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의 봄
1945년 8월 15일 아침, 하늘은 유난히 눈부시게 맑았다.
명월관 마당에는 이른 햇살이 번져 있었다. 바람마저 설레는 듯 흔들거렸다. 그날의 공기 속에는 평소와는 다른 묘한 긴장이 감돌았다. 거리는 정적에 싸였고 사람들 사이에는 알 수 없는 소문이 흘러 다녔다. 사람들은 서로 눈을 마주치며 수군거렸다.
"오늘 무슨 발표가 있다더라." "중일 전쟁이 끝난다 카더만."
이리 소문만 흘러 다녔을 뿐 아무도 그날의 벌어질 일들을 확실히는 알지 못했다.
“오늘 정오라던데?”
"맞다. 정오에 뭔가 발표된다 카더만."
"이자 우리 독립되는기가?"
"저 놈들이 더 극악한 발표를 하면 우이하노?"
"아이다. 이젠 물러갈 끼다."
"맞다. 뭔 힘이 있겠노? 전쟁에 진 패전국 아이가?"
장터에서도, 부두에서도, 사람들의 입술 끝마다 그 말들이 맴돌았다. 전쟁이 끝났다, 일본이 중일 전쟁에서 졌다, 드디어 해방이다는 말들이 바람결처럼 흘러 다녔다.
명월관 안도 마찬가지였다. 넓은 마루에 나무 의자가 다닥다닥 놓이고 사람들은 웅성대며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정오가 다가오자 기생이며 손님이며 주방에서 일하던 이들까지 모두 라디오가 있는 방으로 모여들었다. 먹을 것도 손에 잡히지 않았고 술잔도 그대로 식어갔다. 라디오는 아직 꺼져 있었지만 그 앞은 이미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운 법정 같았다. 누군가는 손끝으로 부채만 만지작거렸고 누군가는 입술을 앙다물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 순간만큼은 누구도 계급도 신분도 없었다. 모두 같은 마음으로 대한 독립을 염원했다.
정오가 다 되어갈수록 작은 기계 앞에서 수십 쌍의 눈이 반짝였고 침 삼키는 소리조차 크게 들릴 만큼 팽팽한 정적이 흘렀다.
드디어 정오. 라디오에서 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낯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일본 천황의 옥음방송. 사람들은 긴장된 눈빛으로 귀를 기울였으나 어려운 일본어와 고어투라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이어질 뿐이었다. 잡음 섞인 소리 끝에 흘러나온 일본 천황의 목소리는 길고 어지러운 말들이 이어졌다. 잘 알아듣기 쉽지 않았지만 그 속뜻을 읽어낸 이들의 표정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그리고 이내 누군가가 낮게 외쳤다.
“졌다. 졌... 졌다. 일본이 항복했단다!”
순식간에 사람들의 표정이 바뀌고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 말은 불씨처럼 퍼졌다. 삽시간에 누군가는 눈물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두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대한독립 만세!" 울부짖는 소리가 명월관 마루를 울렸다. 어떤 이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흐느꼈고 어떤 이는 서로 부둥켜안고 웃음을 터뜨렸다. 억눌려왔던 수십 년의 한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그날의 함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았다. “대한독립 만세!” 울음 섞인 만세 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감격의 순간에 소율은 춘식의 작은 손을 붙들었다. 손끝이 떨리고 목소리마저 울음으로 갈라졌다.
“춘식아, 너 이제 살았다...”
“미안하다. 춘식아. 미안하다.”
그녀는 몇 번이고 미안하다는 말을 되뇌었다. 아이의 눈앞에 드리워졌던 굶주림과 전쟁의 그림자, 언제 끌려갈지 모른다는 두려움. 그 모든 것들이 오늘부로 끝났다는 안도감이었다. 그리고 더 깊숙한 곳엔 부모 잃고 떠돌던 춘식을 온전히 품지 못했던 자책이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아직 어린 춘식은 소율의 말들이 담은 그 의미와 사연을 다 알 수는 없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어른들이 울고 웃으며 외치는 만세가 어떤 의미인지는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자유를 사랑하는 아이였다. 일제 강점기에 아버지를 잃고 삼촌을 잃고 엄마를 잃은 아이. 집을 잃고 거리의 내몰린 아이였다. 눈물로 깜깜한 산을 넘어야 했던 아이였다. 사랑의 둥지를 잃고 눈치로 세상을 배워야 했던 아이였다. 굶지 않으려면 살아남으려면 똑똑해져야 했던 아이였다. 그런 그에게 광복이란 너무나 특별한 의미였다. 춘식은 비록 일본 천황의 말을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독립’이라는 말에 기뻤고 또 슬펐다. 해방이 되었기에 기뻤고 이 기쁜 날에 그 기쁨을 당연히 함께 나누어야 하는 그의 가족들이 없음에 서글프고 슬펐다. 그들이 몹시도 그리웠다.
