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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팟에서 재생되는 아빠의 사랑

by 온화

아빠의 아이팟을 발견했다. 2007년에 출시된 아이팟 나노 3세대 모델이었다. ‘커서 도대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니. 손이 이렇게 작고 힘이 없는데.’ 아빠는 내 손을 어루만지면서 안타까워하곤 했다. 아이팟은 아담했다. 내 고사리 같은 손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널 되살리는 게 가능할까. 우리 집의 온갖 잡동사니를 모아둔 서랍을 뒤적거리며 애타게 충전기를 찾았다. 감격스러워하며 정체 모를 포장지, 건전지, 사용설명서 밑에 숨겨진 아이팟 충전기를 끄집어냈다. 버튼을 눌러도 새카만 응답만 하는 아이팟에 전력을 공급했다.


15분의 시간 후에 깨어난 것은 아이팟에 얽힌 아빠와의 추억이었다.

라디오 PD인 아빠는 음악을 선곡하는 일을 하셨다. 사람들이 음악을 일상에 곁들일 때, 아빠는 음악을 일상에 녹여냈다. 음악과 함께하는 건 아빠의 삶이었다. 아빠는 아빠의 세상인 음악을 항상 나에게 알리려고 했다.

8살이었을 때. 아빠는 크리스마스에 가장 좋은 캐럴 음악을 담은 CD를 구워서 내게 선물해 주셨다. 황금색이기도 하고 은색이기도 한 반짝이는 CD 위에 아빠는 네임펜으로 ‘Christmas playlist’라고 적어놓았다. 이해 못 하는 단어 투성이인 영어 가사를 서툴게 따라 부르며 엄마와 함께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몄다. 아빠는 옆에서 멜로디를 흥얼거리며 셜록 홈즈 추리 소설을 읽었다.


12살이었을 때. 아빠는 자신이 사용했던 아이팟을 내게 물려주었다. '좋아하는 음악 아빠한테 말해. 아빠가 다운로드해서 아이팟에 넣어줄게. 요즘 인기 많고 좋은 음악들은 아빠가 미리 넣어놨으니까 쭉 들어봐’라고 내게 말씀하셨다. 아빠가 아이팟에 담은 음악을 통해 나는 브루노 마스, 마룬 파이브, 테일러 스위프트와 첫만남을 가졌다. 엑소의 ‘으르렁’을 아이팟에 담아줄 수 있냐고, 소파에 드러누운 아빠를 졸랐을 때 아빠는 ‘우리 딸이 이제 아이돌을 좋아할 나이가 되었구나’하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13살이었을 때. 아빠는 엉키고 꼬인 민트색 이어폰 줄을 풀어내는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 있잖아, 선우야. 이어폰 말고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으면 엄청 다르다는 걸 아니? 음악이 훨씬 더 생생하게 잘 들려. 아직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지?‘ 헤드폰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몰랐던 나는 아빠를 멀뚱멀뚱 쳐다봤다. 그 해 아빠가 내게 준 생일선물은 핑크색 소니 헤드폰이었다. ’이걸 목에 착 걸고 걸어 다녀야 멋인데. 내일 학교 갈 때 끼고 가!‘ 아빠는 헤드폰이 선사하는 새로운 세상에 푹 빠져든 딸에게 말했다. 내성적이고 부끄럼을 많이 탔기에 나는 남들 눈에 튀고 싶지 않다며 멋을 내는 걸 거부했다.


14살이었을 때. 아빠는 야마하 오디오 플레이어를 내 책상 위에 올려놓으셨다. ‘진짜?! 내 방에 가져다 놔도 괜찮아?’ 탄성을 질렀다. 학교랑 학원 숙제를 끝마치면, 나는 아빠 방으로 가서, 서재 한 줄을 가득 채운 ‘아빠의 컬렉션’에서 앨범을 고른 다음 CD표면이 닳을 때까지 음악을 들었다. 때로는 아빠가 메인 PD인 라디오 방송을 라이브로 들으며 ‘내가 아빠 프로그램에 사연을 보내볼까. 아빠는 어떻게 반응할까'하고 상상했다. 좋은 곡을 찾으면 나는 이 노래 내가 발견했다고, 좋으니까 아빠도 꼭 들어보라고 재촉하며 아빠의 휴식을 방해했다. 내가 방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아빠가 아무런 예고 없이 불쑥 들어와서, 이 노래 좋으니까, 공부 잠깐 멈추고 한 번 들어보라고 말했던 것처럼 말이다.


