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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화 Sep 20. 2023

대학생의 포기 연대기

수오지심. 맹자는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라고 하였다.


포기의 뜻은 ‘하려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어 버림’이다. 내게 포기는 내가 저지른 잘못의 대가를 치르는 행위였다. 내가 진짜로 하고 싶은 일 대신 소위 좋은 스펙이 될만한 일을 선택했을 때, 머지않아 나는 그 잘못된 선택과 영악했던 스스로를 깊이 후회하게 되었다. 선택을 철회하기 위해 내가 택한 방법이 바로 포기였다. 내가 대학생활에 했던 많은 ‘포기’를 들추어 보는 것은 전혀 달갑지 않은 일이다. 솔직하지 못했고, 계산적으로 행동했고,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나의 나쁜 실체’를 마주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학생활의 빛나는 추억들만 편파적으로 회상하는 것은 (포기를 묻어버리는 것은) (부끄러움을 회피하는 일이기에 ) 맹자의 말처럼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저버리는 행위이다.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이 글에 나의 모든 포기의 역사를 기록하려고 한다.


첫 번째로 포기한 것은 동아리 AIESec 활동이었다. 나의 대학생활 목표 중 하나는 영어에 능통해지는 것이었다. 우스갯소리로 ‘글로벌’한 사람이 되고픈 열망이 컸었다. UN에서 인정한 학생 단체라는 타이틀에 끌려서 AIESEC에 지원했었다. AIESEC 동아리는 3개의 부서로 구성되어 있었다. 초등학생에게 영어로 인권, 꿈, 유엔지속가능개발목표를 가르치는 ‘국내 자원 봉사부’, 한국 학생들에게 해외 봉사 및 인턴십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해외봉사인턴십중개부’, 마지막으로 동아리의 인적 자원을 관리하는 ‘인재개발부’였다.


‘국내 자원 봉사부’ 소개를 듣고 가슴이 뛰었다.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제공할 때 큰 보람을 느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실력을 키우고, 직접 멘토링에 참여할 수 있는 국내 자원 봉사부 활동은  ‘나 같은 사람을 위해 마련된 최적의 프로그램’ 같았다. 하지만 희망하는 부서에 지원해야 했을 때 나는 국내 자원 봉사부에 지원하지 않았다. 엉뚱하게도 ‘해외봉사인턴십중개부’를 1 지망 부서로 적었다. 흔들렸기 때문이다. 취업에서는 해외봉사인턴십중개부의 ‘마케팅과 세일즈 실무 경험’이 ‘멘토링 봉사활동 경험’보다 더 메리트가 되리라고 판단했다.


‘남 눈에 멋지게 보일 만한 것’에 현혹되었던 나는 큰 대가를 치러야 했다. 봉사활동 홍보 아이디어를 내는 일, 홍보물 제작에 필요한 예산을 짜는 일, 카드뉴스, 부스 등 홍보물을 제작하는 일, 홍보물에 들어갈 멘트를 적는 일에 나는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상품을 팔아야 하는 사람이 상품에 관심이 없었다. 이 상품이 왜 중요한지를 도저히 모르겠었다. 회의 시간에 좋은 아이디어를 내지 못했고 자신감은 떨어지기만 했다. ‘내가 지금 이 팀에 없어도 자연스러워.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아. 오히려 , 내가 없어야 더 잘 굴러갈 것 같아’라는 생각은 나를 비참하게 했다. 여름방학에 진행될 멘토링 기획안을 만드는 국내 자원 봉사부 활동을 부러워했으나 이미 너무 늦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나는 동아리 회장과 부서 팀장님께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사과한 다음 합격 이후 3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동아리 활동을 관뒀다. 식상한 표현이기는 하지만 내 사전에 ‘포기’란 없었다. 고집이 세고 한 번 ‘옳다’라는 마음의 확신이 든 일에는 끝장을 낼 때까지 몰두했다. 그런 내가 포기를 하고 말았다. ‘진짜로 하고 싶었던’ 일에 도전하지 않은 나 자신의 비겁함,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동아리 사람들에게 폐를 끼친’ 나 자신의 불성실함에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이러면서도 모순적으로 ‘억지로 했던 일을 더 이상 안 해도 돼서’ 후련함을 느꼈고 후련해하는 나 자신을 부끄러워했다.


