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루테이프의 편지'라는 책이 있다. 1942년 작이다. 나는 이런 책을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평범하지 않기 때문이다. 삼촌 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악마 '웜우드'에 보내는 편지로, 악마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어떻게 하면 악마짓을 더 잘해서 인간들을 처참히 망쳐놓을 수 있는지, 꿀팁을 전하는 내용이라고 보면 된다. 일부를 인용하겠다.
악마의 입장에서 쓰였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원수라고 표현한다.
물론 원수도 처음에는 약간 제압할 태세를 갖춘다. 실제로는 미약하게 드러낸 것인데도 인간들에겐 굉장해 보이는 임재, 달콤한 감정이 일어나면서 유혹을 쉽게 이길 수 있는 그런 임재를 경험하게 해 준다는 말이지. 그러나 이런 상태가 오래가진 않는다. 원수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런 후원이나 장려책들을 죄다 거두어들이니까. 물론 실제로 거두어들이는 건 아니다. 인간들이 의식하는 경험의 수준에서 그렇게 느껴진다는 게지.
원수는 피조물들이 제 힘으로 서게 내버려 둔다. 흥미는 다 사라지고 의무만 남았을 때에도 의지의 힘으로 감당해 낼 수 있게 하겠다는 속셈이지. 인간은 꼭대기에 있을 때보다 이렇게 골짜기에 처박혀 있을 때 오히려 그 작자가 원하는 종류의 피조로 자라 가는 게야. 그러니 이렇게 메마른 상태에서 올리는 기도야말로 원수를 가장 기쁘게 할 수밖에.
우리는 혼다들을 밥상에 오를 식사거리로 생각하는 판이니 끊임없는 유혹을 통해 질질 끌고 와도 무방할 뿐 아니라, 그들의 의지를 방해하면 할수록 좋다. 하지만 원수로서는 우리가 인간을 악으로 유혹하듯 미덕으로 유혹할 수는 없는 일이지. 제 바램대로 인간 스스로 걷도록 가르치려면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아야지 별 수 있겠느냐. 그러다가 넘어져도 계속 걷겠다는 의지만 보이면 그 작자는 좋아라 한다구.
그러니 웜우드, 속지 말거라.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는 때는 없다.
물론 골짜기가 우리 편에게 제공해 주는 기회도 있긴 하지. 다음 주에는 그런 기회들을 이용해 먹을 수 있는 힌트를 몇 가지 주도록 하마.
너를 아끼는 삼촌,
Screutape.
내가 가장 주목하는 부분은 여기다.
"그러니 웜우드, 속지 말거라. 인간이 원수의 뜻을 따르고 싶은 갈망을 잃었더라도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다면, 세상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원수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것 같고 왜 그가 자기를 버렸는지 계속 의문이 생기는데도 여전히 순종한다면, 그때보다 더 우리의 대의가 위협받는 때는 없다."
여기까지 나의 글을 읽고 있는 독자라면, 당신은 악마에 대항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라고 본다. '스크루테이프' 또는 '웜우드'와 같은 악마들에게 이미 영혼을 잠식당한 인간들은 애초에 이런 글을 읽지 않는다. 아니, 아예 글을 읽지 않는다. 나 같은 사람에게 별 관심 없다. 되려 나 같은 사람을 싫어한다. 뭐 그렇게 빡세게 사냐면서 말이다. 내가 보통의 사람들을 꺼림칙하게 생각하는 것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먹을 게 없어 배가 고프거나, 수도가 얼어 물이 안 나와 씻지를 못하거나, 버스비가 없어서 학교를 걸어 다니거나, 어머니를 때리는 아버지에게 덤벼들었다가 줘 터지거나, 우범지역에서 인신매매단에게 쫓기다가 겨우 탈출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로 나갔다가 여럿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거나, 그렇게 나와 함께 일했던 동료들이 침몰 사고로 실종이 되거나, 상사에게 머리채를 잡힌 뒤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다거나, 상사들에게 끌려간, 담뱃재 떨어진 노래방 바닥에서 원산폭격을 하고 있다던가.
저런 골짜기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전하려는 메세지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 보면, 저런 고난들이 내 청년기에 몰아친 것은 가난을 극복하고 부모형제를 지켜내겠다는 일념 때문이었다. 그런 뜻을 가진 사람이었기에 갈수록 극단값으로만 치달은 것이다.
나는 신이고 종교고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다. 훈련소에서 초코파이 더 준다길래 천주교 예배 가는 사람이었다. 신실한 믿음을 통해 버틴 것은 아니었지만, 가족을 보호하기 위해 나는 물러서거나 주저앉을 수 없었다. 그 일련의 과정들이 결과적으로는 악마의 대의를 더할 나위 없이 위협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삼촌 악마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의하면 그러하다.
골짜기를 지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글을 마음 한켠에 새기고 있길 바란다. 지나가버리게 될 오늘의 삶을 후년에 뒤돌아 보았을 때, 당신의 후회를 예방해 줄 것이다. 고로, 후회 가득한 말년이 아닌 행복한 죽음을 선사할 것이다. 이 얼마나 멋진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