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책일수록 서평을 쓰지 못한다. 형편없는 문장으로 책을 설명해서, 결국 책의 고귀한 가치를 더럽힐까봐 무섭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용기 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왜 사람들은 이 작품에 하루키월드의 '빛나는 다이아몬드'라는 칭호를 붙였는지, 이 작품이 '현대인의 고독과 방황'을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지에 대한 내 나름대로의 해석을 내놓고 싶기 때문이다.
키워드 1. 불완전
"결국 글이라는 불완전한 그릇에 담을 수 있는 것은 불완전한 기억이나 불완전한 생각일 뿐이다."
"아마도 그녀는 나에게 뭔가를 전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만 적절하게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니, 말로 하기 전에 그녀 자신도 그게 무엇인지 몰랐다."
하루키는 글이 지닌 필연적인 불완전함을 인식하고 있는 작가이다. 나오코는 '정확한 단어'를 찾아내기 위해 신중을 가하지만, 마음 속에 있는 바를 명료하게 표현하지 못해 괴로워한다. 타인은 나를 나의 언어를 토대로 판단하는데, 내 언어에 나를 온전히 담아낼 수 없다는 슬픈 인생의 진리를 하루키는 나오코를 통해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불완전함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관계에서 벽을 만든다. 와타나베는 불완전함을 이해하지만, 나오코는 불완전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건 정말 좋아. 누군가에게 자기 생각을 전하고 싶어서 책상에 앉아 펜을 들고 이런 문장을 쓴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지 몰라."
그래서 '편지'는 작품의 중요한 장치다. 편지를 쓴다는 것은 타인이 독자인 글을 쓴다는 것이다. 편지는 곧 글이 지닌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마음을 타인에게 전달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징표가 된다. 나오코는 어느샌가부터 편지 쓰기를 포기했고, 와타나베는 나오코의 무응답에도 끈질기게 편지를 쓴다. 기즈키와 나오코라는 두 존재의 구멍이 초래한 상실감에 아파하지만, 그래도 편지를 쓰며 '너를 보고 싶고, 너를 기억하고 있고, 너를 기다리겠다'라는 진심을 표현하려고 한다. 불완전함을 대하는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상반된 태도는, 두 사람이 작품 말미에서 맞이하는 극과 극의 운명으로 이어진다.
<노르웨이의 숲>은 왜 불완전함을 파고들었을까. 먼저 나오코같은 현대인을 위로하기 위해서일지도 모른다. 나 혼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적절한 말을 찾고 싶어도 이상한 말밖에 떠오르지 않아 안절부절하며 살아간다. 어쩌면 불완전함에 좌절하지 말자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작가의 의도일 수도 있다. 완전이라는 불가능한 이상에 집착하여 표현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되며, 불완전하더라도 용기 내어 나를 타인에게 표현해야 한다는 것을 끝내 살아남은 와타나베와, 나오코 대신 편지를 쓰는 레이코가 암시한다.
키워드 2. 뒤틀림
"나는 그의 모순된 내면을 처음부터 선명하게 느꼈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왜 그런 내면이 보이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사내도 나름의 지옥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건 네 앞이었으니까 그렇지, 그 애. 네 앞에서는 늘 그랬으니까. 약한 모습 보이지 않으려고 애썼던 거야, 네가 좋았던 거야, 기즈키는. 좋은 점만 보이려고 애를 썼지."
