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 봄이 오기까지
일본이 전쟁의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그들은 자신들의 죄악을 감추기 위해 모든 흔적을 지우려 했다. 방직공장과 무기 제조 시설은 그들의 타깃이었고 순이가 머물던 공장도 예외는 아니었다. 하지만 순이는 몰래 정보를 빼돌려 독립군에게 전달했고 공장 안 사람들의 움직임과 위험을 세밀히 보고했다. 비록 나중에 순이는 다른 방직 공장으로 옮겨졌지만 감금되어진 그 상황 속에서도 그녀의 활동은 계속되었다.
결정적인 순간, 독립군의 활동과 은실의 도움으로 공장 안 사람들은 모두 탈출에 성공했다. 순이는 옮겨진 방직 공장에서 해방을 맞이해 풀려 났다. 하지만 광복을 맞이하던 그 순간 그녀는 은실이 총을 맞아 쓰러지는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순이는 독립군과 함께 은실의 시신을 조심스레 수습하고 장례를 치렀다. 그 이후에는 이전에 부탁받았던 방직공장에서 세상을 떠난 동료들의 편지와 유품들을 독립군과 함께 나누어 각 가정으로 전달했다. 순이는 독립군과 함께 한 사람씩 가정을 찾아 전달하며, 작은 메시지들이 다시 삶으로 이어지길 바랐다. 그렇게 동료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고향으로 향하는 길 위에 놓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순이도 마침내, 어릴 적 기억이 깃든 고향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폭음과 연기로 뒤덮인 세상 속에서도, 삶은 이렇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이어졌다.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 순이는 걸음을 늦추며 기억을 곱씹었다. 폭음과 연기로 가득했던 날들, 은실의 웃음과 마지막 눈빛, 함께했던 동료들의 숨결까지. 동네에 다다른 순간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골목과 나지막한 지붕들이 마음을 눌러주었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이렇게도 기쁘면서도 쓰라렸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과 폭력의 그림자 속에서도 누군가는 살아남아 기억을 지키고 사랑을 전달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순이는 그 길 위에서 은실과 동료들을 마음속으로 안은 채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다시 세상과 마주했다.
순이는 오랜 시간의 고단한 굴레에서 풀려나 마침내 춘식이 있는 윤석의 본가로 돌아왔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집, 그리워하던 얼굴들을 다시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그녀의 가슴을 벅차게 했다.
대문 앞에 서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긋한 감나무 냄새, 그리고 오래된 기왓장의 기운까지 그녀의 마음을 울렸다.
“춘식아~ 춘식아~”
조심스레 대문을 열고 들어갔으나 마당은 고요했다. 아이의 웃음소리도 장난스런 발자국도 들리지 않았다. 순이는 방으로 뒤뜰로 골목 끝까지 부르며 춘식을 찾았다.
하지만 춘식은 없었다.
춘식을 찾아 헤매는 순이를 본 주변의 이웃들이 순이를 잡았다. 그러고는 말을 전했다 그들이 전해준 말은 가히 충격이었다.
며칠 전, 집안의 할아버지가 춘식을 내쫓았다는 것이다.
“춘식이 그 댁 할아버지 손에 의해 쫓겨났소.”
혹 자는 더는 굶주린 아이를 감당할 수 없다고 했다 하고 혹 누군가는 불쌍한 아이가 집안의 화를 불러올까 두려워하며 내몰았다고 했다.
순이의 손끝이 떨렸다.
“어디로 갔다는 겁니까... 우리 춘식이가 어디로 갔다는 겁니까.....”
"춘식아~ 춘식아~"
텅 빈 마당에 울려 퍼지는 목소리.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날 밤, 순이는 불 꺼진 방 안에서 홀로 앉아 눈을 감았다. 아이를 찾아 헤매는 마음과 이미 사라져 버린 발자취의 허망함이 그녀의 가슴을 가득 채웠다.
다음날 아침 이웃 마을 잔치에 다녀온 할아버지와 가족들이 집에 들어섰다.
순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우리 춘식이 어디 있습니꺼?"
"가는 와 찾노?"
"우리 아 어디 있습니꺼?"
"도망가뿔었다. 집 나간 아를 와 이제사 찾노?"
"지금 뭐라 합니꺼? 도망을 가요? 우리 춘식이가?"
"맞다. 지 애미 찾는다꼬 집을 나갔다. 이 말이다."
순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가 금가락지들 잔뜩 맡겼잖습니까? 시대가 어수선해서 혹시 몰라서 지한테 변고 생겨도 아 좀 잘 거둬 달라꼬 모아둔 금가락지를 한 주먹이나 드렸지예."
"모....모락하노."
"아닙니꺼? 그래도 피붙이라면서요. 구박을 했어도 핏줄이라면서요? 걱정 말라면서요?"
"지가 지발로 나간 아를 우짜락 하노?"
"그만 하이소..."
"뭘 그만 하락하는데?"
"미안차. 순이야. 춘식 애미야 미안타. 내가 외할매 찾아가라 했다. 그리 안 갔겠노?"
"그 어린것이 거가 어디라고 찾아 간단 말입니꺼?"
"야야... 아가 똑똑해가 니 찾아간 게 맞닥카이...."
담장 너머로 지켜보던 옆집 아주머니가 문을 밀고 들어 왔다.
"뭐라고요?"
"춘식 엄마야 단단히 들어라. 저 노인네가 아이를 내쫓았다. 엄마 올 때까지 안 가겠다고 버티는 아를 낫을 쳐들고 죽일 듯이 달겨 들어가 춘식이가 울며 나갔다."
