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영을 왜 좋아하냐고 고모께서 물으셨다. 딱히 마땅한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좋아하는 이유를 대지 못하는 경우는 두 가지라고 생각한다. 좋아하지 않았는데 좋아하는 척을 했던 경우. 혹은 내가 진심을 다해 좋아한 경우. 이유를 대는 것이 불필요하다고 생각할 정도까지 그 대상을 좋아했을 때 말이다. 내게 수영은 후자이다. 물에 뜨고, 물에 잠기고, 손과 발을 움직이며 물살을 가르는 것을 사랑한다.
그래도 고모의 질문이니 답을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나는 왜 수영을 좋아할까. 수영하는 동안 나라는 존재가 이완되기 때문에 좋다.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가 있어요.’ 필라테스랑 PT를 할때마다 선생님께서 내게 지적하셨다. ‘힘 좀 빼 선우야.’ 아무리 다그쳐도 내 몸뚱아리는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힘 주어야 할 근육에는 힘을 못 주고, 반대로 힘을 빼야 하는 근육에는 힘을 주었다. 화가 나기보다는 안타까웠다. 나는 이따금씩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안와 걱정 때로는 강박에 휩싸여서, 좋아하는 일에 쏟아붓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에너지를 쓸데없는 곳에 낭비한다.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며 현재를 놓쳐버리는 내 어리석은 습성이, 내 몸을 움직일 때에도 적나라하게 나타나는 것 같아서 괴로웠다. 아무런 과학적 근거가 없긴 하지만, 내 마음이 경직된 탓에 내 몸도 빳빳하게 굳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할 때 나는 긴장 상태에서 빠져나온다. 힘을 들이지 않아도 몸은 두둥실 떠오른다. 반죽에 밀대를 밀듯이 수축된 근육이 매끈하게 펴지는 느낌이다. 물에 둥둥 떠 있다 보면 호흡은 느려지고 규칙적으로 변한다. 자극이 들어올 때마다 신경을 곤두세웠던 의식은 흐릿해진다. 머릿속을 빙빙 돌았던 나쁜 생각들이 사라진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물, 한결같으면서도 간간이 커지는 물소리가 귀와 눈을 두드리며 잡다한 생각과 날카로운 의식을 지워주었기 때문이다. 무거웠던 몸이 가벼워지고, 바깥의 물결이 내적인 물결을 대체한다. 수영을 통해 이르게 되는 이 평온한 상태를 사랑한다.
또 다른 이유를 붙이자면, 수영의 고요함을 좋아한다. 물속으로 잠수한 나를 맞이하는 것은 절대적인 침묵이다. 외부의 소음이 잦아들고,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들려오는 내부의 소음도 소거된다.
<인생의 역사>라는 책에서 작가 신형철은 황동규 시인의 작품인 <홀로움은 환해진 외로움이니>를 다음과 같이 해설한다.
‘철학자들은 외로움과 고독의 차이에 예민하다. 그렇다면 시인들은? 내가 보기에 황동규는 외로움이 더는 외로움이 아니게 되는 순간을 가장 섬세하게 포착하는 시인 중 하나다. (중략) 그 외로움을 그는 어떤 계기로 문득 극복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시인은 그때를 ‘외로움이 환해지는’ 순간이었다고 표현한다. 그때의 외로움은 더이상 외로움이라고 불리는 그 감정이 아닌데, 그것은 철학자들이 고독이라 부르는 것과도 또 달라서, 그는 새로운 말까지 만들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홀로움이다. 이 말 앞에서 나는 애가 탄다. 이것은 어떤 상태일까.’
나도 애가 탔었다. 외로움이 외로움이 아니게 되는 순간, 외로움이 환해지는 순간, 외로움이 홀로움이 되는 순간은 언제일까. 수영을 하면서 느끼는 적막함이 바로 그 ‘홀로움’을 느끼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독하게 외로웠을 때를 생각해보면, 세상이 조용해도 나만은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그래서 외로움이 고통스러웠던 것이다. 수영할 때는 다르다. 세상이 조용할뿐더러 ‘나마저도‘ 조용하다. 자아의 절대적인 침묵은 평온함을 선사하기에 나는 수영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