<노르웨이의 숲>의 모든 등장인물을 관통하는 것은 뒤틀림이다. 조근 더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인간이라면 지닐 수 밖에 없는 '위선'과 '결함'이다. "뿌리부터 친절하고 공정했다." "별것도 아닌 상대의 이야기 가운데에서 재밌는 부분을 찾아내는 참으로 보기 드문 재능이 있었다." 와타나베는 기즈키를 온화한 성품과 특출난 능력을 지닌 친구로 생각한다. 하지만 나오코에 의해 기즈키를 향한 와타나베의 생각은 허상임이 밝혀진다. 기즈키는 자신의 결함은 감추고, 가장 밝은 면만 자신에게 보여줬기 때문이다. 와타나베의 인생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 미도리 또한 뒤틀린 존재이다. "늘 목이 말랐어. 한 번이라도 좋으니 듬뿍 사랑받고 싶었어. (중략)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단 한번도 나한테 그런 사랑을 주지 않았어." 미도리는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으로 생긴 결핍을 채우려는 욕망 때문에 와타나베를 사랑한다. 와타나베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꾸준히 연락하기를 기대하지만, 정작 본인도 어떠한 설명이나 예고 없이 와타나베와의 약속을 파토내거나 홀연히 잠적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기즈키와 언니의 기억이 자신을 얼마나 괴롭게 하는지 알면서도 와타나베에게 자신을 영원히 기억해달라고 요구하는 나오코, 타인을 도구처럼 이용하는 것을 자신의 멋진 게임으로 포장하는 나가사와 등 <노르웨이의 숲>의 등장인물이 지닌 뒤틀림을 무수히 많이 찾아낼 수 있다. <노르웨이의 숲>은 입체적인 등장인물을 통해 우리 모두 고결한 존재가 아닌 뒤틀린 존재임을 짚어내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가 타인 앞에서는 뒤틀림을 감추려는 개인의 모습, 혹은 개인의 뒤틀림을 발견하지 못하는 타인의 모습을 그려냄으로써 '타인을 결코 완벽히 이해할 수 없는' 서글픈 현실까지 조망한다. 그래서인지 성숙한 어른인 레이코가 와타나베에 '솔직해지라고' 충고를 건네는 대목은, 뒤틀림에 솔직하지 못한 등장인물과 독자 모두에게 울림을 준다.
키워드 3. 상실감
"죽음은 삶의 대극이 아니라 그 일부로 존재한다."
"어떤 진리로도 사랑하는 것을 잃은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어떤 진리도, 어떤 성실함도, 어떤 강인함도, 어떤 상냥함도, 그 슬픔을 치유할 수 없다. 우리는 그 슬픔을 다 슬퍼한 다음 거기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뿐이고, 그렇게 배운 무엇도 또다시 다가올 예기치 못한 슬픔에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노르웨이의 숲> 등장인물은 '죽음'에 각기 다른 태도를 보인다. 나오코는 죽음에 속절없이 무너지는 인물이다. 나가사와는 자신의 인생에 죽음 따위 없다고 자신만만해하는 인물이다. 미도리는 가까운 사람의 죽음에 질릴만큼 익숙해진 인물이다. 레이코는 죽음이 잠겨 있는 삶에도 의미가 있음을 믿는 인물이다. 와타나베는 죽음이 뒤엉킨 삶에서 어찌할 바를 몰라 방황하는 인물이다. <노르웨이의 숲>의 가장 빛나는 성취는, 죽음과 상실감을 피상적으로 다루지 않았다는 것이다. 죽음과 상실감은 가끔씩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평생 우리 옆에 붙어있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의지와 노력으로 죽음과 상실감을 이겨내지 못하며, 속수무책으로 당한 다음 계속 아파할 수 밖에 없다. 이 비정한 사실을 하루키는 와타나베의 말을 빌려 소설의 가장 극적인 대목에서 전달한다. 따라서 <노르웨이의 숲>은 성숙함으로 죽음을 극복하려던 와타나베가, 죽음을 수용함으로써 비로소 성숙해지는 서사로 귀결된다고 볼 수 있다. 작품의 마지막에서 미도리가 묻는 "너는 지금 어디야?"는 와타나베에게 "너는 지금 삶에 있어, 아니면 죽음에 있어?"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자신은 삶과 죽음 그 모두를 끌어안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기에, 그 모두에 속해 있기에 와타나베는 미도리의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