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식이 만난 길
“춘식아, 오늘은 어제 배운 시조 다시 읊어봐라.”
소율의 목소리는 엄격하면서도 따뜻했다.
춘식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푸른 산빛이... 아니, 푸른 바람이....”
입술이 더듬거렸다. 방금 전까지 연습했건만 머릿속이 하얘졌다.
소율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분명히 외웠잖아. 너는 왜 늘 시작이 이렇게 더디니? 다른 아이들은 두 번이면 외울 걸 너는 열 번을 해도 서툴다.”
춘식은 고개를 떨구었다. 무안과 부끄러움이 몰려왔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그는 더디게 배우지만 한 번 새겨지면 잊지 않는 자신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증명하려면 늘 긴 시간이 필요했다.
며칠 뒤, 소율이 다시 물었다.
“춘식아, 지난번 가르쳐준 거 혹시 아직 기억나니?”
그러자 춘식은 눈빛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다 기억합니다.”
그리고는 처음에는 버벅거렸던 시조를 또박또박 흐트러짐 없이 읊었다.
소율의 눈가에 놀라움이 번졌다.
“... 한 자도 틀리지 않았구나.”
“제가 늦긴 해도 한 번 새긴 건 절대 안 잊어요.”
춘식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날 밤 소율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이 아이는 속도가 느려 답답하기도 하지만 깊게 뿌리내린다. 얕게 흩날리지 않고 오래 남는 힘이 있네. 음악도 글도 결국 뿌리를 깊이 내리는 자가 남는 법이지.”
그 후로도 춘식은 숱하게 야단을 맞았다. 악보 한 줄 익히는 데 남들보다 몇 배의 시간이 걸렸고 글자 하나를 머리에 새기는 데에도 더딜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배운 것을 결코 흘려보내지 않는 아이로 자라났다.
소율은 가끔 손바닥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화를 냈지만 그 화 안에는 기대와 애정이 섞여 있었다.
“춘식아, 넌 장차 훌륭한 예술인이 될 거야.
더디지만 깊은 너의 이 길이 결국 명월관을 이끌 힘이 될 것이다. 그러니 학문을 익히는데 게을리하지 말거라.”
춘식은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겼다. 아이는 느리지만 단단히 조금씩 제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명월관 뒤뜰 방 하나, 작은 등불 하나가 밤까지 꺼지지 않았다. 소율이 북을 두드리며 말했다.
“춘식아, 먼저 숨부터 바꿔라. 숨이 곧 목소리다. 허리를 펴고 천천히 들이마시고 아랫배에서부터 밀어 올리듯 내뱉어.”
춘식은 등을 곧게 펴고 숨을 들이켰다. 입안에서 떨리는 기운이 느껴졌다. 소율이 음을 끌어 보여 주면 그는 따라 했고 따라 해도 소리는 삐걱거렸다.
“아, 또 틀렸네.”
소율의 목소리는 엄격했다.
“너는 시작이 더디다. 하지만 얻으면 그대로 너의 것이 되니 그리 뿌리내려야 오래가는 법이지.
그러니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느린 만큼 더더 노력을 해야 할 것이야. 알겠니?”
"예, 어머니."
하루는 같은 구절을 스무 번도 더 반복했다. 소율은 가만히 손가락으로 박자를 짚어 주었다.
“아—음—(딱) —음—(딱). 가사 하나하나를 네 몸에 박아라. 뜻을 알면 소리가 달라진다.”
춘식은 더디게 받아들였지만 한 번 받아들인 것은 몸속에 아로새겼다. 처음에는 가사 끝을 흐리며 마쳤으나 며칠이 지나자 그 문장이 그의 숨과 하나가 되었다. 소율이 놀라서 작게 웃었다.
“봤지? 네가 한번 새기면 절대 잊지 않는다니까.”
훈련은 가혹했다. 소율은 때로 매섭게 꾸짖었다.
“더 단단하게! 발음을 삼키지 마라! 네가 부른 말이 사람의 마음을 풀어줄 수 있어야지!”
그리고는 손수 가사를 하나씩 설명해 주었다. 우리말의 억양, 숨의 위치, 한자어의 뜻까지. 춘식은 천천히 그러나 깊게 받아들였다.
어느 저녁 소율은 작은 연회 자리에 만철과 춘식을 불렀다.
“만철아 춘식아 너희들 오늘 맨 마지막 한 곡 해 보거라.”
만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소율의 시선은 춘식에게 머물렀다. 망설이던 춘식이 대답을 했다.
"예. 어머니."
춘식은 떨리는 손으로 옷자락을 정리하고 숨을 고른 뒤, 소월이 가르친 대로 배에서 소리를 끌어올렸다. 처음엔 삑사리가 났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두 번째, 세 번째 마디를 넘기자 소리가 연결되기 시작했다. 가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며 공간을 채웠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마치 뿌리를 내리듯 깊었다.
연회장은 숨을 죽였다. 노랫말의 마지막 음이 잦아들자 만철이 박수를 터뜨렸고 소율의 눈가에 뜨거운 물기가 맺혔다.
“그래, 네 것이다.”
소율이 낮게 말했다.
“느리더라도 네 것이 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춘식은 그날 밤, 불빛 아래에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인정하는 웃음을 지었다. 느렸지만 단단한 그의 재능, 그런 춘식의 역량을 향한 소율의 기대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한 편 순이는.....
순이는 눈물을 훔칠 겨를도 없이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이가 어딨다 했습니까? 김천역… 맞습니까?”
