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임종은 올 것이다. 누구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 우리는 자연으로 되돌아가게 되어있다.
나는 생각한다. 죽기 직전에 자기 인생을 크게 후회할 때, 인간이 정신적으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고통을 겪으리라. 그것은 스트레스라고 말하기 어렵고, 짜증이라 말하기도 어렵다. 고뇌라고 하기도 어렵고, 우울이라 하기도 어렵다. 상실감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그것은 차원을 넘어서는, 영혼을 관통하는 통각일 것이다.
우리는 죽을 때,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격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지금의 조건은 X, Y, Z 공간 축인 3차원에 시간 축이 더해진 4차원의 세계라 볼 수 있다. 죽으면 이 조건 모두를 이탈하게 되고, 어디로 가는지, 어딜 가긴 가는 건지 알 길이 없다. 망자는 말이 없는 법이니까.
그러나 어찌 되었든 차원은 이동되는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여기에 계속 남아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차원을 가로지를만한 고통이라는 것은 정말 큰 고통일 것이다. 의식이 흐려지고, 이렇게 끝이구나 싶을 때마저도 그러한 통각이 머리와 가슴에 잔재하면, 그것은 어떤 죽음일까. 그것이 가장 비참한 죽음이 아닐까. 입에 게거품을 물고, 자기 바지에 똥오줌을 지리며 죽는 것 보다도 저렇게 죽는 것이 훨씬 더 비참한 죽음이지 않을까.
사람들 생각은 잘 모르겠다. 나는 그럴 것 같다.
동양에는 '공수래공수거'라는 말이 있다. 서양에는 '무덤 크기는 모두 같다.'라는 말이 있다. 불교 교리의 가장 주축이 되는 개념은 '공'으로 '없을 공'을 뜻한다. 인생은 애초부터 있으나 마나 한 것이니 걱정할 것 하나 없다고 말하는 것이 반야심경의 내용이다. '알베르 카뮈'는 '시지프 신화'에서 부질없는 짓을 죽을 때까지 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고 보고 있다.
그럼에도 모두는 성공을 바란다. 대부분 경제적 성공을 바란다. 이것을 철학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보고 있다. 나는 작가이고, 작가는 자기만의 사고를 해야 한다. 어디서 듣거나 본 것을 옮겨 적는 것이 아닌, 자기만의 사고가 있을 때, 그리고 그것이 참신할 때, 진정 남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고 거기에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경제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안도감'이 있다. 그리고 '우월감'이 있다.
안도감
전쟁 영화를 보면 잔인한 전투 씬이 있다. 총탄이 빗발치고 사방에서 포탄이 터진다. 병사들의 사지는 찢기고 뚫린다. 시간이 흐르면 전투는 끝이 난다. 그리고 살아남은 군인들이 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담배를 물고 멍하니 있는다. 드문드문 속 모를 웃음을 짓는 이들이 있다.
나는 이것이 모든 인간의 민낯이라고 본다. 동료들은 죽었지만, 자신은 그래도 살았다는 안도감에 미소 짓게 되는 것이다. 나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마음 저변에 저러한 본성이 있다. 인정하기 싫더라도 사실일 것이다.
그래서 이미 경제적 성공을 이룬 이들은 이 감정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즐기고 있을 확률이 높다.
우월감
우리나라만큼 '우월감'이 강조되는 국가는 지구상에 없을 것이다. 별다른 설명이 필요 있겠나 싶다. 결국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이유는 우월감의 반대인, 열등감을 느끼는 탓이다.
극단적인 예시를 하나 들어볼까 한다.
영화 '피아니스트'에 나오는 장면이다. 나치 친위대 장교가 유대인 노인이 인도 위를 걷고 있는 것을 본다. 장교는 노인에게 구정물이 잔뜩 고여 있는 도랑으로 걸어 다니라고 명령한다. 노인은 중절모를 벗어 자기의 가슴에 얹은 뒤 고개 숙이며 '죄송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공손히 말한다. 그러니 장교는 노인의 뺨을 강하게 후려갈긴다. 힘이 없는 노인은 몸이 제쳐진다.
역사적으로 당시의 나치 장교들은 제각각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면 선하고 책임감 강한 남편이고 아버지였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
남보다 내가 낫다는 의식이 깔리게 되고, 그것이 극단으로 치달으면 인간성이 말살되는 지경에 이를 수 있음을 보여주는 1940년 유럽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나를 포함한 우리가 'Innocent'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사실적이지 않다. 우리는 외화벌이를 하기 위해 공장 노동을 하러 온 파키스탄 사람보다, KPOP 공연을 보기 위해 온 호주 백인에게 더 친절한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보다 벤츠를 끌고 내 집 주변을 서성이는 건물주에게 더욱 공손한 경향이 있다.
경제적 성공을 이룬 이들은 이 감정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즐기고 있을 확률이 높다.
나는 보통의 사람들보다는 부자를 많이 만나려고 노력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평균보다는 많이 마주친 것 같다. 위 언급한 인간 본성을 아무런 통제 없이 휘두르고 다녔던 부자는 6할 정도였다. 나머지 3할은 자제하는 축이였고, 1할이 진정으로 저러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과연 1할은 철학적으로 바람직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까. 그리고 6할은 철학적으로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까.
바람직하다는 것을 먼저 정해보자. 바람직하다는 것을 '죽을 때 후회가 없는 삶'이라고 정의해 보자.
6할의 부자들은 자신을 인간의 본성에 아주 맡겨버린 사람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우월감, 안도감 방면에서 극단으로 치달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즉, 인간성이 말살된 삶을 살았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래서 인생을 살면서 적을 많이 만들었을 확률이 높다. 또 주변에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없을 확률이 높다. 이 정도면 죽을 때 후회가 없을 것이라고 하기가 참 어려울 것이다. 죽기 직전 병실에 간호사 빼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보라. 사실 그 간호사도 그 진상 환자가 얼른 죽길 바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겠는가.
1할의 부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자신만의 철학 공부로 잘 융해시켜 잠재운 이들을 말한다. 이런 사람들은 적이 많이 없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인간성이 보존된 삶을 살았을 확률이 상대적으로 높다. 우월감, 안도감을 진정으로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죽기 전 병실은 자신의 손아래 핏줄과 지인들로 가득할 것이다. 또한 그들은 진심으로 그 사람의 임종을 슬퍼하고 있을 확률이 높다. 물론, 간호사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죽을 때 이만하면 잘 살긴 살았나 보다 싶을 것이다.
나는 머리가 대단히 똑똑하지는 않아 확언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아마도 철학자, 불교, 속담의 내용들이 세상의 순리가 맞을 것이라 본다. 고전이 고전인 이유가 있지 않겠는가. 인생은 덧없고 부질없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왕이면 죽을 때 후회가 없는 삶을 사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한다.
오늘 생각해 본 단편적인 논점에서 결론을 추려보자면, '바람직한 임종을 맞기 위해서는 본성을 철학적 배움을 통해 잘 와해시키거나, 최소한 자제라도 하려는 자세는 가지는 것이 알맞다.'이다.
나도 아직은 이 방면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있다. 글을 쓸 때, 진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해 쓰는 것에는 장점이 있다. 부족한 나의 인간상에게 계속해서 자각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일종의 의무감도 부여해 준다. 내가 이렇게 하자고 했는데, 이렇게 안 하면 쪽팔린다. 이 글은 온 동네 사람들 다 볼 수 있다.
내가 그러했듯, 여러분도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길 바란다.
나는 얼마나 본성에 끌려다니고 있는 사람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