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고의 지평

단청, 그 빛에 스민 이야기

by Unikim

단청, 그 빛에 스민 이야기


남한산성에서 저녁 시간을 보내며 행궁 앞 공원을 산책했다. 종각 앞에 이르렀을 때 그동안 스쳐 지나가며 보지 못했던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하나의 진실이 마음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건 바로 우리 건축양식 속에 담긴 아름다운 비밀이었다.
조상들은 건축을 지을 때 단순히 집을 세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뜻과 마음을 담을지 고민하며 창조해냈다.

우리 전통 건축물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 속에 신비로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땅에서 자라난 나무, 그 위에 펼쳐진 잎과 꽃, 그리고 열매.

단청의 무늬는 이 생명의 순환을 고스란히 품고 있었다.

화려한 채색은 청아하고 단아했으며, 그 속에는 곱고 맑은 생명이 빛나고 있었다.
마치 천 가지 만 가지 약초가 어우러진 집약체, 아니 자연의 정수를 모아 놓은 한 송이 꽃 같다고 해야 할까.

오늘, 우리는 종각의 단청을 올려다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전통의 색과 무늬는 장식을 뛰어 넘어 땅과 하늘, 사람과 자연을 잇는 기원의 언어라는 것을.




눈을 들어 처마 밑을 바라보면 나무 위에 얹힌 수많은 빛깔이 숨을 쉰다. 붉은 기둥과 푸른 들보 그 위를 타고 흐르는 곡선과 꽃문양은 한 그루 나무가 땅에서 오랜 세월을 견디고 장인의 손길을 거쳐 하늘과 맞닿는 기둥이 되기까지의 이야기다.

단청의 붉음은 흙의 온기에서 왔고 푸름은 숲의 깊이에서 빚어졌다. 그 위에 새겨진 무늬에는 땅과 나무와 잎과 꽃과 열매가 차례로 피어난다. 뿌리에서 시작된 생명의 여정이 나무를 타고 올라 하늘로 뻗어나가듯 색채와 문양도 기둥을 타고 하늘에 닿는다.

이 빛과 무늬는 조상들의 기원이자 바람이었다. 마을이 평안하기를, 세대가 이어지기를, 사람들의 마음이 곧기를. 단청은 시간의 기록이자 정신의 표상이며, 그 속에는 계절의 숨결과 사람들의 이야기가 고스란히 깃들어 있다.

오늘 우리는 이 건축 아래를 지나며 잠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손에 닿지 않는 곳에 피어난 색채를 올려다보는 순간 과거와 현재 그리고 기원이 한 줄의 무늬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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