‘샤잠’의 존재를 몰랐던 시절. 같이 영화를 보러 가거나 쇼핑을 하러 갔을 때 트렌디한 음악이 매장에서 들려오면 아빠는 나에게 지금 들리는 이 음악이 좋으니 무슨 음악인지 찾아서 알려주라고 깜짝 미션을 내게 종종 내리곤 했다. 함께 드라이브를 떠날 때 아빠는 음악 ‘선곡권’을 나에게 넘겨주며 내 플레이리스트를 엿보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부장은 프로그램을 제작할 수 없으니 재미없다고. 사람들한테 지시하고, 모든 것을 모니터링해야 하는 권위적인 자리는 싫다고 말했던 아빠는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부장이 되었다. 사건사고가 연달아 터지고, 분위기는 어지럽고 혼란스럽다. 아빠가 책임지고 처리해야 할 업무는 버겁게 쌓여간다. 어느샌가부터 음악을 듣는 아빠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제 퇴근한 아빠는 아이폰으로 인스타그램 릴스나 유튜브 쇼츠를 몰아본다. ‘재밌어 아빠?' 내가 물었다. '글쎄. 아빠가 오늘 일이 많았다. 머리가 지끈지끈거려서. 지금은 이런 거 보면서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하며 아빠는 답했다.


나 또한 아빠에게 소개하고 싶은 음악을 찾아보지 않는다. 대신 뉴스 기사를 찾아 읽어보며, 아빠가 처한 힘든 상황을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이렇게라도 내가 아빠의 고민에 관심을 가지면, 아빠의 마음의 짐을 덜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걸 나 스스로도 잘 안다.


모두가 잠든 밤에 혼자 밝게 빛나는 아이팟 화면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눈시울이 붉어졌다. 유튜브 뮤직이랑 스포티파이에 각종 플레이리스트가 성행하고, 에어팟 맥스가 사람들의 소비 위시리스트로 등극하고, 아이팟 클래식 감성이 트렌드로 떠오르는 시대에서 아빠와 내가 살아간다. 아빠의 선구안에 감탄함과 동시에 나는 아빠가 음악이라는 세계를 나와 공유함으로써 내게 늘 다가오려고 노력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음악과 함께 밀려오는 것은 뒤늦은 자각에서 비롯된 후회, 아빠가 나에게 다가간 만큼 나는 아빠에게 다가가지 않았다는 깨달음에서 야기된 죄책감, 그리고 음악으로 연결되었던 아빠와 나의 과거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나는 종강을 했고 회사일에 지친 아빠는 3일 휴가를 냈다. 아빠가 집에서 쉬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욕심을 부려서 같이 스파이더맨 영화를 보자고 아빠를 졸랐다. 우리 모두 슈퍼히어로 영화를 좋아하고, 무엇보다 이 영화에는 좋은 음악이 OST로 많이 나오니까. 내 걱정과 달리 아빠는 흔쾌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 2시간 남짓의 시간이 지난 다음 상영관에 불이 켜졌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갔다. ‘선우야. 배경이 브루클린으로 전환되면서 마일스가 처음으로 등장할 때 나온 음악 정말 좋았는데. 1편의 Sunflower랑 분위기가 비슷했어. 그 노래 뭘까?’하며 아빠는 물었다. 참으로 오랜만에 듣는 말이었다. ‘내가 찾아볼게, 아빠.’ 4일가량의 ‘디깅’ 후 마침내 그 음악이 Rakim의 Guess who’s back임을 발견했다. 나는 기뻐하며 아빠 옆으로 쪼르르 달려가 나의 성과를 자랑했다. 흥겨운 비트에 리듬을 타며 아빠랑 나는 음악을 감상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빠가 내게 항상 먼저 다가와줬으니 이제 내가 먼저 아빠에게 힘껏 다가가면 되겠지. 잘 작동되는 아이팟을 쓰다듬고 만지작거리면서, 나는 이 아이팟의 생명력처럼 아빠와 내가 주고받는 사랑이 오랫동안 지속되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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