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9월의 해바라기

지난여름, 우리는 정말이지 질리도록 뜨거운 태양과 화산 같은 열기를 견뎌내야 했습니다. 그 뜨거움 한가운데 있을 때는 시원한 가을이 영영 오지 않을 것만 같아 두렵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삶의 수레바퀴는 여지없이 돌아가 한 챕터가 끝나면 다음 챕터로 우리를 안내합니다. 거실 벽에 수줍게 걸린 작은 해바라기 판화 액자를 바라보다, 문득 '9월의 해바라기'를 떠올렸습니다.

보통 해바라기라고 하면 태양, 희망, 일편단심, 혹은 고흐의 강렬한 노란색을 연상합니다. 이름 그대로 '해만 바라보는' 기다림과 충성의 이미지가 강하지요. 제게도 해바라기에 얽힌 웃지 못할 추억이 있습니다. 고교 시절, 소피아 로렌 주연의 영화 〈해바라기〉를 보러 갔다가 학생 주임 선생님이 순찰하신다는 말에 겁을 먹고 발길을 돌려야 했던 일입니다.

40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보게 된 그 영화는 광활한 대지를 배경으로 한 전쟁과 이별,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였습니다. 영화 <닥터 지바고>가 하얀 눈 덮인 대지를 보여준다면, 이 영화는 온통 노란 해바라기가 가득 핀 서글픈 들판을 보여줍니다. 밝은 꽃들과 대조적으로 화면을 채우던 전사자들의 회색 무덤들 때문인지, 제게 해바라기는 풍요보다는 고독과 아픔으로 먼저 다가왔습니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해바라기를 가까이하지 않았습니다. 고흐의 그림 속 해바라기에서도 밝음 뒤에 숨은 좌절과 예술을 향한 애처로운 열망이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빛을 향한 해바라기의 몸부림이 어쩌면 우리 삶의 자화상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닿을 수 없는 대상을 갈구하는 그 숙명이 아내로, 엄마로 살아온 제 모습과도 닮아 있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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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의 방문에 걸어 둔 해바라기 벽걸이 : 아들 바라기 시절의 흔적) "한여름의 뜨거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던 해바라기는 이제 집착의 시기를 지나 결실의 계절로 향합니다. 내 삶의 바느질 또한 누군가를 바라보던 마음에서 나를 돌보는 마음으로 깊어갑니다."


여름의 해바라기가 태양이라는 대상에 매달리며 집착하듯 살았다면, 9월의 해바라기는 그 뜨거움에서 자유로워져 성숙한 태도를 지니게 됩니다. 이제 더 이상 태양을 향해 고개를 꺾지 않고, 가을이라는 거대한 우주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씨앗을 맺는 일에 집중합니다. 운명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지혜를 발휘하는 것이지요.

태양만 바라보던 시선이 비로소 자신의 내면으로 향할 때, 해바라기는 절대적인 의존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자아로 우뚝 서게 됩니다. 찬란한 아름다움은 시들겠지만, 다시 씨앗을 남겨 또 다른 곳에서 자신의 모습으로 세상을 바라볼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9월은 과거에 붙잡혀 현재를 방해받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기에 좋은 달입니다. 변화와 이별을 거부하는 집착은 청명한 가을바람을 품을 행복을 놓치게 만듭니다. 해바라기가 우리의 청춘과 열정이었다면, 중년의 우리는 이제 이 가을의 성숙과 겸손을 배워야 할 때입니다.

"떠나야 할 때를 아는 지혜는 집착을 버리는 용기에서 나온다"고 말하는 9월의 해바라기가 고맙습니다. 태양은 항상 그 자리에 있을 뿐이니, 제가 만든 집착과 '바라기'의 마음을 이제는 조용히 놓아주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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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물 받은 판화 속 해바라기가 제게 말을 건넵니다. 이제는 고개를 숙여 네 안의 씨앗을 보살피라고, 그것이 진정한 가을의 완성이라고요."


그나저나, 엄지손가락이 아파도 바늘을 놓지 못하는 이 '퀼트 바라기'의 집착은 대체 언제쯤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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