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괴산군 화양계곡에 가면 만동묘라는 사당이 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한 명나라 만력제와 마지막 황제인 숭정제를 모시기 위해 명이 멸망하고도 60년이 지난 1704년에 창건되었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 집권 시절 서원 철폐 이후 터만 남았다가 1999년 사적으로 지정되고서 2004년 다시 복원되었다.
만동묘는 숙종 15년 노론의 수장 송시열이 남인에게 사사될 당시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라”라는 유언을 남겼고, 그의 제자들이 유언에 따라 화양서원 내에 만동묘를 창건하고 두 황제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를 올렸던 곳이다. 이때가 숙종 30년이다. 이후 조선의 임금들도 만동묘를 융숭하게 대우하였는데 영조 2년에는 만동묘에 제전과 노비를 내려주었고 정조는 직접 쓴 글씨를 하사하기도 하였다.
만동묘는 폐단이 많았다. 지역 백성들에게 서원의 제사 비용을 부담케 하거나 부담하지 못하면 붙잡아 폭행과 고문을 하는 만행이 심했다. 젊은 시절 흥선군도 이곳을 참배하려다가 만동 묘지기에게 얻어맞는 고초를 당했다는 야사도 있고, 심지어 "원님 위에 감사, 감사 위에 참판, 참판 위에 판서, 판서 위에 삼정승, 삼정승 위에 승지, 승지 위에 임금, 임금 위에 만동 묘지기"라는 노래까지 유행하였다.
만동묘를 신성시하는 일은 비단 조선시대뿐만이 아니라 일제강점기에도 지속되었다. 이 시절 일제는 만동묘 제사를 금지했었는데 그럼에도 1937년 지방 유림들이 일제 몰래 제사를 지냈다가 발각되는 웃지 못할 사건도 있었다.
현재의 사고방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일들이다. 송시열은 조선의 유학과 성리학을 집대성하고 동양철학의 체계를 정립한 역사적 인물이고, 영조와 정조도 조선을 대표하는 훌륭한 왕들인데 왜 100년이나 지나서 멸망한 나라에 충성하고 소중화의 의리를 지키려 했을까? 이후에도 일본이란 망령과 또 다른 강대국이 나타날 때마다 왜 혼신의 힘을 다해 옛 의리를 지키려 하는 것일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3인자들의 반란에 2인자 조선이 입은 상처가 너무 커서인가? 아니면 사대와 성리학이란 이념에 세뇌되어 변화에 눈 감은 것인가? 두 번에 걸친 무너진 역사를 바로 세우고 임금에 대한 충성을 위해 유교를 강조하는 것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가? 역사에 대한 실랄한 평가가 바로 되지 않고서는 앞으로도 이 같이 해괴한 역사가 반복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