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나는 서른이다. 오늘 글은 '서른의 철학'에 관한 이야기이다.
나는 어떤 서른인가. 나는 경제와 철학에 특화된 서른이다. 처음에는 어렴풋한 철학으로 시작했다. 그게 발전하여 경제로 이어졌다. 경제를 아주 깊게 파고들고, 그것에 오랜 시간을 할애하자 많은 경험이 쌓였다. 그 경험들에는 크고 작은 진전과 크고 작은 퇴보가 있다.
그 사이사이에 어렴풋한 철학이 연마되었고, 지금은 날카로운 철학을 가지게 되었다. 지금도, 앞으로도, 계속해서 날이 벼려질 것이다. 나는 단 한 시도 경제 분야에서 물러날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누구나 먹고사는 문제가 있는지라, 모두 경제 분야에서 물러날 수 없다. 다만, 나는 그러한 측면에서 더 적극적으로 물러날 수 없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나에게는 큰 목표가 있다. 그리고 제한 시간을 걸어두었다. 그래서 그렇다.
오스트리아 논리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1차 세계 대전에 자원 입대한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보직에 자원하여, 가장 위험한 위치에서 싸운다. (그는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라, 저럴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극심한 우울증, 죽음에 대한 공포, 자살 충동 등에 시달려왔다. 기록된 일화로는, 총알과 포탄이 빗발치는 곳에서 아무 일도 없는 듯 혼자 멍하니 앉아, 하라는 총질은 안 하고 종이에 연필로 글을 써 내려가는 모습을 동료들이 보았다고 한다.
아마도 죽음이 무엇이고, 거기서 나오는 공포는 또 무엇인지 가장 섬세히 그리고 와닿게 관찰 기록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스스로의 목숨을 담보로.
그렇게 쓰인 글을 모은 것이 '논리철학논고'이다. '비트겐슈타인'의 대표 철학서이다.
그는 기존까지 존재하던 모든 서양의 철학 문제들을 '논고'를 통해 해결하겠다는 목적으로 저것을 집필했다. 주된 접근 방식은, 다음과 같다.
기존의 서양 철학 문제들은 언어를 혼동하거나 문법에 오류가 있어서 발생했다.
그래서 자기가 만들어낸 기호 그리고 다이어그램을 통해서 여러 철학 문제들을 해석한다. 자신이 정리한 기호 언어가 의미가 모호한 문맥을 명쾌히 갈라내게끔 한 것이다. 또는 구두로 전달되는 내용의 의미를, 누가 들어도 같은 의미로 해석할 수 있도록 기호적으로 정리정돈을 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한마디로 '또라이'라는 것이다.(칭찬이다. 나는 이런 철학자들 좋아한다.)
내가 많고 많은 철학자 중에서 '비트겐슈타인'을 데려 온 것에는, 저 전쟁터 일화 때문이다. 내가 이 사람을 철학자로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 보는 이유는 가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짜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평생 겁내하고 고통스러워하던 죽음에 대해, 얼마나 본질을 파고들고 싶었으면 저렇게까지 해봤을까.
그럴만한 깜냥이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니, 그가 위대한 철학자로 남은 것일 테다.
역사적으로 경제는 폭력의 직전단계이다. 그래서 첫째로는 아주 중요한 문제이고, 둘째로는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도 맥을 같이 한다. 그는 전쟁터에서 귓가에 스치는 총알소리를 들으며 죽음과 그것의 느낌, 공포에 관한 글을 썼다.
20대 중반에 한 종목에 전재산을 베팅하고 코로나가 터졌다. 며칠 만에 평가손이 마이너스 30%를 뚫어버렸다. 백만 원대가 아닌, 천만 원대의 손실을 눈으로 봐버린 첫 경험이었다.
투자든 사업이든 사람이 돈을 크게 잃는 상황이 되면, 원시인으로 변한다. 우가우가 원시인들은 쌓아놓은 식량을 강탈당하면, 엄청난 괴로움에 빠진다. 죽고 사는 일과 직결되는 문제이니까. 그것과 똑같다.
