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조각조각을 이어 따스한 추억을 낳다

며칠 전, 2002년 방송통신고등학교에서 담임과 학생으로 만났던 제자들과 저녁 모임을 가졌습니다. 처음 휴대폰이 울렸을 때, 화면에 뜬 '방통고 춘자 씨'라는 이름을 보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가슴이 마구 뛰었지요. 집안일로 우울한 마음을 달래려 무작정 여수 바다로 날아가 신세를 한탄하던 차에, 20년의 세월을 날아온 전화 한 통이 저를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의 방송통신고등학교는 평일에는 일반고 교사로, 일요일에는 방통고 교사로 근무해야 하는 고강도의 업무 현장이었습니다. 젊다는 이유로, 혹은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으로 저는 어르신들이 가득한 반의 담임이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경력 10년 차의 중견 교사였지만, 인생에서 가장 깊은 암흑기를 지나고 있었습니다. 다섯 살 난 아들을 뒤로하고 교통사고로 생사를 넘나들던 남편의 병상을 지키며, 나라 전체가 월드컵 열기로 들썩이던 그해를 저는 눈물로 버티고 있었지요.

방통고 어르신들은 저보다 연배도, 삶의 연륜도 훨씬 깊은 분들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학업의 한을 풀기 위해 일요일마다 지각 한 번 없이 수업에 참여하시던 그분들의 눈빛은 젊은 선생인 저의 자격지심과 자기연민을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분들은 저마다 한 권의 위인전 같은 삶을 살고 계셨지요.

일흔의 할머니 학생과 중년의 남매 제자가 기억에 남습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누나 춘자 씨와 아직 미혼이었던 순박한 남동생 반장님. 우리 반은 한마음이 되어 노총각 반장 장가보내기 위원회까지 결성할 정도로 정이 넘쳤습니다. 제가 전근을 가고 세월이 흘렀지만, 저는 그분들의 옛 번호를 지우지 않았고 제 번호 또한 결코 바꾸지 않았습니다. 마음 한구석에 늘 그분들이 그리웠기 때문입니다.

90을 바라보시는 과수원 할머니, 이제는 손주를 둔 할머니가 된 춘자 씨, 그리고 어느덧 전기기사 사장님이 되어 수험생 딸을 둔 반장님까지. 20년 만에 다시 만난 그분들의 웃음결은 신기하게도 그대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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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방 소파 위 퀼트 무릎 담요: 포근한 헥사곤 조각 이불) "각기 다른 모양과 색깔을 가진 조각들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이어져 이토록 따스한 담요가 되었습니다. 우리 인생의 조각들도 이처럼 서로를 품어 안으며 명작이 되어갑니다."


퀼트가 그렇듯, 반듯한 새 천만으로는 결코 깊이 있는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 중 누구도 처음부터 반듯한 새 천이었던 적은 없었습니다. 자투리였고, 홀로 남겨진 채 제 자리를 찾아 헤매던 존재들이었지요. 남들보다 늦었고 돌아가야 했던 날들을 잇고 붙이면서도, 우리는 결코 서로를 배척하지 않았습니다. 주어진 색깔대로, 생긴 모양대로 서로를 받아들이고 채우며 시린 무릎을 덮어줄 온기를 만들어왔습니다.

미켈란젤로의 명작만이 위대한 것은 아닙니다. 서로의 모난 부분을 잘라내지 않고 불완전한 빈자리까지 채워주며 연결된 우리 2학년 3반이야말로 제 인생의 진정한 '명작'입니다. 자신의 슬픔은 안으로 삭이면서도 타인의 눈물을 닦아줄 줄 알았던 그분들이야말로 대한민국을 지탱해 온 숨은 영웅들이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을 움직인 이름 없는 수군들처럼, 춘자 씨와 반장님 같은 분들이 노를 놓지 않았기에 지금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이제 저는 우리 반을 보이지 않게 이어 붙인 바탕천 같은 존재로 남고 싶습니다. 제 인생의 가장 어두운 시절, 도시락을 넉넉히 싸 와서 반항기 가득한 청년 제자들까지 따뜻하게 품어주시던 그분들에게서 저는 삶을 배웠습니다. 누군가의 하루를 조용히 지탱해 주는 일이 얼마나 고귀한지 말입니다.

이제 역할을 바꾸어, 그분들을 제 인생 학교의 담임 선생님으로 모시고 저는 기꺼이 좋은 학생이 되려 합니다. 귀한 인연에 깊이 감사하며, 제 삶의 진정한 스승님들께 새해의 축복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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