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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Unikim Sep 25. 2024

내가 담은 세상들

프랑스 파리-고흐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

나는 여행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짬만 나면 어딘가를 향해 간다. 국내이든 해외이든 자연과 예술과 문화와 마을있는 곳이라면 번쯤 스치게라도 다녀오고 싶다. 2019년 12월 크리스마스 즈음 나는 가족들과 프랑스에 다녀올 기회가 생겼더랬다. 여행 멤버는 모두 6인. 우리는 자유 여행을 선택했고 이틀만 현지 가이드분과 동행하였다.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감명을 받았다. 많은 여행지들 중에 이번에 내가 소개할 곳은 현지 가이드분의 안내로 다녀온 고흐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이다. 이곳은 프랑스 파리 북서쪽 외곽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많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또는 이곳을 거쳐 갔다. 그 많은 예술가들 중에 내게 제일 익숙한 사람 빈센트 반 고흐이다. 이번에 방문한 곳이 바로 빈센트 고흐의 흔적과 유적이 가득한 고흐 마을,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sur-Oise)이다. 빈센트 반 고흐는 많은 작품들을 남긴 채 이곳에서 여생을 마쳤다. 하지만 살아생전에는 그의 작품들이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사후에야 유명세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본디 빈센트 반 고흐는 빈센트 빌럼 반 고흐로 네덜란드의 화가였다. 그는 네덜란드 목사님 부부의 장남이었고 형이 있었으나 일찍 죽어 형의 이름과 같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았다.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20세기 중반이 넘어까지도 병이나 여러 이유로 일찍 죽는 아이들이 많아죽은 아이의 호적을 말소하지 않고 그대로 다음 태어난 아이의 이름으로 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고희도 그러했다. 그는 죽은 형의 이름을 물려받아 평생을 그 이름으로 살았다. 항간에서는 고흐가 죽은 그 형의 이름 때문에 단명을 했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았다. 고흐는 1853년에 네덜란드에서 태어났으며 1890년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 라부 여인숙 다락방에서 삶을 마쳤다. 그의 사인은 권총에 의한 자살이었다. 고흐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의 길을 가고자 하였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 계속 낙방을 하였다. 결국 그는 재능을 찾아 화가가 되었는데 그의 기법이 독특하고 섬세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생존에는 묻혀 있어서 크게 명성을 떨치지 못하고 사후에 유명해졌다. 그런 이유로 그는 한평생 빈곤하였고 정신병의 이력이 마저 있었다. 재능은 있었으나 궁핍하고 고난스러운 시절을 보냈던 그는 결국 삶을 자살로 마무리하여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다. 

지금 보이는 이 사진 속 장소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이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van Gogh)의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 그림은 1890년 6월에 그린 유화이며 파리에서 오르세 미술관에 보관되어져 있다. 교회의 바로 앞에는 고희의 그림을 담은 푯말이 서 있었다. 고흐의 교회 그림과 함께 그림의 대상인 오베르 쉬르 우아즈 교회(성당)를 함께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치 고흐가 된 듯 교회를 바라보게도 되고 오랜 시간을 한결같은 모습으로 보존되어져 있음이 놀랍다는 생각도 들었다. 누구는 교회라 하고 누구는 성당이라고 일컫는 이곳~ 안에도 들어가 보고 그곳에서 기도도 해 보고 싶었는데 들어가 보지 못하고 와서 무척이나 아쉽다.

이 사진은 이유가 있어서 찍은 사진인데 지금은 생각이 나질 않는다. 네이버 렌즈에 넣어 보았는데 같은 사진을 한 장 찾았으나 그곳에도 이 건물의 용도나 이름은 찾지 못하였다.

이곳은 많은 예술 작품들의 대상이고 배경이 되었던 화제의 그 밀밭이다. 고흐의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라는 작품 속 밀밭이 바로 이 밀밭이며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의 배경이 되는 장소이기도 하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은 고흐의 마지막 작품으로 추정되어지고 있다. 고흐는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생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이 작품 외에도 밀밭을 배경으로 그린 그림이 많았다. 그는 이 밀밭을 배경으로 밀밭을 바라보며 밀밭에서 많은 작품 활동들을 했다. '이삭 줍는 여인들'과 '만종"을 그린 밀레를 존경했던 그는 농민들의 삶을 많은 그림으로 담아냈다.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이삭 줍는 여인들'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같은 장소라고 전해 들었는데 와전되어진 것인지 아님 사실인지는 확실치 않다. 푯말에 들어 있는 '까마귀가 나는 밀밭' 작품과 이 그림의 배경이 된 장소를 둘러보는데 마음이 참 이상했다. 그들의 평화로움이 느껴지기도 했고 그들의 고달픔이 느껴지기도 하였으며  고흐의 맑은 날의 슬픔이 느껴지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 마음도 슬프고 안타까워졌다. 예술가의 마을에 들어와 있서인지  감수성이 풍부해져서 더 감정이입이 되어졌다.

