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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올 이상은 Aug 13. 2023

칠지도에 담긴 사연

 1873년 일본 나라현의 한 신궁에서 발견된  75cm 크기의 칼, 칠지도. 7개의 가지가 달린 나무형태의 칼로 발견 당시 일본 열도를 들끓게 하였다. 그 이유는 칠지도가 그 당시 한반도의 일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증거라고 믿고 일본의 국보로 지정될 만큼 놀라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칠지도에는  총 62자의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앞면에는  서기 369년을 뜻하는 태화 4년, 그리고 제후국의 왕을 뜻하는 후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고, 뒷면에는 왕세자 탄생을 기념하여 라는 문구와 일왕 지를 위하여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문제는 한일 역사학계의 글자에 대한 해석이 정반대인 것이다. 일본은 이 칠지도가 "백제왕이 일본 천왕에게  받쳤다"라는 '일본서기'의 그 칠지도이며, 따라서 '일본서기'는 사실이고 4C-6C에 일본이 가야를 지배했으며, 신라와 백제에 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한다 라는 해석이고, 반면 한국은 '태화 4년'과 '후왕'이라는 글자를 들어  일본은 백제의 제후국이고  서기 369년 제후한테  하사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서기 369년 경 백제와 일본의 기술과 문화 수준 그리고 군사력의 우위를 따져보면 알 수 있다. 기술과 문화 측면에서 그 당시를 보면 백제는 무기를 만들 정도로 품질 좋은 철을 제조하고 글자를 새기는 고도의 상감기술을 보유한 반면 일본은 좋은 철을 만들 수 있는 기술이 없어서 가야나 백제로부터 철을 수입했고,  칼에 글자를 새겨 넣는 상감기술도 200년이나 더 지나서야 확보할 정도로 일본의 기술은 저급했다. 군사력 측면에서도 4C말은 백제가 가장 부강했던 근초고왕 재위 시절로 고구려 쳐들어 가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죽이고 한강 이북땅을 차지할 만큼 군사력이 막강했으며 동북아의 중심 국가였던 반면 일본은 고대국가가 만들어져 가는 초기였다.

 이런 점에서 어느 것이 사실인지는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주장이 객관성을 갖고 나라의 자존심, 자긍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역사를 제대로 기록하고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정말로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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