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서 만난 계절
사과가 붉게 익어가던 대구의 여름, 춘식과 아이들은 과수원에서 땀을 흘리며 하루를 보냈다. 일손을 돕고 얻어먹는 사과는 달고 향긋했다. 입안을 가득 채운 단물이 잠시 굶주림을 잊게 해 주었다.
“야, 대구 오길 잘했다 아이가. 사과 덕에 배고픈 줄 모르겠다.”
“그라모, 여기 있자. 괜히 돌아다니면 큰일 난다.”
“에이, 부산 가면 고기도 많다 카더라. 사과보다 낫지 않겠나?”
"그라믄 혹시 우리가 헤어지게 되면 부산서 만나면 어떻겠노?"
"응?"
"여기서 또 형아들한테 붙잡힐 수도 있고 쫓겨날 수도 있고...
뭐.... 암튼 어찌어찌해서 헤어지게 될 수도 있잖아."
"음... 그럴 일은 없어야 하지만 만일에 그리되면 고기 많은 부산서 만나자...ㅋㅋ"
"좋다... 좋다. 그러는 걸로..... ㅋㅋ"
아이들은 장난처럼 말하고 웃었지만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실제 그런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었다. 말이 씨가 되고 말았다. 사소한 장난 끝에 무리는 한순간 흩어졌고 춘식은 홀로 남게 되었다. 정신없이 뛰놀던 춘식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역 근처에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바로 그때 춘식은 대구역 언저리에서 어슬렁거리던 형들의 눈에 띄게 되었다.
“야, 꼬마야. 이리 와 봐라.”
낯익은 그러나 두려운 부름이었다. 춘식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는 대꾸할 틈도 없이 몸을 홱 돌려 도망쳤다.
“잡아라!”
뒤에서 울려 퍼지는 목소리가 쫓아왔다. 발이 바닥에 닿기도 전에 날아오르는 듯 달리던 춘식은 문득 친구들의 말이 떠올랐다.
“부산 가면 고기 많다 카더라. 거 가면 굶을 일 없다 아이가.”
'어쩌지? 정말 부산으로 가야 하나? 친구들을 못 만나면 어쩌지? 아냐 역에 있으면 될 거야. 일단 저기로 도망쳐 보자.'
"여기다. 저기 그 꼬마가 있다."
춘식은 열심히 도망쳤지만 형들의 추적은 빠져나갈 틈이 없었다.
“부산 가면 고기 많다 카더라. 거 가면 굶을 일 없다 아이가.”
친구들이 했던 그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고 그 한마디가 결국 등 뒤를 떠미는 힘이 되었다. 어린아이였기에 작고 가벼운 몸이었기에 기차에 오르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 시절, 아이들의 무임승차는 누구도 탓하지 않았다. 춘식은 헐떡이며 기차에 몸을 싣고 창문 밖으로 대구의 풍경이 점점 멀어져 갔다.
얼마 후 부산역에 닿았을 때 춘식의 눈은 휘둥그레해 졌다. 춘식이 본 세상은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바닷바람은 짭조름했고 항구의 기척이 역전까지 밀려왔다. 무엇보다도 춘식의 눈길을 사로잡은 건 지상 위를 달리는 전차였다.
꽥꽥 소리를 내며 철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려가는 그 전차는 김천도 대구도 보여주지 못한 풍경을 춘식에게 보여 주었다. 아이의 두 눈은 그 낯선 광경에 휘둥그레졌다.
“와... 기차도 아닌 기차가 길 위를 달리네..... 세상에 이런 게 다 있나.”
부산은 낯설었지만 동시에 자유롭고 신비로웠다. 그러나 자유는 언제나 배고픔과 함께였다. 어느 날 역전 어귀에서 떡 장수를 멍하니 바라보던 춘식에게 뜻밖에도 일본 군인 복장의 사내가 다가왔다.
“꼬마, 이거 먹어라.”
그 사내는 떡을 춘식에게 내밀었다. 따끈한 떡이 손에 쥐어지자, 어린 가슴은 벅차올랐다.
그러나 사내가 떠나자 떡 장수 아주머니가 다가와 말했다.
“얘야, 그 떡 돌려주라. 네 손에 든 거 하나 빼고, 봉지째는 내놔야지.”
순간 춘식은 떡을 꼭 쥐었지만 이내 고개를 떨구며 봉지뿐만 아니라 손에 든 그것마저 내밀었다. 아주머니는 떡을 빼앗듯 가져갔지만 아이의 눈빛은 원망 대신 착하고 맑은 빛으로 남았다.