위 그리고 아래에 있는 사진들 속 장소가 바로 까마귀 나는 밀밭의 실제 모습이다. 드넓고 고요하고 평화로운 이곳~~ 이날은 또 왜 하늘마저 이리도 신비스러운 건지.... 정말 많은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었다.

우리나라와는 다르게 프랑스에서는 묘지가 마을 중앙에 마치 공원처럼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이 바로 빈센트 반 고흐의 무덤이다.

예술가의 무덤 앞에 서니 마음이 숙연해졌다. 시대가 만들어 낸 화가인가 시대를 잘못 만난 화가인가

그의 위대함을 기리면서도 안타까움에 마음이 먹먹했다.

고흐의 무덤을 들려서 나는 고희의 동상을 만났다. 많이 마르고 키가 큰 고흐, 미술 도구들을 챙겨서 어딘가를 응시하고 있다.

이 동상이 고흐 마을에 있는 고흐의 동상인데 딱 보아도 고달픈 천재 미술가의 포스가 느껴지는 건 고흐의 사연을 알아버린 나의 마음 탓인가?!!

분명 설명을 들으며 이유가 있어서 사진을 찍었을 텐데 이 역시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파리에서부터 담아 온 사진이니까 함께 올려 넣었다.

지금 보이는 이 건물은 오베르 시청인데 이 건물은 예전에도 지금도 시청으로 사용되고 있는 건물이다. 현대 건물이라고 해도 믿어질 만큼 참 멋진 건물이다. 그리고 푯말 속에 들어 있는 시청을 그린 그림도 함께 보았는데 어쩜 이리 멋스럽고 똑같게 그렸는지 너무 신기했다. 지금은 보드 블록이 깔려있는 이곳에 예전에는 밭이었나 보다^^

여기 보이는 이 건물은 라부 여인숙이라고도 하고 라부 호텔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고흐가 죽기 전 머물던 바로 그곳이다. 고흐는 이곳 3층 다락방에 머물렀다.  고흐가 지내던 다락방은 지금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하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그 안에 까지는 들어가 보지 못했다. 안에 들어가면 고흐가 자살했을 때의 방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그가 쓰던 철 프레임의 침대 그리고 의자 등 보가에도 안쓰러운 작업 환경을 그대로 볼 수가 있다고 들었다. 현재 1층은 식당, 2층은 반 고흐 박물관으로 사용되어지고 있고 3층은 그대로 고흐의 방으로 남겨져 있는데 고흐는 바로 이 다락방 침대에서 총으로 삶을 마감하였다. 안타까움에 맘이 아프다. 지금은 인상파의 거두로 유명한 그가 너무나 쓸쓸한 최후를 맞이하지 않았는가 사랑하는 여인도 있던 그가 왜 그런 선택을 하였을까 그의 죽음은 자살이 맞는 걸까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의 음모가 있었던 건 아닌 건지.... 여러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치운다. 고흐는 이곳에서 친구인 화가 고갱과 함께 생활하며 지내기도 하였는데 그와 헤어지면서 자신의 귀에 상처를 내는 아픔도 있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자신의 초상화를 무수히 많이 그렸고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학습하고 예술을 완성하고 하였는데 그의 예술적 큰 뜻도 있었겠지만 모델을 구할 재력이 없어서 자신을 모델로 학습을 했을 것이라고도 한다. 

이곳은 도비니의 정원이다.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는 자연주의 화가로  당대에 굉장히 유명한 미술가였다. 반면에 고흐는 생전에 무명 미술가였지만, 현재의 인상파 거두로 도비드보다 명성이 높다. 도비니의 정원은 너무 아름다운 곳으로 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을 찾았다. 고흐도 종종 도비니의 정원을 그렸다. 도비니와 고흐 이 두 사람은 분명 대단한 미술가들이다. 이들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한 간에 돌았다. 두 화가가 세상을 떠난 후에 두 화가의 미술관이 각각 열렸는데 도비니의 미술관은 찾는 이가 많지 않았고 고흐의 미술관은 많은 인파로 빼곡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흐는 외지인이었으므로 작품은 감탄을 하며 좋아하였으나 고흐를 좋아한 것은 아니어서 그의 작품을 사랑하던 사람들조차도 도비니를 더 좋아했다. 우리나라의 지역감정이 그곳에도 있었던 것인가? 아니 고흐는 본디 네덜란드 출신이니 어쩜 자국민을 더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 시대는 보수적인 시대가 아닌가 당연히 프랑스 사람인 도비니가 더 사랑을 받았을 거 같다. 도비니의 동상은 마을의 중심인 성당 근처에 세워져 있고 고흐의 동상은 놀이터 한쪽에 세워져 있다. 그만큼 외지인에 대한 시선이 곱지 않았던 것이다. 현시대도 아닌 그 시대의 고흐의 타지 삶은 참으로 뼈 시리게 아팠으리라. 그래서 고흐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닐 거 같다. 사실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극단적인 이야기들이 많다. 그의 뛰어난 작품들을 보고 시기한 이들이 만들어 놓은 이야기들이거나 극적인 그의 스토리가 필요한 세력의 여담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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