주위 사람들은 당황스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그 속에서 한 노인이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그날… 김천역으로 간 걸 봤다는 이가 있소. 허나 벌써 며칠이 지났으니 어디로 갔을지는…”
순이의 눈빛이 번쩍였다.
“김천역이든 어디든, 지가 찾아낼 기라예. 내 새끼를… 반드시 찾아야 합니더.”
그 길로 순이와 현수 그리고 몇몇의 마을 사람들은 들판을 가로질러 김천역으로 향했다. 역전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북적였고 광복의 기쁨과 분주함으로 가득한 그곳에서 순이는 사람 하나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혹시 어린 사내아이 못 보셨습니까? 이름은 춘식이라캅니더. 검은 눈이 반짝이고 노래를 참 잘하는 아이입니더. 나이는 열 살 이름은 춘식이입니더”
어떤 여인은 고개를 젓고, 어떤 사내는 무심히 손사래를 치며 지나갔다.
그때 허름한 행상 하나가 순이를 힐끗 보더니 낮게 중얼거렸다.
“언젠가 방직공장 쪽으로 발길을 돌린 아이가 하나 있었지. 어찌나 똘똘하고 절실해 보이던지.... 쉽게 잊혀지지 않는 아이가 있었는데 혹시 그 아인지 모르겠소.”
순이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말을 끝까지 들을 틈도 없이 방직공장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이미 공장은 휑하니 비어 있었고 불에 그슬러 있었다. 그 근처 그 누구도 아이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대구로 갔다 카더라..... 거기 과수원에도 기웃거렸다 안 합니까.”
흘러나온 말 한마디가 순이의 발걸음을 또다시 재촉했다.
순이는 그렇게 대구로 향했다. 대구 거리는 이미 세상 모진 풍파에 떠밀린 아이들의 터전이 되어 있었고, 순이는 과수원과 장터, 심지어 동네의 불량배 아이들까지 쫓아다니며 춘식의 흔적을 더듬었다.
“제발, 우리 춘식 못 봤습니까? 작은 몸에 눈망울이 유난히 또렷한 아이예요. 노래를 참 잘하거든예…”
그녀의 목소리는 점점 쉬어 갔고, 두 발은 흙먼지 속에 퉁퉁 부어올랐다. 그러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순이의 가슴속에는 오직 하나,
‘춘식을 다시 안아야 한다’는 간절한 염원만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춘식의 고난했던 어린 삶의 여정을 다시 한번 이야기하자면 이러했다.
춘식은 시대가 짙게 드리운 그림자를 안은 채 험난한 길을 걷고 걸었다.
어느 날....
어린 춘식은 그의 어머니인 순이가 출근을 한 뒤 돌아오지 못하자 더 이상 집안에 머물 수 없게 되었다. 할아버지는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하려는 듯 혹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품어온 욕심을 드러내듯 춘식을 내쫓아 버렸다. 옷 한 벌 제대로 걸치지 못하게 한 채, 그 어린아이를 거리로 내몰았다.
길을 떠난 춘식은 김천역을 지나 대구역으로, 그리고 결국 부산까지 흘러들어왔다. 기댈 곳 없는 이주와 방황의 길 끝에서 그를 맞이한 이는 다름 아닌 명월관을 운영하던 소율이었다.
소율은 어린 춘식을 보자마자 보통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녀는 춘식을 만철의 동생으로 집안의 한 아이로 삼아 거두었다. 그녀의 눈에는 춘식이 가진 음악적 감각이 남달라 보였다. 그에게는 노래와 악기의 울림을 들을 줄 알고, 마음 깊이 새겨두는 힘이 있었다.
본래부터 소율은 자신의 아들 만철에게는 명월관을 물려줄 생각이 없었다. 화려하고도 위험한 세계를 아들에게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녀의 뒤를 이어 명월관을 지켜줄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아들인 만철이 대신 그녀는 춘식을 가르쳤다. 재능이 있고 인물이 뛰어나고 역경을 딛고 여기까지 살아온 춘식에게 이 모든 것을 능히 감당해 내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음악과 학문, 그리고 경영의 지혜까지 엄격히 가르칠 작정이었다. 물론 후계자로 세워지는 건 춘식이었으나 모든 재산의 귀속은 만철의 것이었을 것이었다.
본가에서 쫓겨난 춘식은 순이가 없는 그 빈자리 속에서도 삶을 버텨내야 했다. 가진 것도 기댈 곳도 없던 아이는 다행히 소율을 만나 굶주림을 면했고 음악과 글을 배우는 기회까지 얻었다. 그는 한자와 우리말을 익히며 소율이 배웠던 학문 덕목들을 뒤따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배움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춘식이는 한 번 머리에 들어간 것은 좀처럼 잊지 않고 오래 품을 수 있었으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남들보다 더뎠다. 선생에게 꾸지람을 듣고 때론 매서운 훈계에 눈물이 터지기도 했다. 하지만 야단과 엄격한 교육이 오히려 아이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고된 훈련 속에서도 아이는 한 걸음씩 또 한 걸음씩 배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
그 무렵, 부산의 명월관은 날로 번창해가고 있었다. 그 당시 그곳은 부산에서 가장 손꼽히는 부자 집안으로 알려졌다. 춘식이는 그 번성하는 집안의 울타리 안에서 자라며 굶주림과 추위로 떠돌던 시절과는 다른 세상을 만나게 되었다. 풍족한 살림과 학문의 기회 속에서 그는 비로소 숨을 고르고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