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이면 가방에 맥북이나 아이패드만 챙기면 되지 뭐. 새내기가 되었을 때, 나는 종이와 펜이 이제 내게 더 이상 필요 없다고 단단히 착각했었다.
A는 아날로그를 배척하고 ‘세련된’ 디지털만 고집했던 나의 오만함을 깨뜨린 친구였다. 산학협력 프로젝트에서 A와 같은 팀으로 일했다. 우리는 프렌차이즈 카페에서 회의했다. 팀원들은 저마다 카페인이 함유된 음료수를 주문한 다음 가방에서 노트북과 마우스를 꺼냈고, 팀 공유 드라이브에 접속했다. 모두 회의 준비를 마친 거겠지. ‘이제 시작할까 우리?’를 말하려고 목을 가다듬는데 가방 안을 주섬거리는 A가 눈에 띄었다. A가 가방에서 꺼낸 것은 두툼한 공책과 검정색 펜이었다. 나는 의아했었다. 왜 공책이랑 볼펜을 챙겨왔을까?
‘OO 시장의 현황은 어떠한가?’ ‘OO기업이 타켓으로 삼는 소비자층의 니즈는 무엇인가?’ ‘OO 기업의 마케팅 전략이 지닌 문제가 무엇인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경쟁사 XX기업과 어떻게 차별화해야 하는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마케팅 전략 제안 PT를 만들었어야 했다. 우리는 끊임없이 질문들을 마주해야 했고, ‘우리만의 분석과 통찰력이 들어간’ 특별한 답을 제시해야 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하나의 일관된 논리가 각 질문에 대응하는 답을 관통해야 했다. 적절하면서 참신한 답을 제시함과 동시에 수많은 답들이 ‘중구난방’이 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쉬웠을 리가 없었다. 허들 경주를 뛰는 육상 선수마냥 우리는 계속 문제에 봉착했다. 아무것도 떠올리지 않아서. 혹은 너무 많은 게 떠올라서, 심지어 그것들이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버려서. 쉽게 말하자면 방향성이 흔들리거나, 방향성을 잃었거나, 방향성 자체를 못잡거나.
모두가 지쳐서 회의 진행을 반쯤 포기하고 넋을 잃었을 때 친구 A는 노트북 옆에 놓은 공책을 집은 다음 테이블 중앙에 펼쳐놓았다. ‘우리 지금 완전 막혔어. 그치?’ ‘지금까지 어떤 얘기를 나눴는지 다시 한 번만 짚어보자.’ 문제에 꼼짝도 못하는 괴로운 상황에서 A라는 친구가 택한 해결 방식은 문제를 돌파하기에 앞서 문제에 이르게 된 흐름을 ‘되짚어보기’였다. 회의에 치열하게 임했던 1인칭 주인공의 시점에서 벗어나,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올라가서 회의에서 우리가 나눴던 이야기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자는 것이 A의 의도였다.
A는 공유 문서에 타이핑하는 대신 공책에 펜으로 글씨를 적으면서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회의에서의 굵직하고 중요했던 포인트를 짚어나갔다. ‘우리가 모두 동의한, 트립비토즈 앱의 중요한 특징은 ‘호텔예약’, ‘숏폼SNS’, ‘트립머니’야. 맞지?’ A는 말하면서 동시에 공책에 ‘호텔예약’ ‘숏폼 SNS’ ‘트립머니’라는 글자를 큼지막하게 썼고 3개의 동그라미를 그렸다.
‘우리가 이런 문제를 지적했지? 트립비토즈 사용하는 사람들이 여행 숏폼 동영상을 별로 올리지 않는다고. 올린 동영상도 퀄리티가 별로라서, 보는 사람 입장에서 ‘저 호텔로 여행을 떠나고 싶다’라는 욕구가 생기지 않는다고 말이지.’ A는 숏폼 SNS를 감싸는 동그라미에 작대기 2개를 그으며 가지치기를 했다. ‘부족한 영상 수’ ‘영상의 낮은 퀄리티’라는 글이 공책에 추가되었다.
‘여기서 또 이런 문제가 제기되었어. 사람들이 여행 가서 사진이나 영상 많이 찍는다 해도, 다른 플랫폼, 특히 인스타그램에 올린다고. 굳이 트립비토즈 앱에 접속하면서까지 올리지 않는다고.’ A는 볼펜의 펜촉을 노트의 중앙에서 위로 올리면서, 맨 처음에 적었던 트립비토즈 옆에 ‘vs 인스타그램’이라는 글자를 휘갈겨 적었다.
‘우리가 답해야 하는데 답하지 못한 질문들은 이거야’ ‘영상을 올릴 때마다 트립 머니를 주는 트립비토즈의 특별한 보상시스템을 어떻게 홍보해야, 사람들이 일반 SNS뿐 아니라 트립비토즈에도 여행 영상을 올리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 A가 질문을 적는 모습을 나를 포함한 다른 팀원들이 뚫어져라 쳐다봤다.