복잡한 마음을 아이는 투명하게 드러 냈다.
“이젠 우리나라 땅은 우리 꺼지요? 땅이 우리에게 돌아왔으니까 하늘나라 간 우리 가족들도 모두 돌아오는 것이지요? 이젠 다 만날 수 있는 거지요?"
그 말에 소율은 울컥 울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울먹이며 호소하는 춘식을 꼭 안아 주었다.
"춘식아~ 우리 땅을 찾았으니 이젠 하늘나라 간 분들도 기뻐하실 거야. 비록 지금 만날 수는 없어도 늘 춘식이와 함께 하실 꺼란다."
"보고 싶어요. 아부지도 삼춘도 별이도 어무이도..."
춘식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소율은 춘식을 토닥여 주었다.
잠시 후 춘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안 굶어도 돼요? 일본말 안 배워도 되지요? 춘식이 이름은 계속 춘식이인 것이지요? 일본 사람들도 무서운 일본 순사들도 다 일본으로 돌아가는 거지요?”
"그럼. 춘식이는 춘식이고 우리는 우리말만 하면 되고 잘 먹고 잘 살면 되는 것이지."
"잘 먹고 잘 살기.... 좋아요.
만세. 만세. 만세. 우리나라 만세."
춘식은 금세 평범한 아이의 모습을 되찾았다.
"만세 만세 만만세. 만세만세 만만세. 대한 독립 만세"
만철도 함께 만세를 외쳤다.
그녀는 춘식과 만철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 우리 춘식이도 만철이도 만세다. 만세만세 만만세. 우리 모두 만만세다”
그날 오후 명월관 안에서 터져 나온 함성은 문을 넘어 거리로도 번져갔다. 집집마다 숨어 있던 태극기가 쏟아져 나왔고 흰 옷 입은 사람들은 물결처럼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대한독립 만세!”
누군가는 목청이 찢어져라 외쳤고 누군가는 눈물을 훔치며 하늘을 향해 깃발을 흔들었다. 함성은 강물처럼 모여들어 도시를 뒤덮었다. 그 함성은 부산항에서부터 영도다리 위로 초량 골목과 부산진 장터로까지 울려 퍼졌다. 함성은 강물처럼 모여 그렇게 도시 전체를 휘감았다.
그 함성에 명월관의 기와지붕 위로는 새들이 놀라 날아올랐고. 날아 오른 새들은.... 그들도 입을 모아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이 날을 축복하고 있던 하늘은 끝없이 맑게 펼쳐졌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의 땅은 이렇듯 눈물과 환희로 진동했고 아이 춘식의 가슴에도 그날의 기쁨은 평생 잊히지 않을 울림으로 새겨졌다.
두 달 전....
순이는 방직공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출근을 한 것이었다.
겉으로는 일터에 나서는 여인네였지만 그녀는 중요한 임무를 가지고 이곳에 잠입했다. 그러나 그 뜻을 세우기도 전에 그곳의 현실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고통으로 이어졌다. 출퇴근을 하던 순이는 더는 퇴근을 밖으로 할 수 없도록 감금되어지고 말았다. 공장 사람 그 누구도 밖으로 나갈 수 없도록 철문이 잠가지고 그 위로 쇠사슬로 감겨졌다. 순간 순이는 춘식이를 떠 올렸다.
'집에 가야 해. 우리 춘식이에게 가야 해.'
순이는 손을 높게 들었다.
"저.... 오늘 일을 다 마쳤습니다. 문을 열어 주십시오. 집에 가야 합니다."
"불가하다. 오늘부터 여러분들은 큰 임무를 갖는다. 대일본제국을 위해 나라의 큰 일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 모두 더욱 일에 몰두하도록.... 이 시간부로 아무도 밖으로 나갈 수 없다."
"우린 가족에게 가야 합니다. 내 보내 주십시오."
