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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현 Sep 08. 2024

오래전 선행

아마 중학교 2학년 혹은 3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친구네 집에 갔다가 밤 8시 넘어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내가 탄 버스는 신촌과 이대 입구를 거쳐 안국동 쪽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버스에 탄 사람들은 모두 앉아 있었다. 

이대 입구에서 대학생으로 보이는 사람 몇이 탔던 것 같다. 나는 창 밖을 보고 있었고 버스에 탄 사람들의 행동을 유심히 관찰하지는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이 2인용 좌석의 내 옆자리에 앉았다. 여학생이었다. 별로 특별한 일은 아니었지만 다른 빈자리도 있는데 굳이 왜 사람이 있는 자리에 앉았을까 잠깐 생각하다가 말았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차창으로 흘러가는 도시의 야경을 보고 있었고 그 사람은 그 사람 대로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려니 했다. 몇 정류장을 지났을 무렵이었던 것 같다. 그 여학생이 나에게 어디까지 가느냐고 말을 걸었다. 보통 있는 일은 아니었다. 약간 이상했지만 말을 못 할 것도 없어서 나는 안국동까지 간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 잠시 말이 없었는데 그 여학생이 어떤 연유인지 머뭇거리며 무엇인가를 망설이고 있는 것 같았다. 영문을 모르는 나는 어떻게 해야 하나 하다가 말을 하라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여지가 생겼다고 판단한 듯 주저함을 멈추고 곧바로 “회수권 한 장만 빌려 줄 수 있겠느냐”고 했다. 자신은 이화여대를 다니는 학생인데 난감한 일을 당해 곤란한 지경에 처했다고, 꼭 갚겠다고 했다. 대학생인 것을 의심하지는 않았지만 여자 대학생이 이런 황당한 부탁을 한다는 것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행색이 엉망은 아닌데 무슨 봉변을 당했나.’ 의아해했다. 


사연 인즉은 이랬다.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건 후 얹어 놓은 가방을 깜빡 잊고 나왔다가 바로 다시 돌아갔는데 아무것도 없더라는 것이다. 지갑이며 책이며 모두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어도 당시 이런 일은 심심찮게 일어나기도 했다. 더 전화를 걸 돈도 없고 친구들과는 모두 헤어졌는데 집에 갈 시간은 늦어지고 어쩔 수 없이 차를 타게 됐다고 말했다. 신입생인 것 같았다. 제법 쌀쌀한 봄이었으니 입학한 지 얼마 안 되는 때였을 것이다. 그러니 회수권 한 장만 빌려달라고, 꼭 갚겠다고 간절한 표정으로 얘기를 했다. 


당시에는 학생용 버스표로 회수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한 매에 길게 10장씩 인쇄해서 발행을 하는데 버스를 한 번 탈 때마다 한 장씩 잘라서 내면 됐다. 한 장의 크기는 요즘 명함을 세로로 4등분 한 정도이고 옆으로 길쭉한 종이쪽지였다. 현금을 내면 거슬러 줘야 하는데 그런 번거로움도 덜고 버스 안내양이 잔돈을 빼돌린다는 오해도 없애기 위해 만든 제도였다. 중고생 회수권과 대학생 회수권이 인쇄는 달랐지만 가격은 동일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당시에 회수권을 늘 넉넉하게 들고 다닌 편이었다. 친구들과 서로 내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런 경우에는 인색하게 굴 이유가 없었다. 사정도 딱하지만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보고 안 빌려 줄 도리도 없었다.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최악의 경우 속아도 그만이었다. 돌려받을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았다. 

당연히 알았다고, 빌려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일이 벌어지려면 늘 공교롭게 몇 가지가 동시에 꼬이게 된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황당하게도 바지주머니에 돌돌 말려 있는 회수권이 딱 한 장 밖에 없었다. 보통 잘라 놓은 것은 한두 장 바지주머니에 넣고 잠바 주머니에는 자르지 않은 몇 장을 지니고 다녔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지주머니에도, 잠바주머니에도 회수권은 더 없었다. 잠바주머니를 뒤집어 보고 긁어 보고 해도 없는 회수권이 나오지 않았다. 한 장이나마 있는 것도 다행이었다. 


