커피믹스와는 다른 지금의 커피시장이 형성됐다. 1999년 스타벅스가 이대 앞에 1호점을 개설하던 즈음에 이 시장이 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런 점에서 커피전문점은 젊은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새로운 유행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실제로 커피전문점은 대학 주변이나 젊은이들이 모이는 상권에 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후 20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면서 ‘전문 커피’는 연령대와 상관없이 압도적인 위치를 점유하는 국민적 음료가 됐다. 


이 와중에 중년층에서 노년층으로 세월의 미끄럼을 타고 있는 많은 ‘전문 커피’ 애호가들이 뜨거웠던 열정을 뒤로하고 커피와 멀어지기 사투를 벌이고 있다. 

한 친구가 사소하지만 심각한 고민을 털어놓은 것은 벌써 여러 해 됐다. 

“요즘 잠이 아주 안 좋아졌어. 없던 불면증이 생긴 것 같기도 하고”. 

한동안 고민을 하던 친구는 자가 진단으로 커피를 의심하다가 병원에 갔다가 온 이후 확신을 하게 됐다. 

증상으로는 사실 약간 애매하기도 했던 커피와 잠의 상관관계가 의사의 말 한마디로 이론의 여지없이 분명하게 맺어졌다. 커피를 먹는 순간부터 잠이 염려가 되고 그날 밤은 영락없이 불면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커피는 힘들어도 참으면 되지만 오지 않는 잠을 억지로 불러들일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이 관계의 귀결은 뻔하다. 커피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십 수년을 동고동락하던 천하의 사랑을 단번에 끊을 수는 없다. 타협책을 찾아 디카페인 커피를 시도한 친구가 여럿 있지만 예전의 맛이 아니라 먹는 의미를 찾을 수 없다고들 했다. 짙은 색깔과 구수한 향으로 위안을 하며 심심한 커피와 친해지려 애를 썼지만 단팥 빠진 단팥빵을 씹는 것 같아 그 시간이 오히려 서글퍼졌다고 씁쓸해했다. 

'그러느니 안 먹고 말지.' 

몇 번을 되뇐 말이겠지만 그게 말처럼 쉬울 리는 없다. 

커피를 먹은 시간과 잠의 반응을 따져 가며 대체로 오전에는 먹고 오후부터 자제하는 연습도 보통 많이 한다. 오후 1시가 경계선인 친구도 있고 오후 2시까지 괜찮은 친구도 있다. 불과 1시간이지만 커피 애호가에게 그 시간 차이는 매우 중요했다. 점심 후의 행복을 확보하느냐 못하느냐의 갈림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나 할 것 없이 세월과 함께 경계 시간은 점점 더 빨라지고 신경은 그에 맞춰 예민해졌다. 


결국 대부분의 친구들은 아침에만 한 잔 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래다가 그마저 수반되는 불안감과 그 어정쩡함이 너무 힘들어서 아예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그렇지만 그 시간도 오래 걸린다. 끊었다 먹었다를 반복하며 갈등의 진폭 또한 커졌다 줄었다를 되풀이한다. 커피를 먹고 싶은 분위기가 딱 조성돼 있는 날은 그 한 잔이 인생의 의미를 들었다 놨다 할 정도로 마음의 동요를 일으키는 사안이 되기도 한다. 

지나고 나면 사소한 일이고 어처구니없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똑같은 시간이 예고 없이 또 온다. 그리고 마음을 마구 할퀴고 간다. 커피와 관계 조정에 들어간 나의 친구들은 대단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가깝게 지낸 세월이 긴 만큼 정을 끊는 것도 어렵다는 물리법칙이 커피와 사이에서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그런 갈등의 와중에 있는 친구와 오후 시간에 만나 차를 마시게 될 때 종종 부러움을 사게 된다. 가서 앉아 있을 수 있는 곳이 온통 커피 전문점이니 커피 향을 피할 도리가 없다. 나는 별생각 없이 커피를 시키고 과일차를 찾아 주문한 친구는 한 마디 한다. 

“커피 맛도 모르는 사람은 먹어도 되고 정작 한 방울이 중요한 사람은 손도 댈 수 없는 불합리한 세상!”. 

무엇을 탓해야 할지 모르지만 정말 합리적이지 않은 세상인 것은 맞다. 더 좋아하는 사람이 덜 좋아하는 사람보다 편안하게 많이 먹을 수 있어야 마땅하고 행복한 세상일 것이다. 

더구나 커피는 벌컥벌컥 들이켜는 것이 아니라 작은 모금으로 향을 천천히 음미하며 마시는 음료이다. 혀끝을 날카롭게 찌르지 않고 둔하지만, 커피는 묵직하게 느낌으로 전이되는 맛을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 커피는 시간이 필요한 음료이다. 시간도 많고 느낄 일도 더 많은 노년에게, 그러나 커피는 살갑게 다가오지 않는다. 여러 가지 조건 상 딱 맞는 노년과 커피가 불화하는 것은 정말 불합리한 세상이다. 


나는 어떤 센서 하나가 빠져 있는지, 아니면 ‘아직까지’라는 시한이 작동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지만 지금까지는 밤늦게 커피를 많이 마셔도 잠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행이라면 다행인데 그렇다고 커피와 죽고 못 사는 사이는 아니어서 천만다행까지는 아니다. 그러나 그 구수한 맛을 모르는 것은 아니고 커피와 불화하는 친구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언젠가는 그때가 올 수 있다는 상상을 간혹 한다. 

혹시 모른다. 만약 헤어져야 할 시기가 되면 나도 모르게 숨어 있던 애달픈 심정이 폭발할지. 절연의 절박함이 오지 않도록 지금까지처럼 너무 친해지지 않게, 이제부터는 의식적으로, 거리 조절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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