두 번째로 포기한 것은 회계학원리 계절학기였다.

고려대학교에는 이중전공, 복수전공, 심화전공, 융합전공 제도가 존재한다. 이중전공은 ‘부전공’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미디어학부생이었던 나는 ‘비상경 문과생’으로서 당연히 취업하기 위해 ‘경영학과’를 이중전공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문과는 상경 계열 아니면 취업 힘들어’라는 몇몇 사람들의 말에 휘둘려,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정해진 길’을 따르려고 했었다. 소심했던 나는 ‘비상경 문과생이 꼭 상경계열 이중전공하라는 법 없는데?’ ‘자기가 진짜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는 게 맞지 않을까?’하는 질문을 던지지 못했다. 경영학과 이중전공에 합격하려면 학점이 4.5에 육박할 정도로 우수해야 하고, 4개 문항으로 구성된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야 한다. 빨리 자기소개서에 들어갈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생각에 1학년 여름방학 계절학기로 ‘회계학원리’를 신청했었다.  나는 회계가 무엇인지도 모른 채 회계학원리를 듣겠다고 마음먹었다. 대학교에서는 수학을 절대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운명적 문과생이 '제가 과거에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이 잘 안 납니다' 수법을 시전한 것이다.


가치와 의미를 탐구하는 인문학의 관점에 잠시 벗어나 철저히 이익과 비용, 돈의 흐름을 추적하는 경영학의 사고방식을 접할 수 있어 신선하기도 했고 나름 흥미롭기도 했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찰나의 놀라움이었을 뿐 ‘이런 세상을 공부해야 되겠구나’ 불타는 열정이 내 안에서 들끓지는 않았다. 이번에도 역시, 결과는 좋을 리가 없었다. 당시 블로그에 비공개로 썼었던 글을 여기에 실으려고 한다.


체력적 한계랑 스트레스 때문이었다. 하루에 전공책 한 단원 씩 수업 진도가 나가는데, 개념 암기하고+대표 문제 풀이 방법 익히고+전공책 예제 전부 풀고+테스트 뱅크 문제 구해서 풀고+복습하고->이 모든 공부를 하루에 다 해야 하니까 꼬박 밤을 새야 했다.(계절학기의 타이트한 특성상 바로 시험을 보기 때문) 그렇게 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6일 정도 밤을 새우니 너무 피곤했다. (사실 되게 평화로워 보이게 설명했던 일요일도, 전날 새벽 3시 반에 자고 당일 새벽 5시에 일어나서, 아메리카노 두 잔 마시고, 포도당 캔디 3개 씹어먹고, 다크 초콜릿 녹여먹고, 이클립스 민트 입에 털어 넣고, 거실에서 서서 공부하면서 간신히 버티고 있었다..)

4.5를 유지해야 한다는 강박+부족한 잠 때문에 날카로워진 신경. 나는 툭하면 짜증 내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분명 날 위해서 하는 공부인데, 내가 이 공부로 힘들어하는 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굳이 부정적인 감정 소모를 하면서 나 자신과 주위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공부를 해야 할까? 이 소중한 1학년 여름 방학에. 갑자기 회의감이 들었다.

‘고민하는 순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는지도 모른다’

결국 2시부터 애플 펜슬을 내려놓은 채 (심각한 내적 갈등: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해 온 게 아깝다 vs 그래도 너무 힘들다 계속할 자신이 없다) 끙끙대며 고민하다가 결국 3시에 kupid 사이트에 들어가서 계절학기 수강신청 과목 포기 버튼을 눌렀다.


