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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층 아기 또 우는구나.

선교사 노부부

by 언더독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그래서 오늘은 왜 사람들은 다양한지에 대한 고찰을 써본다.


퇴근 후,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피로를 푸는 동시에 서너 시간 정도 생각을 해본 것 같다. 다리와 허리가 어느 정도 회복을 해서 다시 책상에 앉았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할 때는 그냥 결론부터 말하는 게 좋다.


결론은 사람의 인생은 대부분 선천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인다. 유전자이다.




한국은 자본주의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자본주의적인 나라이다. 물질만능주의를 잘 갖추었다. 가치판단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결과를 두고 직시해 보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방식이다. 판단을 하지 않고, 결과를 직시하는 것에서 나온 관찰값을 데이터라고 부른다. 데이터는 객관성이 있다. 객관성은 실전에서 작동한다. 실전에서 작동하면 현실을 변화시킬 수 있다. 현실을 변화시키면 와닿는 즐거움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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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만능주의에서 가장 칭송받는 가치는 무엇인가. 돈이다. 그래서 성공한 사람들이 쓴 책은 곧잘 베스트셀러가 된다. 문학성이 뛰어난 작가가 쓴 책 보다 몇 배는 큰 SNS 영향력을 지닌다. 또 그것이 돈으로 치환되기도 하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공을 어떠한 방식, 어떠한 강도로 좇는다. 개개인의 인생에 있어, 그것을 좇을 때 어느 정도의 간절함인지는 다 다르다. 어느 정도의 포기를 감내하고 있는지도 다 다르다. 어느 정도의 위험을 감수하고 있는지도 다 다르다. 그것들에 차이를 보이기 때문에,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음에도 다양한 상태의 사람들이 생겨난다.


내 사고과정을 순서대로 정리해봤다.


이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왜 제각각이 간절함, 포기, 위험 감수에 있어서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 것인가.




나는 일반적인 사람들 중, 지나치게 지능이 떨어지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떠한 사실, 데이터, 확률, 숫자 등을 직시하고 인지하는 능력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나는 그런 직시하는 능력이 대단히 날카롭게 벼려진 검처럼 예민하다. 잘 생각해보면, 사람이 예민하고 말고는 노력이나 학습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3시간의 고뇌로 알 수 있었다.


나는 태어날 때부터 예민한 인간이었다.


내 어머니는 내 갓난쟁이 때의 기억을 하면 늘 하시는 말씀이, 어떻게 이런 성질 더러운 애새끼가 내 배에서 나왔나 싶었더라는 것이다.


내가 울기 시작하면, 온 동네사람들이 알아차렸다고 한다.


'아 몇 동 15층 아기, 또 우는구나.' 하고 말이다.


F4ZQuIdWUAA0kbH.jpg 내가 기억이 안나니 참...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사람이 있다. '찰리 멍거'라는 분이다. 얼마 전 99세의 나이로 별세하셨다. 버크셔 헤서웨이의 부회장으로, '워런 버핏'의 절친이었다.


그도 말했다. 자신이 애들 낳아서 시집 장가 다 보내봤는데, 성인이 된 애들을 보고 있노라면, 자신이 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는 식으로 말했다. 수줍은 아기는 수줍은 성인이 되었고, 방방거리고 불쾌하고 거만한 아이는 방방거리고 불쾌하고 거만한 성인이 되었다고 했다. 자기는 결국에는 자식들이 저들대로 크는 걸 손 놓고 바라보았던 꼴이 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바로 터놓고 말해보자.


1. 성공을 할 재목은 태초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인가.


2. 선천적인 것이 아닌 모든 시도는 의미가 없는 것으로 바라보아야 하나.




- 1의 결론 -


100%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높은 확률로 그렇게 된다는 것이라 보인다. 사람마다 근원적인 IQ, EQ는 타고난다. 그리고 앞서 말한 사람의 근원적인 성격과 성향 또한 타고난다. 예민하며 화가 많고 남성적이며 공격적인 사람이 성공할 확률이 높다. 무던하며 순둥순둥하고 여성적이며 수비적인 사람이 평균의 인생을 살 확률이 높다.


- 2의 결론 -


성공을 목표에 둔 삶에 한정해 놓고 바라보자면, 여러 가지 노력들이 의미가 없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확률적인 이야기를 논할 수는 있겠지만, 사람의 인생을 어찌 공산품처럼 각을 내어 재단할 수 있겠는가.


인간도 자연의 일부로 무수한 엔트로피값을 가진다. 엄청난 무질서도를 가지고 있다. 어디서 어떤 포텐이 터질지는 알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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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리고 말이다.


물론, 나는 자유와 독립을 공기만큼이나 간절하게 원하는 사람이지만서도. 그래서 모든 청춘을 되돌릴 길 없이 갈아 넣고 있지만서도.


세상에는 진정으로 다른 추구점을 가진 사람들도 있다. 난 본 적이 있다.


마치 그런 척 합리화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 속 깊은 곳 성공을 원하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못했고, 성공은 내가 원한 것이 아니었다고 말하게 되면 그것은 합리화니까.


과거 중국 '샤먼'에서 보았던 미국인 선교사 노부부가 그런 사람들이었다. 보기 드문 그런 사람들.


그들은 반세기 전, 미국에서 중국으로 선교 활동을 왔었다. 당시, 그들은 중국 사람들의 처참한 인생을 보았고, 크리스천의 의무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난 잘 모른다. 난 군 훈련소에서 초코파이 더 준다고 해서 교회 갔던 사람이다.)


비자 문제로 몇 달만에 미국으로 돌아갔어야 했다고. 그 젊은 부부는 서로 의기 투합하여, 미국 생활을 모조리 정리했다고 말했다. 삶의 터전을 아예 중국으로 옮겨버렸다고 했다. 그 이후로 머리가 하얗게, 허리가 굽게되기까지 배고픈 사람들에게 밥을 먹이고,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며 살았다고 했다.


그들은 돈이나 성공, 자유나 독립에는 무관심했다.


나는 그들의 눈동자 안에서 평화와 자긍심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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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철학적인 측면으로 보았을 때, 그들이 나보다 훨씬 진보한 사람들이 아닐까 한다. 7-8년 전 일이었음에도, 나는 그들의 얼굴이 지금도 기억난다. 나보다 훨씬 높은 차원에서 나오는 아우라를 기억한다. 나이가 많았기에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사람들을 기억할 것 같다.




술 마시러가지말고. 노래방 가지말고. 호캉스 가지말고. 맛집 다니지 말고. 데이트 나가지 말고. 클럽 가지 말고.


딱 하루라도 좋다. 완전한 혼자가 되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라.


그걸 정확히 알아야만 어떠한 방향의 삶을 살든, 자기 삶을 합리화하지 않을 수 있다.


성공과 실패, 부와 가난, 자긍심과 후회, 과정과 결과를 떠나서.


자기가 걸어온 삶의 궤적을 스스로 합리화해버리는 인생은 그 끝이 초라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Cold little heart - Michael Kiwanuka

https://www.youtube.com/watch?v=V1aeh3NbM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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