순이는 억장이 무너집니다.
"울 집 양반이 일본 순사에게 협박을 받았단다. 집에 두면 틀림없이 죽을 끼라고 내보낸기라 카드라. 사 살라고 보냈다 했다."
"허... 살라고 그 어린것을 거리로 내 몰았단 말입니꺼?"
해방의 소식을 듣고 현수는 순이와 춘식을 만나러 급히 윤석의 본가로 왔다.
"순이야~"
뒤를 돌아본 순이는 현수를 보고 주저앉아 통곡을 오열을 했다. 그런 순이를 부둥켜안고 현수도 울었다.
"이것아 니가 없어졌다 해서 내가 얼마나 니를 찾았는지 아나? 돌아왔으니 되었다. 되었다. 고맙다. 살아 돌아와 줘서 고맙다."
"방직공장에 갇혔었습니다. 빠져나올 방법이 없었어예."
"그랬나 소문 듣고 그리 짐작은 했었고마. 니 잘못 될까 봐 얼마나 맴을 조렸는지 아니?"
"어무이 압니다. 압니더. 지가 서신 보낸 거 못 받으셨습니꺼? 동지들 편에 보냈었는데요. 그랬나? 못 받았다. 그래도 이리 만났으니 되었다."
"어무이~ 춘식이가 없습니더. 춘식이가 쫓겨났다 합니더."
"뭐락하노?
이 집안 귀한 손 아이가? 이 난국에 어찌 귀한 손을 내쫓았다는기가 말이가?"
"우리 춘식이 어이합니까? 어데서 찾습니꺼?"
"아가 집에서 내쫓긴 지 두어 달은 되었습니더."
"맞심더... 6월이었다 아입니꺼?"
"이보소. 사둔....
하늘이 무섭지도 않습니꺼?
아한테 양잿물을 밥에 섞어서 먹였다고 하길래 설마 헛소문일 거라 했더니 지금 보니 먹이고도 남았겠습니다. 그려..."
"헉... 그건 또 무신 말씀입니꺼?"
"아이다. 헛소문이다."
"내 봤소. 아든 배 잡고 뒹굴고 토하고...."
"와 성님이 급히 의원 데려갔잖소....?"
"나도 뒤늦게 알고 아 살리려고 의원 모시고 왔었다. 미안타..."
"와요? 이자 친 손주가 생기니까 울 춘식이를 치우려 했던겁니꺼...."
"당신도 사람이교? 인두껍을 쓰고 사람이 어찌.....
일본 압잡이 보다도 더한 짓을 한겁니꺼?"
"저.... 저.....
미안하다. 내 나쁜 생각을 했었다. 미안타. 그래도 핏줄이라 아가 고통받는 거 보니까 뭔 짓을 한 건가 싶어서 죽게 두지 못하고 살렸다. 그러고 구박을 해도 내 거두려 했다. 근데 일본에서 아를 쫒는기라. 집에 두면 아가 죽거나 잡혀가겠다 싶었다. 그래가 급히 내 보낸기라.... 시대가 좀 어수선 안 했나..."
"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자... 자... 어서들 흩어져서 아이를 찾아 보세나...."
"저 산 너머 가는 걸 봤습니더..."
"예? 저 산은 묘지가 많고 유난히 험하고 우두운 산이 아닙니꺼? 아이가 혼자 어찌 저 산을 넘습니꺼? 진정 이 상황이 사실입니꺼?"
"김천역에서 춘식이 보았다는 사람이 있어요."
"김천역 방직 공장에 간다고 했데요."
동네 사람들과 현수 모녀는 몇 날 며칠을 춘식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춘식은 없었다. 소문과 흔적만 가득 쌓여 있었다.
할아버지는 집안의 재산과 땅을 자신의 친손주에게 물려주려 했다. 죽은 형 대신 이어받은 집안 기둥을 지켜내겠다는 집착은 어린 춘식이를 향한 살벌한 압박으로 바뀌었다. 노역에 내몰고 심지어 전쟁터로까지 내보내려 했다. 몇 차례는 아이의 숨통마저 끊으려 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그러나 끝내 그러지 못한 것은 그래도 피 한 방울은 섞여 있다는 인연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일본 순사들이 춘식을 찾는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벼랑 끝에 몰린 듯 아이를 내쫓아 버렸다. 누군가는 할아버지가 아이의 옷을 벗겨 속옷 바람으로 마당에 내던지기까지 했다고 말했다. 아이가 눈물로 매달려도 그는 얼굴을 치켜들며 등을 돌렸다고....
다만, 그 곁에 있던 아내가 가만히 허름한 옷 한 벌을 챙겨 아이의 어깨에 덮어주었을 뿐이라고.....
순이는 그 이야기를 듣자 두 눈에 눈물이 고이고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분노와 슬픔이 뒤엉킨 목소리가 그녀의 가슴에서 터져 나왔다.
“아, 어찌… 어찌 핏줄을 이다지도 잔인하게 내칠 수 있단 말입니까!”
순이의 울부짖음은 허공을 갈라, 바람에 실려 마을을 뒤흔드는 듯했다.
순이는 알지 못했다. 아니 알 수가 없었다. 집안의 재산은 모두 몰수당하고 다들 근근이 의지하며 살아간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윤석의 남은 피붙이를 찾아온 것이고 삶이 힘들어 그러는 것이라고 여기고 일을 다녀 그들의 생게에 도움을 주려 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리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도대체 재산이 뭐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