내가 과거에 썼던 글을 읽었고 나는 한없이 부끄러워졌다. 과거의 나는 ‘끝까지 버티고 살아남아서 에이쁠을 받지 못한 나’, 즉 ‘똑똑하지 못한 나’에 실망했을 뿐이었다. ‘남들이 다 따르는 공식을 억지로 따르려고 했던’, ‘줏대 없는’ 나에 대한 반성은 저 기록에 일말조차 묻어 나오지 않았다. 저 글의 나는 진심으로 반성하지 않는다. 그저 버티느라 너무 힘들었다고 하소연하고, 나는 나를 위한 현명한 선택을 내렸다고 스스로를 아름답게 포장할 뿐이었다. 이때 나의 기만은 정확히 1년 뒤 또 다른 불행을 초래했다.


세 번째로 포기한 것은 경영학과 이중전공이었다. ‘회계학원리 계절학기’의 처참한 실패를 맛보고도 나는 표준화된 사고방식에 벗어나지 못했다. ‘적성에 맞지 않더라도, 경영학과 과목 열심히 공부하면서, 졸업요건 달성할 때까지 끝까지 버티면, 대기업 어떤 직무로든지 들어가서 취준 성공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하며 경영학과 이중전공에 지원했고,  덜컥 합격하고 말았다. ‘경영대학 경영학과 합격’이라는 빨간 글자를 학교 홈페이지 사이트에서 확인했을 때 행복이 벅차오르는 대신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오퍼레이션스 관리, 재무관리, 중급회계, 경영전략, 경영통계 등등. 이중전공생으로서 들어야 하는 경영학과 전공필수 과목들은 하나같이 내가 ‘전혀 배우고 싶지 않은’ 과목들이었다. 정확히 미래에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는 나는 여전히 몰랐다, 그래도 나는 어렴풋이 ‘글쓰기가 너무 좋고, 글쓰기를 더 잘하고 싶은 사람’ ‘공익 증진에 기여하고 싶은 사람’ ‘타인을 대가 없이 도와줄 때 혹은 타인에게 감동을 주었을 때 보람을 느끼는 사람’ ‘영화, 책, 음악에 깊이 심취하는 사람’ 임을 파악하고 있었다.


좋아하는 일에 관련된 새로운 활동에 도전하면서, 내가 진짜로 가고 싶은 길을 찾을 때까지 마음껏 방황하고 헤맬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어떤 길로 가든 간에 그 길은 ‘최선의 경영 지식과 능력을 통해 지속 가능한 가치를 창조하는 창조적인 글로벌 비즈니스 리더’로 거듭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경영학 공부에 네가 관심이 있었어? 경영학 공부를 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어?’

‘음.. 아니.’

‘학점이 높아서, 문과는 상경계 아니면 취직 힘들다는 말이 많아서 경영학과에 지원한 거야?’

‘음.. 맞아.’

‘선우야, 남들 다 하는 대로 굳이 안 해도 돼. 그럴 필요 없어.’

‘경영학은 나의 길이 아니다’라는 깨달음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아빠와 나눈 대화가 결정적이었다. 나는 표준화 계약에 얽매인 채 남들 하는 대로 무던히 살아가려고 했었다. 경영학과 이중전공 포기를 ‘결심’을 넘어 ‘확정’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반성한다. ‘내가 지금 원하는가?’는 신경 쓰지 않고, ‘내게 이득이 될까?’를 궁리했던 내가 부끄럽다. 나를 존중하는 선택 대신, 나를 무시하는 선택을 내리면서 살아왔다. 내 포기의 역사는 잊어버려야 하는 흑역사가 아니라 계속해서 곱씹어야 할 쓰라린 약이다. 부디 이번 학기부터는 ‘미래의 내가 지금 내 행동을 부끄러워하지 않을까?’하고 질문하면서 올바른 길을 찾아나가는 대학생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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