부산의 하늘은 높았고 바다는 멀지 않았다. 역전의 소란 속에서 춘식은 여전히 굶주렸으나 동시에 묘한 자유와 설렘에 휩싸였다.
“내 이제 어디로 가야 할꼬…”
아이의 발걸음은 불안정했지만 그 발길이 가는 곳마다 시대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그 그림자 속에서도 춘식의 눈동자는 여전히 세상을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어느 날, 춘식이는 전철역 구석에 몸을 웅크린 채 잠이 들었다. 어린 나이에 홀로 떠도는 세상살이가 고단했던 탓이었다. 그런데 꿈결처럼 고운 여인이 다가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얘야, 어디서 온 거니? 집은 있니?”
"부모님은 어디 계시니?"
춘식이는 어린아이답게 꾸밈없이 대답했다. 그동안 겪었던 우여곡절을 천진하게 풀어내니 여인은 말없이 오래도록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는 부드러운 눈빛으로 말했다.
“나랑 같이 갈래?”
갑작스러운 제안에 춘식이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엄마를 찾아야 한다는 마음과 낯선 이를 따라가야 한다는 두려움이 얽혀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 순간, 곁에 있던 아주머니들이 등을 떠밀 듯 말했다.
“따라가 봐라. 저분은 나쁜 분 아니시다.”
"니 따라가면 니도 집에서 다른 아이들처럼 살 수 있다."
"맞다. 이 지역 부자다. 니 따라가면 평범하게 살 수 있을끼다."
"하므.... 저분이 니그 엄마도 찾아 줄 끼다. 착한 사람이데이"
"엄마 만날 때까지 따라가서 잘 살고 있으면 되지 않겄나?"
"맞다 맞다. 굶어 죽어뿔면 엄마도 못 만난다."
"하므... 그라면 그니 엄마도 슬플끼다."
"일단 따라가그라... 니가 복이 많데이~"
결국 마은 여린 춘식이는 그 여인의 손을 잡게 되었다.
그녀는 다름 아닌 진주의 권번 출신 기생이었다. 그러나 흔히 생각하는 기생과는 달랐다. 그녀는 뼈대 있는 가문의 딸이었으나 일제강점기의 격랑 속에서 집안이 기울어 권번에 들어가게 된 사람이었다. 언니가 동생의 앞날을 위해 선택한 길이었고 그녀는 그 속에서 신여성으로서의 삶을 배워나갔다.
본디 착한 심성을 지녔고 인물 또한 곱디고왔다. 노래와 춤, 악기와 바느질, 요리까지 두루 섭렵하여 모르는 것이 없었다. 예의 바르고 재주 많은 그녀는 결국 ‘명월관’을 운영하며 사람들로부터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
그녀에게는 하나뿐인 아들, 박만철이 있었다. 열두 살쯤 된 장난꾸러기 아이였는데 춘식이는 곧 만철이와 형제처럼 어울려 밝게 자라게 되었다. 다만 만철이는 성격이 개구져 종종 회초리를 맞곤 했다. 물론 열 살배기 춘식이도 생활이 안정되자 만철이 못지않게 개구쟁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래서 이 형제는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는 일이 늘어 갔다. 뒷마당 감나무 가지가 손이 닿는 높이에는 한 개의 가지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매번 그 가지를 꺾어 사랑의 매를 삼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회초리에는 미움이 없었다. 오히려 아이를 바르게 키우려는 정성과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춘식이는 그 따스한 매를 보며 진심으로 아들처럼 품어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하루는 춘식이가 또다시 장난을 치다가 어머니의 눈에 크게 띄었다.
“입고 온 옷 그대로 나가거라.”
그녀는 단호하게 말했다. 잘못을 뉘우치게 하려는 마음에서였지만 어린 춘식이는 그 뜻을 헤아릴 수 없었다. 그저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고개를 떨군 채 집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소율은 춘식이 측은하고 마음이 아팠다. 바로 만철이를 불러 춘식이를 따라가 보라고 하며 아이가 반성한 것 같으면 데리고 오라고 했다.
춘식이는 부산진과 초량진을 지나 어느 역 구석에 쓸쓸히 앉아 있었다. 주머니 속엔 달랑 동전 몇 닢뿐. 그런데 그중 하나가 선로 틈새로 떨어져 버렸다. 동전을 꺼내려 몸을 기울이던 순간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 녀석!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만철이었다. 헐레벌떡 뛰어온 그는 춘식이의 등을 탁 치며 야단을 쳤다. 하지만 그 속내는 애타는 마음이었다.