"불가하다. 더는 질문도 건의 사항도 듣지 않는다. 항명의 결과는 죽음뿐이다. 모두 위치로~~"
중일전쟁 막바지... 일본은 더 많은 군수물자를 쏟아내기 위해 공장의 문을 잠가버렸다. 여인들은 안에서 갇혀 밤낮의 구분조차 잊은 채 방직기를 돌려야 했다. 낮이면 땀에 절어 쓰러지고 밤이면 채찍과 고함소리에 억지로 몸을 일으켜 세워야 했다. 공장의 좁은 창문 너머 하늘은 늘 자물쇠로 가려진 듯 아득했고 기계의 요란한 굉음만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숨이 막히는 노동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둘 쓰러졌다. 탈진으로 굶주림으로 혹은 병으로.... 누군가는 눈을 감은 채 다시 일어나지 못했고, 누군가는 기계에 손가락을 잃어도 휴식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피와 땀이 섞인 천조각은 전쟁터로 결국 일본의 재물로 바쳐졌다. 여인들의 젊음과 생명까지 송두리째 갈아 넣은 대가였다.
순이 역시 무릎이 퉁퉁 붓고 손바닥은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왔지만 이를 악물고 방직기를 돌렸다. 억눌린 숨결 속에서도 그녀는 속으로 되뇌었다.
'이 역시 지나가리라. 이게 다 지나가고 나면 우리한테도 빛이 올 게야.'
그러나 그 빛은 언제 올지 알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여인들은 그 안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어가고 있었다. 순이는 새벽마다 뿌연 먼지와 석유 냄새에 목이 막히는 공장 안에서 눈을 크게 뜨고 살았다. 배고픔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건 끝없이 이어지는 방적기의 굉음이었고 옆자리에서 쓰러지는 동무들의 신음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이곳에서 짜내는 하얀 거즈와 회색 천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 길목을 밝혀야 했기 때문이다. 동무들의 이름을 잃어버린 청춘을 종이에 적어 밖으로 전해야 한다는 사명이 그녀를 버티게 했다.
하지만 일은 점점 더 잔혹해졌다. 새벽부터 해질 때까지 팔과 어깨는 굳어 갔고, 손바닥의 살은 갈라져 피가 배어 나와도 잠시의 손 닦음도 허락되지 않았다. 기계 사이사이에서 숨이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는 열악한 환기 속에서 폐가 망가져 자리에 눕더니 다음 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누군가는 밤새 이어지는 채찍 같은 독촉에 정신이 무너지기도 했다. 이름 없는 여인들이 하나둘 자취를 지워갔고 그들의 자리에는 또 다른 손이 끼워졌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그녀에게 주어진 임무들은 모두 더욱 절박해졌다. 동포들의 이름을 지켜내는 일이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이 방직 공장 관리자의 서류 속엔 ‘입소일, 출신지, 배정 조’가 적힌 명부가 빽빽이 들어 있었다. 순이는 틈만 나면 그 종이를 훔쳐 적었다. 창원 출신의 스무 살 여인, 진주에서 끌려온 열여덟 소녀.....
“내 이름을 적어가 주세요. 만약 내가 이곳을 못 나가게 되거든 가족들에게 꼭 알려줘요.”
숨죽여 속삭이던 동무의 부탁은 순이의 가슴을 찔렀다. 그 밤, 그녀의 주머니 속 종이는 이름들로 무거워졌다.
순이는 눈을 크게 뜨고 보았다. 부지런히 움직이며 정보들을 찾아다녔다. 어떤 탁자 서랍 속엔 명단 몇 장이 접혀 있었다. 관리자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순이는 손끝으로 그 서랍을 더듬어 명부 하나를 꺼내어 보고 다시 그것을 그 자리에 끼워 넣었다. 종이엔 이름과 출신, 언제 들어왔는지 그리고 배정된 작업 구역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김○순, 22세, 창원 출신, 6월 2일 입소, 방적 3조’ 같은, 기록으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사람으로서는 모든 것이었던 목록들.
다음 날 순이는 그 종이를 살짝 서랍에서 꺼내어 속옷깃 속에 숨겼다.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와 밤중에 몰래 꺼내 적고 또 적었다. 그러고는 다음 날이면 그 종이를 서랍에 살짝 가져다 놓았다. 그렇게 그녀는 그녀의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해 나갔다.
또 그녀가 맡은 또 다른 임무는 꽤 어렵고 복잡했다.