숨을 죽이고 집중하며 A의 ‘노트 필기’를 쳐다보는 과정에서 저절로 우리의 지쳤던 의식은 또렷해졌으며 흐리멍텅했던 눈에는 다시금 생기가 돌았다. 나는 종이와 펜의 효용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빈 종이에 볼펜으로 글을 적는 그 단순한 행위는, 노트북의 공유 문서 화면을 장시간 쳐다봄으로써 피로해진 눈과 정신을 맑게 환기하는 효과가 있었다. 노트북 화면이 아닌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행위는 생각 이상으로 강력한 ‘쉼표’로 작용했다.
아무리 댓글 기능과 하이라이트 기능이 존재한다하더라도, 인터넷 문서는 ‘필터링을 거쳐서’ ‘중요하고 공식적인 것만 적으라는’ 무언의 압박을 사람들에게 준다. 설렁 잡담이나 자질구레한 생각과 아이디어를 타이핑할 수 있을지라도 나중에 그것들은 산만함과 혼란을 방지하기 위해 삭제되어야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종이는 ‘아무거나’ 적어도 괜찮다는 안심을 우리에게 주었다. 당연히 ‘아무거나 막’ 적어서는 안되지만, 그래도 생각과 흐름의 연상, 기술, 나열, 정리에 더욱 거리낌이 없어진다. 종이 위에서 펼쳐지는 사고는 조금 더 유연하고 자유롭다.
마지막으로, 종이 필기를 통해 회의를 되짚어보는 것은 우리가 회의에서 나눈 수많은 대화들을 ‘실체가 분명한, 명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눈에 보이지 않았던 것이 눈에 확실히 보이게 된다는 뜻이다. 심리적인 측면에서 회의 내용을 집약한 노트 필기를 바라보면 ‘그래도 우리가 여태껏 헛소리하며 시간을 낭비한 게 아니라, 생산적인 대화를 나눴고, 우리가 나눈 얘기에서 유의미한 지점들이 분명히 존재했다.’라는 사실이 상기된다. 막연한 불안함은 사그라들고, ‘그래도 열심해 뭔가는 해왔으니’의 안정감이 그 공백을 채운다. 이 안정감은 훗날 문제 돌파를 도울 든든한 추진력으로 작동한다. 일적인 측면에서는 ‘모두가 이해하고 합의한 내용’ ‘우리가 감당 못하고 보류한 내용’ ‘어물쩡하게 대충 넘긴 내용’ ‘좋았는데 더 발전시키지 못한 내용’들이 필기에 사용된 키워드나 조직도를 통해 선명해지기 때문에, 각 항목을 다시 진지하게 고찰하는 시간이 확보된다. 매듭 짓지 못한 부분을 매듭 짓고, 느슨했던 부분을 단단히 매듭 짓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프로젝트에 내실이 다져진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A는 자신의 아이디어를 표현할 때에도 적극적으로 노트와 펜을 사용했다. 내가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사실은 조금도 최선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생긴다. A를 보면서 한 생각이었다. IMC 전략 아이디어를 각자 제시할 때 나는 말로 내 아이디어를 설명하기에 급급했다. 하지만 A는 종이 위에 스케치를 하면서 언어뿐 아니라 시각적 이미지를 동원했다. ‘로고를 세련되게 바꿔야할 것 같아’라고 무책임하게 말하는 대신 A는 ‘이런 글씨체로, 이런 오브제로, 이런 색깔을 사용해서’ 로고를 만들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며 로고 도안을 그려서 우리에게 보여줬다. ‘이런 스토리라인의 광고를 만드는게 어떨까’라고 두루뭉술하게 말하는 대신 A는 종이 위에 광고 스토리보드를 그렸고, 삽입하면 좋을 광고음악과 캐치프레이지까지 명시했다. 투박하고 거칠다하더라도, 이미지를 사용하니 아이디어에는 디테일이 살아났고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말에는 탄력이 붙었다.
‘안 풀리면 종이를 펼치자.’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종이를 펼치자’ ‘정리가 필요하면 종이를 펼치자’ 이런 생각이 내 뇌에서 용수철처럼 튕겨오르는 이유는 A 때문이다. 아날로그 일머리를 갖춘 A 덕분에 나는 종이를 펼치고 적어보자는 행동강령을 세우게 되었다. 마케팅 프로젝트를 완수했다는 무미건조한 이력 한 줄에 흡족함을 느끼기보다는, 그 누구보다 정확히 아날로그의 힘을 이해하고, 아날로그를 탁월하게 활용한 A의 현명함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