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중년의 일상
몇 년 전,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뮤지컬 ‘라이언 킹’을 본 이후로, 오랜만에 딸과 뮤지컬 공연을 보러 갔다. 이번에는 ‘킹키부츠’ 10주년 행사로 지방에서도 공연이 열렸다. 나라는 혼란스럽고, 뉴스는 온통 탄핵 정국 소식으로 심란했으며, 코스피 지수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상을 살아야 한다. 두어 달 전에 예매해 둔 공연이기도 했지만, 집에 앉아 뉴스만 보고 있자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비가 내리는 토요일 오후, 이른 점심을 먹고 출발했다.
공연 시간보다 거의 1시간 일찍 도착했지만, 지하 주차장은 이미 만차 상태였다. 눈치 빠른 딸이 최대한 공연장 가까운 곳에 주차를 했다. 어릴 적 아이들과 난타 공연을 보러 갔다가, 집으로 돌아와 주차장에서 맨발로 내린 아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공연장으로 가는 길에, 아들이 그토록 갖고 싶어 했던 캐릭터 신발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짜증 섞인 말을 쏟아냈던 나, 그리고 울기만 했던 어린 시절의 순하디 순한 아들. 모두가 떠난 공연장 주차장 그 자리에는 아들의 캐릭터 신발이 벗어 놓은 그 상태로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어느 누구도 그 작고 하얀 새 신발을 짓밟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들도 아들의 마음을 알았는지, 다들 조심해서 신발을 비켜가 준 것이었다. 항상 이 공연장에 올 때마다 생각나는, 가지런히 놓여 있던 아들의 운동화.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지금도 그런 귀여운 녀석이 있을까 하고 둘러보지만, 한 번도 그런 녀석은 보지 못했다.
아직 입장 전이지만, 엄청난 사람들 사이에서 긴 줄에 섰다. 알고 보니 포스터 앞의 포토존 줄이었다. 뒤에 있던 세 자매의 유쾌한 대화 덕분에 긴 줄도 지루하지 않았다. 어느새 우리의 차례, “엄마, 사진 잘 찍어줄 수 있지?”라는 딸의 말에, 스페인 알함브라 궁전에서 사진에 진심이었던 딸의 모습이 떠올랐다. “못 찍으면 우리 딸 화낼 건데”라고 무심코 내뱉은 말을 세 자매가 들었는지, 카메라를 들자마자 “어머니, 딸 화내요!” 라며 어느새 내 손의 스마트폰이 그녀들 손에 쥐어져 있었다. 유쾌한 자매들 덕분에 포토존에서 한바탕 웃으며 오늘 공연은 왜인지 재미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딸과 내 좌석 사이에는 중년 여성 관객이 앉아 있었는데, 그녀의 배려로 딸과 나란히 앉을 수 있었다. 흔쾌히 자리를 양보해 준 그녀에게 호감이 갔고, 혼자 왔음에도 공연을 충분히 즐기는 모습에 또 한 번 감탄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얼마나 집중하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나도 요즘 나 자신을 사랑하려고 노력 중이지만, 쉽지는 않다.
여장 남자인 롤라 역을 맡은 강홍석의 다부진 체구와 엄청난 성량에 놀랐고, 남자 같지 않은 여섯 엔젤들의 몸매와 연기는 코믹하면서도 매력적이었다. 관객의 환호와 배우들의 열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보는 우리. 관객과 배우가 함께 만들어낸 이 시간은 모두를 행복하게 했다. 잠시나마 바깥세상의 소란과 분노를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무대 위의 배우들도, 관객인 우리도, 그 순간만큼은 킹키부츠를 신고 함께 박수치고 노래했다. 언젠가 다시 마음 편히 일상을 즐길 수 있기를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