그러나 순이는 집중하여 방법을 모색했다. 기계에서 나온 천 조각을 추적하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있었다. 포대 자루에 쓰이는 두꺼운 회색 직물은 철도로 모여 항구 창고로 실려나갔다. 텐트용 방수천은 본사 트럭에 실려 일본군 보급부로 직행했다. 순이는 낮 동안 천을 자르고 꿰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지도를 그렸다. 이 길이 차단되면 어느 정도의 물량이 전선에 도달하지 못하게 할 수 있는지 어느 물류 창고를 주시해야 하는지.....
그 계산이 그녀를 살게 했다.
군복지, 텐트용 천, 포대자루… 실타래가 어떤 길을 거쳐 어디로 실려 나가는지 트럭이 향하는 항구와 창고는 어디인지 그녀는 매 순간 머릿속에 지도를 그렸다. 이 기록은 언젠가 일본의 전쟁 기계를 멈추게 할 증거가 될 터였다.
방직 공장 안의 최악은 사람에 대한 태도였다. 공장장과 감독들은 여인들을 물건처럼 다루었다. 이름을 부르지 않고, ‘조’와 ‘호’와 ‘번호’로만 불렀다. 쉬는 시간도 사람답게 숨 쉴 시간도 없었다. 어떤 날에는 밤늦게까지 불빛이 꺼지지 않았고 누군가가 기절해 쓰러져도 구호는 오지 않았다.
“더 돌려라, 더”
라는 소리가 기계 소리와 섞여 사람의 목소리를 삼켰다.
순이는 가끔 숨을 멈추고 옆에서 숨을 제대로 못 쉬는 이들의 어깨를 보았다. 한 여인은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그 목소리는 떨렸으며 다급했다. 순이는 주머니 속 종이에 그 이름을 적었다.
'박○희, 18세, 진주'
"내 이름을 적어 주세요. 꼭 내 가족에게 이 편지를 전해 주세요."
그렇게 또 한 장 또 한 장.
이름은 쌓였고 종이는 무거워졌다.
순이는 공장 건물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힘겹게 만들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알아둔 건물 내부도 덕분이었다. 건물을 나가는 길을 만드는 것은 오롯이 순이의 몫이었다. 하지만 순이는 이 일을 해 내었고 어렵게 건물을 빠져나간 순이는 그 무거운 종이를 들고 숨어 걸었다. 공장 뒷담을 돌아 외곽 방향으로 가면 바깥으로 나갈 수 있는 암문이 있었다. 암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정보를 밖으로 내보낼 수 있게 설강회에서 문 아래 바닥을 파 돌로 가려 놓았다. 하지만 그 구명이 너무 작고 감시자들의 감시로 탈출까지는 무리가 있었다. 한 번은 감시가 심해 잡힐 뻔했고 한 번은 같은 조에 있던 동무가 관리에게 끌려 사라지는 것을 목격했다. 목마름과 배고픔 그리고 구두 밑창에 어는 물집이 그녀를 아프게 몰아붙였지만 이름 하나를 더 확보할 때마다 그녀의 어깨는 조금 더 단단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순이는 여느 때처럼 정보를 밖으로 내 보내려 접선 장소를 향해 나갔다. 그런데 그녀가 힘들게 만든 비밀 통로가 봉쇄되어 있었다. 그녀는 일본 감시자들의 눈을 피해 자연스럽게 그녀의 자리로 되돌아갔다. 망막했다. 하지만 순이는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하루가 저물어도 공장은 어두워지지 않았다. 램프 불빛 아래서 순이는 기계 앞에 앉아 실을 잇는 척했으나 머릿속은 온통 바깥을 향해 있었다. 바람 한번 쐬지 못한 이들의 억울함, 지워진 이름을 다시 불러줄 날. 언젠가 광장의 태극기 아래에서 이 기록들이 누군가의 목숨과 존엄을 되살릴 것임을 꿈꾸며 그녀는 다시 실을 잡았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순이의 눈빛은 꺼지지 않았다. 비록 몸은 일본의 기계 속에 갇혀 있었으나 마음은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다짐했다. 반드시 살아남아 오늘 모은 이름과 사실들을 세상 밖으로 전하리라고. 그러고는 아들의 옆으로 돌아가리라는. 그것이 이 참혹한 시간 속에서 그녀가 숨 쉴 수 있는 이유였다.