이번에는 내가 울상이 됐다. 

“누나 어떻게 하지요? 늘 몇 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딱 한 장 밖에 없어요. 아무리 찾아도 없어요. 죄송해요.” 상황이 이렇게 되니 곤란한 지경에 처한 그 누나가 난감한 상황을 만든 책임을 지고 나를 위로해야 했다. 

“괜찮다.”고 “괜찮다.”고 했다. 

“버스 안내양에게 사정을 잘 얘기하면 이해할 거.”라고 하면서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 

내가 거꾸로 위로를 받는 이상한 상황이 지속되는 동안 버스는 서대문을 지나 광화문을 향하고 있었다. 몇 정류장만 더 가면 나는 내릴 것이다. 그는 포기한 듯 차분해 보였지만 나는 복잡했다. 

순간 묘안이 떠올랐다. 내 회수권을 그 누나에게 주고 내리는 것이다. 나는 당시 빡빡머리를 깎고 얼굴은 동글동글하게 살이 붙은 어린 중학생이다. 선량해 보이기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불량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런 내가 버스 안내양 누나에게 핀잔을 듣는 것이 훨씬 수월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당시 버스 안내양은 대체로 10대 후반부터 20대 초반 정도의 나이대가 많았다. 그 감수성 예민한 나이에 학교를 다니는 또래를 보면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실제로 버스에서 여고생이나 여대생이 버스 안내양과 다투게 되는 상황을 종종 보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는 아주 억세어 보이는 학생이 아니면 대체로 안내양의 기세가 더 컸다. 


문제는 이미 내가 위로를 받은 상황에서 이 누나가 한 장 밖에 없는 내 회수권을 받겠느냐는 것이다. 나름대로 궁리를 했다. 내가 내리는 정류장에 거의 왔을 때 회수권을 주며 급히 나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른바 ‘선행’을 기획하고 나니 배짱까지 두둑해졌다. 

‘버스 안내양이 문을 닫고 못 내리게 하지는 않겠지.’

상황을 모르는 버스 안내양이 어떻게 할지 모른 채 나는 계획을 감행했다. 내리는 정류소가 보일 무렵 안쪽에 앉았던 나는 회수권을 그 누나에게 던지듯 건네며 빠르게 버스 복도로 나갔다. 

“누나가 쓰는 것이 더 낫겠어요.” 

당황한 그는 회수권을 받지 못하고 따라 일어서려 했다. 나는 제지하며 앞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그 표정을 유심히 보지는 못했지만 난감하고 고마운 표정이 스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내 버스 안내양 앞에 섰다. 

“누나 죄송합니다. 회수권을 잊어먹고 탔어요.” 

버스에 사람도 많지 않고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그 누나는 큰 소리 한번 내지 않고 눈만 흘기고 문을 열어 주었다. 동글동글한 모습의 내가 울상을 지으니 안 됐다고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누나가 두근거리며 보고 있을 등 뒤로 성공의 뿌듯함을 한껏 뽐내며 내렸다. 버스는 내가 내리자 곧 출발했다. 움직이는 버스의 창을 옆 눈으로 흘깃 보았다. 모두 앉아 있는 버스에서 회수권을 받은 누나가 반쯤 서서 창밖을 향해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싱그러운 봄바람을 쐬며 생뚱맞게 오래전 ‘선행’이 기억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사실 거창하게 선행이랄 것도 없지만 오래 지나고 나니 버젓이 선행이라는 말을 쓰게 된다. 

'그 누나는 그날 집까지 잘 갔겠지.' 

'영문도 모르고 선행에 동참한 버스 안내양 누나도 더 많은 행운을 누렸겠지.'

 쿠르릉하는 버스 소음이 귓가에 맴돌고 그날 걷던 비원 앞, 봄밤의 신선한 공기가 얼굴을 감싸며 흐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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