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생활을 한 지 1년 반정도 되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로 4년은 외국에 있었고, 2년은 부산에 있었다.
이제 부산보다 서울이 익숙하다.
서울에 올라와서 몇 명의 여자를 잠깐 만나본 적이 있다.
서로 호감을 지닌 관계에서는, 보통 침대맡에서 속에 있던 진짜 이야기가 나온다. 숨기고 있던 가족사나 과거사에 대해 어느 정도는 솔직하게 말하는 것 같다.
그중 한 여자의 스토리는 이러했다.
원래 서울 태생이 아닌 식구이지만, 빚쟁이들을 피해 온 집안이 서울로 야반도주를 했다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자코 듣기만 했다.
그 여자는 그러한 자기만의 고통을 나름대로 해소하고 있는 듯했다.
여러 남자들을 이용해서.(밤이 되니 전화기가 쉴 새를 못 보이더라.)
일주일도 채 가지 않은 관계였다. 그만 만나자고 했다.
애초에 그 사람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그 느낌을 받아버린 이상, 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정도가 다를지언정, 모두 각자만의 사정이 있다.
그 사정에 대한 고통을 해소하는 것에 있어, '무책임'이나 'disrespect'의 수를 두어서는 스스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남녀관계를 떠나, 모든 사람 대 사람 간의 원리에 있어서 그러하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된 연인을 만나 깊게 오래 만나고 싶다는 것을 전제로 둬보면.
남자건 여자건 주변에 '이성친구'랍시고 교통정리를 안 하는 것 자체가, 상대방을 밥으로 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남자는 한 여자를 내 여자로 두었으면, 보호와 제공(protect & service)의 책임을 다해야 한다. 여자는 한 남자를 내 남자로 두었으면, 책임을 지려는 그의 권한을 인정하고 수긍할 줄 알아야 한다.
쉽게 말해서 남자는 자기 여자가 위험에 처하면 목숨이라도 내던져서 막아야 하는 것이고, 여자는 그런 자기 남자가 커피나 샌드위치가 먹고 싶다 부탁하면 하나 해 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서로 다른 가치관'을 존중해 주자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또는 여성의 위상을 비하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것이 남자건 여자건, 그냥 내 주변에 오지 말길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그것이 악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카르마가 되어 그 사람들에게 되돌아갈 것이다.
남자는 자기 여자를 지키고, 여자는 자기 남자를 지키자는 게 어디가 어떻다는 것인가.
선장에게는 배가 침몰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책임이 있다. 그럼에도 같은 배를 탄 승무원이 자기 멋대로 해버린다면, 배의 안전 운항은 위험에 처한다.
제대로된 선장이면, 그런 승무원은 버려야 한다. 아니면, 아예 선장을 안 하겠다 하던지.
남녀 모두 각자의 책임을 충실히 하지 않는다면, 동급의 남녀만 계속해서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남자고.
성욕 좀 풀겠다고 그런 여자를 만나서 카르마를 훼손시키느니, 혼자 존엄을 지키며 내 전투력을 높이는데 집중하는 것이 전략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렇게 글도 매일 쓸 수 있는 것이고.
심신 단련을 꾸준히 하고.
투자에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계획대로, 나는 점차 강해지고 있다.
이성적 관계를 제외한 나머지 관계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의 돈을 내 돈처럼 아까워할 줄 아는 것. 남의 시간을 내 시간처럼 귀해할 줄 아는 것. 남의 집 자식을 내 집 자식처럼 대할 줄 아는 것. 남의 감정을 내 감정처럼 조심히 다뤄볼 생각을 하는 것.
이 모든 것의 근원은 '책임감'과 'respect'이다.
이것이 결여된 사람은 어딜 가도 푸대접을 받는다. 이것이 결여된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결여된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에 있는데, 주변을 조금만 관찰해 보면 이런 사람은 어딜 가나 존재한다.
자기 자신을 쇄신하는 것도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따라서, 남을 바꾼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저러한 사람은 바뀌어질 수가 없으며, 그냥 버리는 것 이외에는 달리 옵션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리가 나뉘고, 역학적 우위 / 하위 그룹이 탄생하는 것이다.
유유상종은 승리자 그룹을 만들고, 패배자 그룹을 만든다.
어찌 보면 나는 이것이 신이 설계한 일종의 사다리 타기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고, 이 생각은 보다 깊게 확장된다. 보통사람들이 생각하지 않는 지평선 너머까지.
책임감이라는 것은 무한하려면 무한할 수 있는 영역이다.
나는 믿는다. 이 책임감의 사정거리가 길면 길수록, 멋진 사람이 탄생한다는 것을.
자식은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부모의 노후나 건강 위기가 올 것까지 감안하며, 삶을 전쟁같이 사는 것.
부모는 자기 인생뿐만 아니라 자녀의 성장과 미래까지 감안하며, 삶을 빈틈 없이 사는 것.
남자는 자기 여자의 안전과 풍요를 위해, 더럽고 위험한 일터로 나가 몸을 아끼지 않는 것.
여자는 자기 남자의 정신과 회복을 위해, 지조를 지키고 사랑으로 보살피는 것.
각자가 이 역할을 잘하는 공동체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누군가 자기가 지켜야 할 자리를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탈주해 버리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자식은 여행이니 명품이니 자동차니 신축 오피스텔이니 남자니 여자니 술이니 흥청망청 써버리고.
부모는 그저 자식 낳아만 놓고 밥만 먹이면 다 된 건 줄 알고, 지식 & 지혜 전수에서는 손을 놓아버리고. 또는 그러한 모범적인 자세를 보이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예컨대 경제 공부를 한다던지, 인문학 / 철학을 읽는 다던지. 운동으로 몸과 정신을 단련한다던지.)
남자는 자기 편하자고 여자를 일터로 내보내거나.
여자는 남자의 수고를 고마워할 줄도 모르거나.
그러면 유토피아는 없는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미쳐 돌아가더라도, 상황이 아무리 어렵게 돌아가더라도, 우리는 책임감을 무한히 확장시킬 필요가 있다.
그것을 무한히 확장시킬수록, '별나고 피곤한 사람'으로 치부될 것이다. 그만큼 무책임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보통이 되어버린 세상이기 때문이다.(나는 스스로에게 아주 박하고 엄격한 기준을 대며, 남에게는 비교적 높은 기준을 댄다.)
그런 '별나고 피곤한 사람'들이 모인 곳에서 부강한 공동체가 탄생하는 것이며, 이것은 내가 죽기전에 이루고자하는 최종 목표라 할 수 있다.
[007 'No time to die'] James bond's death scene
https://youtube.com/shorts/cQQiXk232rA?si=JGde-IPH1oB7EBB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