그날 밤, 순이는 또 하나의 사실을 알아냈다. 공장 관리자 서류 더미에서 어느 항구로 출하 명령서가 작성돼 있는 것을 보았다.
‘제출처: ○○창고(부산항 구역), 품목: 군복지, 텐트 500벌, 포대자루 2000장’
손글씨로 적힌 숫자는 그녀의 심장을 얼어붙게 했다. 이 기록은 단순한 통계가 아니었다. 그것은 누군가의 몸을 보호해야 할 천이 전쟁 기계로 흘러가는 증거였다.
이 모든 것을 밖으로 빼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순이는 밤이 다 가도록 공장 모퉁이에 앉아 손에 쥔 종이를 펴 보았다. 사람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름을 써 준 그 이의 창백한 얼굴과 손등에 새까맣게 피멍이 든 노인의 손. 이들을 기억해 줄 사람, 이 기록을 바깥에 간절히 전달하고 싶은 그녀였다.
그녀는 작은 창너머로 하늘을 보며 다짐했다. 이곳에서 얻은 사실을 가지고 스스로가 살아남아 그것을 전할 것이라고. 그 작은 종이 더미가 언젠가 누군가의 억울함을 세상에 드러낼 힘이 되어 주리라 믿었다.
공장의 문은 닫혀 있었지만 순이의 마음은 밖을 향해 열려 있었다. 고단함과 모멸 속에서도 그녀의 걸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이 고단한 시간이 지나간 뒤 누군가는 이 천을 손에 쥔 채 무너질 것이고 누군가는 그 이름들을 불러줄 것이었다. 그날을 떠올리며 순이는 다시 방직기 앞으로 돌아갔다.
순이가 감금된 방직공장은 어느 날 불길한 소문으로 술렁였다. 전쟁의 기울기가 뚜렷해지자 일본은 군수 공장과 흔적을 지우기 위해 불을 지른다는 말이 돌았다.
“사람이든 뭐든 다 태워 없애야 한다”
는 잔혹한 말.
'소문은 소문일 뿐일 거야. 설마 사람을 가둬 놓고 설마.... 그건 학살이지.'
시장에 다녀오던 은실은 혼자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때그때.
은실은 우연히 남편 쇼오타와 그의 일본인 관리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말았다.
"김윤석의 처도 그곳에 있습니다."
"김윤석의 처라 순이....."
"어찌합니까?"
"어찌하다니?"
"함께 죽입니까?"
“지금까지 내가 한 얘기를 어떻게 들은 건가. 사람이든 뭐든 다 태워 없애라. 흔적도 없이 정리되어야 한다. 알겠나? 어떠한 실수도 용납되지 않는다.”
은실의 심장은 얼어붙었다. 순이가 그 안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또 소문이 소문만인 게 아닌 사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몹시 놀라고 괴로웠다. 그녀는 그날 밤, 목숨을 걸고 무릎 꿇었다.
"사람들은 풀어 주세요."
"무슨 얘기를 하는 건간?"
"저... 방직공장...."
"들은 건가?"
“쇼오타님 제발 부탁입니다. 그 안에 있는 사람즐은 풀어 주세요"
"불가하다. 아이들을 생각해서라도 대일본제국의 한 사림으로써 나라를 위해 침묵하시오."
"그럼 그 분만이라도 살려주세요. 급 분은 제게 친정 식구입니다.”
평소라면 결코 고개 숙이지 않았을 은실이었지만 이번만은 달랐다. 그녀의 눈빛은 절박했고 그녀의 울음 섞인 호소는 쇼오타의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순이는 다른 방직공장으로 옮겨졌다. 그녀는 영문도 모른 채 새로운 방직공장에서의 삶을 시작해야만 했다. 그곳은 군용 직물이 아닌 일본인 부유층의 옷감을 생산하는 곳이었다. 감금은 계속되었으나 불에 타 죽을 위협에서 벗어난 순이였다. 순이는 새로운 그곳을 또다시 파악하기 시작했다.
순이는 그 공장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쇠사슬 같은 시간이 끊어지던 순간, 그녀는 땅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해방의 기쁨은 순이에게 몸과 마음에 자유를 주었다. 하지만 방직공장안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에 대한 미안함에 그녀는 그만 그 자리에 엎드려 울분을 터뜨리고 말았다. 살고 싶었고 살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방직 공장 안에서 비참하게 세상을 뜬 이들에게 끝내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몹시 슬펐다.
게다가 동시에 또 다른 슬픈 이별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건 바로.....