“니 반성 좀 했나? 어무이 말씀 좀 잘 듣거라. 우에 그리 말썽을 피우는데?"
"내가 잘못했다."
"잘못한 거 아나?"
"응. 안다."
"그라믄 된 거라. 어서 집으로 가자!”
춘식이는 만철의 손에 이끌려 다시 명월관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는 여느 집 아이들처럼 따스한 품속에서 안정된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동네 친구도 사귀고 새살림에 어울리며 비로소 아이답게 자라날 수 있었다.
춘식을 아들로 삼아 귀히 키운 그녀의 이름은 소율이었다. 본래는 진주의 명문가에서 태어나 귀하게 자랐으나 일제강점기의 모진 풍파가 집안을 휩쓸었다.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재산은 세금과 전쟁 자금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언니는 어린 동생만큼은 꺾이지 않기를 바라며 결단을 내렸다.
“네 앞길은 네가 열어야 한다. 남에게 휘둘리지 말고, 네 스스로 살아야 한다.
여자도 교육을 받아야 해. 요즘 신여성들은 많이 배우고 익혀서 새로운 직업도 가지고 자기표현을 하면서 멋지게 산다더라”
"신여성?"
"응. 신여성... 문학, 예술, 연극, 영화, 음악 등에서 활동하며 자신의 생각과 개성을 드러 내며 사는 거야."
"하지만....."
"멀리 내다봐야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생이 아니야. 교육받고 문화적 능력을 갖춘 자기 주체성을 가진 근대적 여성으로 살아야지..."
그렇게 소율은 언니의 권유로 진주 권번에 들어가게 되었다. 권번은 단순히 기예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었다. 신여성으로서 필요한 교양과 예절, 글 읽기와 쓰기까지 가르쳤다. 소율은 머리도 영특하고 손재주도 좋아, 스승들의 총애를 받았다.
노래를 배우면 구슬 같은 음색으로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가야금을 타면 손끝에서 흐르는 선율이 깊은 한을 어루만졌다. 음식 솜씨도 좋아 작은 잔치라도 열리면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는 고운 마음씨로 사람들을 끌어당겼다.
세월이 흘러 소율은 부산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곳에서 ‘명월관’을 운영하게 되었는데, 단순한 유흥의 장소가 아니었다. 지식인과 상인, 예술가들이 모여드는 사랑방 같은 공간이었다. 소월은 그곳에서 품격 있는 대접과 흥취를 베풀며 무너져가는 세상 속에서도 사람들에게 작은 위안을 주었다.
그 무렵 춘식이가 들어왔다. 어린 나이에 기댈 곳 없던 아이는 명월관 마당에서 새 가족을 만난 것이었다.
만철은 개구쟁이였지만 마음은 따뜻했다. 처음엔 낯선 춘식이와 티격태격했으나 곧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형제가 되었다. 둘은 시장통을 뛰어다니며 고구마도 사 먹고 영도다리 아래에서 물장구도 쳤다.
“야, 춘식아! 감나무 올라가자!”
“나 저번에 떨어져서 혼났잖아. 형아 혼자 가라!”
“겁쟁이!”
이렇게 놀다가도 저녁이면 소율의 부름에 얌전히 돌아와 그녀가 차려준 따끈한 저녁밥을 먹었다.
때로는 회초리를 맞기도 했다. 감나무 가지가 닳고 닳아 매번 새로 꺾어와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소율의 손길은 늘 따스했고 두 아이는 그 사랑 속에서 웃으며 자랐다.
춘식이는 점점 예절을 배우고 글도 조금씩 익히며 달라져 갔다. 만철은 춘식을 동생처럼 챙기며 잘못을 하면 앞장서서 감쌌다.
“어머니, 이번 건 제가 시킨 겁니다. 춘식이 탓 아니에요.”
그럴 때마다 소율은 웃으며 두 아이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에는 깊은 정과 안쓰러움이 담겨 있었다.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시대는 여전히 거칠게 흐르고 있었지만 명월관의 안마당만큼은 따스한 봄 햇살 같은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춘식이는 더 이상 외로운 떠돌이가 아니었고 만철은 더없이 든든한 형제와 함께였다. 그리고 소울은 두 아이를 기르며 다시금 삶의 의미를 찾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