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가 돌담길을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기억나고오래전 미술전시를 보러 왔을 때 '초라하다'라는 기억만 있는 이곳 덕수궁. 매일 아침 출근길에 지나쳤던 곳이지만 무신경해서인지길만 익숙할 뿐 덕수궁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생각만 하고 있을 즈음이다. 지난가을 한국사 수업을 듣고, 역사에 각별히 관심을 보이는 다양한 연령대의 수강생들이 모여 역사커뮤니티를 만들고 운영해 오다 덕수궁을 탐방하게 되었다.
덕수궁 탐방을 위해 우리가 모인 곳은 조선호텔 내에 있는 '환구단', 천자가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는 곳이다. 고려시대까지 제례가 행해졌으나 고려말부터는 사라졌던 전통을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로 즉위하고 제천의식을 봉행할 수 있게 되면서부터 다시 설치된 곳이다. 현재는 신위를 모신 3층 팔각 정자 '환궁우' , 3개의 '돌북'과 그리고 '석조 대문'만 남아있지만 천자라고 주장해 온 중국이나 천황이라고 주장해 온 일본과 대등한 자격으로 우뚝 서기 위해 황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서구 열강에 독립적인 국가 위상을 보여주고자 했던 의미가 담긴 곳이기도 하다.
'환구단'을 떠나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으로 들어선다.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에게 내려진 '망원정'에서 유래한다. 서열이 높은 월산대군을 제치고 한명회를 장인으로 둔 덕에 동생 잘산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미안한 마음에 형한테 하사한 저택이 바로 '망원정'이다. 궁이란 명칭으로 쓰인 적은 없었지만 임진왜란 때 모든 궁이 불에 타 소실되자 선조가 임시 거처로 사용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리기 시작하였다. 광해가 즉위한 곳이기도 하며, '창덕궁'으로 옮긴 후에는 '경운궁'이라 하였다.
그 후에는 궁으로서 기능을 못하다가 조선말 민비 시해사건인 '을미사변'과 고종이 아라사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을 거치면서 1897년 2월, 서구 열강의 대사관에 둘러싸여 안전을 보장받고 싶어 거쳐하기 시작한 곳이 바로 이곳 '경운궁'이다. 피신한 아라사 공관에서 제국의 밑그림을 그렸던지 그해 10월 고종은 대한 제국을 선포했고1919년 이곳에서 승하할 때까지 거쳐했던 곳이다. '덕수궁(德壽宮)'이라는 이름은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비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덕수궁의 정문은 원래 정전과 남쪽 일직선상으로 나있던 '인화문'이었다. 지금의 정문은 '대한문'으로 '환구단'이 덕수궁의 동쪽에 마련되면서 '인화문' 대신 동문인 '대안문'을 정문으로 하고 후에 '대한문'으로 이름을 변경한 것이다. 덕수궁은 '즉조당'을 정전으로, '덕홍전'을 편전으로, '함평전'을 침전으로 사용해 왔으나 대한제국 선포 이후 '즉조당'이 제국의 정전으로 쓰기에 너무 협소하여 새롭게 '중화전(中和殿)'과 '중화문'을 세웠다. '중화전'에는 조선의 다른 궁궐과는 달리 대한제국 황제의 상징으로 붉은색 대신 노란색을 칠했는데 쇠퇴해 가는 나라를 다시 세워보려는 고종의 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애처롭기까지 했다.
또 고종은 근대 국가를 염원했는지 대한제국의 서양식 석조건물로 '석조전'을 구상하고 1900년 착공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한일합방이 된 1910년에야 완공되었다. 이 때는 이미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조약 이후였기 때문에 고종이 '석조전'에서 외국 사신을 맞은 적은 없었겠지만 한일합방 이후에도 민비 소생 순종과 귀비 엄 씨 소생 영친왕은 잠시나마 이곳에 머물었을 것이다. 이후 석조전은 일제의 미술관으로 사용되다 2014년 신고전주의 양식 외관에 유럽 고성에서 봄직한 내부 장식으로 복원되어 겉으로는 위풍당당해 보였다.
'석조전' 뿐 아니라 도서관 격인 '중명전'은 을사늑약의 현장이 담겨있고, 미소공동위원회도 열린 곳이며, UN 한국 임시위원단 사무실로도 쓰인 곳이다. 궁의 규모에 있어서도 일제강점기를 거치고 근대화 도시계획에 희생되어 지금은 약 67,000m2로 경복궁이나 창덕궁의 1/5도 안 되는 작은 규모로 남게 되었으며, 궁 밖에 있던 석조건물 '돈덕전'은 철거되고 지금은 명칭도 감감한 '만희당', '흠문각', '양복당', '경효전'도 사라지고 없어져 역사의 흔적으로만 남아있다고 한다. 가슴 아픈 일이지만 구한말 역사의 현장을 돌아보며 이곳이 힘없는 국가의 미래가 얼마나 참담해질 수 있는 지를 일깨워주는 교훈이 되기를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