꾸준히 순이를 돕고 지켜준 은실을 잃게 되는 일이었다.
조선의 해방으로 은실은 쇼오타와 그녀의 아이들을 따라 일본으로 들어가야 했다. 떠나기 전 방직공장 앞에서 순이를 만난 은실은 순이의 손을 꼭 붙잡았다.
“아씨.... 이렇게 살아줘서 고마워요. 아씨가 이리 풀려 나신 것을 보아 다행입니다. 이젠 맘 편히 떠날 수 있겠어요. 아씨가 전해 달라진 종이들은 무사히 그분들께 전달했습니다.”
"고맙다. 네가 이 나라와 나의 동무들을 위해 큰 일을 해 주었구나!!!"
"아여요. 아씨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뻐요."
"고마워. 은실아~ 네가 매번 내게 건네어준 은혜는 결코 잊지 않을게. 가서 잘 살고."
"예, 아씨 내내 건강하셔요."
그리 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 그녀들이었다. 그러나 운명은 너무나 잔혹했다. 그녀의 나라를 떠나려니 발길이 무거웠던 은실은 결국 일본 땅을 밟지 못했다. 순이와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낯선 일본 살수였다. 쇼오타의 일본 아내의 증오와 질투가 칼이 되어 은실의 목숨을 앗아간 걸까 아님 말없이 조용히 독립운동을 돌아온 것에 대한 일본의 처형이었을까 순이를 만나고 채 20걸음도 옮기지 못한 은실은 낯선 살수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총소리를 들은 순이는 뒤를 돌아보았고 총에 맞은 은실이 쓰러졌다. 그 모습을 본 순이는 그녀에게 달려갔지만 그녀의 죽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은실은 피를 쏟으며 바닥에 쓰러졌고 순이는 피범벅이 된 은실을 끌어안았다.
"아씨... 아씨가 내 아씨여서 좋았어요.
조선 땅 떠나기 싫었는데 잘 되었어요. 지는 꼭 조선에 묻히고 싶었지예."
"암. 넌 이 나라의 딸이니 여서 살아야지. 조금만 힘내자."
"예. 아씨 자주 보며 여서 사렵니다."
"그래. 자주 볼 수 있게 나란히 아웃도어 살자."
"예. 아.... 씨...."
"은실아.... 은실아..... 안 된다. 이리 가면 안 된다."
"아... 아씨.... 다 하늘의 뜻이어라. 지는 이 나라 사람이니 이 나라에 있어야지요."
"그럼..... 이 나라에 있어야지. 조금만 조금만 참아. 의원에게 가자. 이 나라에 살아서 살아야지. 이제야 해방이 되었는데 살아서 좋은 세상에서도 살아 봐야지."
"아씨~ 아씨는 좋은 세상에서 부디 행복하셔요."
순이는 의원을 불러 달라며 울부짖었다.
하지만 의원은 끝내 오지 못했고 이내 은실은 숨을 거두었다. 순이는 은실을 흔들며 불렀다 하지만 그녀는 말이 없었다.
"은실아~ 은실아~"
순이는 울고 또 울었다. 그때 무진과 그의 일행들이 순이에게 다가왔다.
"그만... 이제 그만 그녀를 보내야 한다. 순이야."
"그래요. 순이 씨. 은실 씨를 함께 보내 드려요."
"저분이 없었다면 방직공장이 태워질 때 그 많은 목숨을 살릴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 모두 애도의 마음을 담아 은실님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한참을 울던 순이는 마음을 가다듬고 의광회 사람들과 함께 은실의 장례를 시작했다. 은실의 시신은 양지바른 곳에 묻햤다. 차가운 흙 속에 은실을 눕히고 떨리는 손으로 흙을 덮던 순이는 한번 더 오열을 했다. 한참을 울던 순이는 마음을 가다듬고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은실아~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잊지 않을게. 네가 지켜낸 목숨, 헛되지 않게 할게. 고맙다. 고단했던 삶은 여기에 두고 그곳에선 부디 편안하렴”
눈물은 끝없이 쏟아졌고 흙 위에 맺힌 눈물방울은 마치 은실의 마지막 눈빛 같았다.
그렇게 은실을 보낸 순이는 무너져 내린 가슴을 부여잡고 길을 나섰다. 이제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춘식, 그리고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로. 은실이 바친 희생과 해방의 무게를 등에 짊어진 채로 순이는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