액수가 너무 크다 보니, 그런 일을 심하게 겪은 사람은 불현듯 자살을 선택하기도 하는 것이다.
당시의 내 상태를 기억해 보자면, 꼭 말기 암환자가 방사선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식음을 전폐했고, 줄담배를 태웠다. 혼자 벽에 머리를 박고 있기도 했다. 스스로에게 벌을 준다며 혼자서 방바닥에 원산폭격을 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불상사를 실제로 겪어보고 철학이라 할만한 것을 논하는 것과.
남이 쓴 글자 읽고 '그게 그렇다 카더라' 말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차이는 무슨 차이일까.
대단히 어렵고 고상한 내용으로 설명할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단순하다.
직접학습을 한 자는 또 다른 실전에서 도망치지 않게 된다. 불상사가 터지더라도, 전에도 본 적이 있는 일이 되니까.
간접학습을 한 사람은 세상이 무너지는 시그널이 보이면, 십중팔구 줄행랑친다. 직접학습을 한 사람은 세상이 무너지는 시그널이 보이면, 그 자리에서 해야 할 일을 침착하게 한다. 해결을 하던가, 해결이 불가능하면 피해를 최소화시킨다.
나를 보아서도 알겠지만, 후자의 사람들은 전자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는다. 득 될 것이 없기 때문이다. 후자의 사람들은 후자의 사람들끼리 모인다.
내 주변 지인은 모두 나만큼은 위기를 겪어본 사람들이다. 요즘은 그러한 장세를 코인판에서 볼 수 있다. 며칠 전에도 재밌는 일 있었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는 우스갯소리로 그것을 '계엄빔'이라고 부른다.(계엄 Beam)
마른하늘에 계엄령 똥떵어리가 떨어진 그날 저녁 10시 30분경, 국내 거래소 업비트와 빗썸이 마비되었다. 순간적으로 차트는 저세상을 갔다. 이것도 마이너스 30% 언저리로 내려앉았다.
물론 나는 아직 매수해두지는 않은 상태였으나, 계엄령 소식을 듣고는 당연히 그렇게 되었겠거니 하고 있었다. 차라리 돈 투하하기 전에 좋은 실험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국내 거래소의 위기 도래 시 어떤 기능고장들이 있는지 파악하기 시작했다.
돈을 실험 삼아 넣어본 같이 사는 동기는 표정이 썩기는 했으나, 그렇다고 옛날처럼 호들갑 떨고 그런 건 없었다. 추이를 침착하게 지켜보며 매매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지금 나는 현재가 기준, 내가 생각하는 하방 퍼센트에 매수 주문을 점진적으로 다 걸어둔 상태이다.
윤 씨 아저씨가 한번 더 삐껴서 2차 계엄령 지르면, 알아서 체결될 수 있도록.(그렇다고 내가 계엄령 2.0을 바란다는 것이 아니다. 오해 마시라. 체결 안돼도 크게 상관없다.)
나는 지금, 서른의 철학을 더 강인하고 더 단단하게 발전시킬 계획이다. 갈수록 더 골치아픈 일에 도전하고, 일부러 더 하기 싫은 것들을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강제로 트레이닝 시킨 경험이 가장 강력한 철학이 되기 때문이다.
이건 아무래도 미친짓 같고 도저히 너무 버거운데 싶은 곳에 뛰어들어야 겠다는 생각을 항상 지니고 산다.
나는 남자이다. 가까운 미래에 언젠가는 내 아내가 될 여자를 지키고, 내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그 역할을 잘 하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준비되어야 한다.
오늘 글은 이게 끝이다.
이렇듯 철학이라는 것 또한, 자신이 얼마나 진정성있게 임하느냐에따라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할 수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왜 우리가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단지 즐기기 위해서 여기에 있는 것은 아니라는, 그 사실만큼은 확신한다.
'비트겐슈타인' 식 글쓰기
https://youtube.com/shorts/sAcPB1mIRdg?si=tGeUaNmkLicpT9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