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_ X의 화딱지'

제3장: 받아적는 놈, 앞서가는 놈

by 박중근

민후의 아침은 여느 때처럼 오전 7시, 사무실의 정적을 깨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익숙하게 낡은 가죽 수첩을 펴고 오늘의 할 일을 정갈하게 적어 내려갔다.


15년 전 진정한 부장님께 배운 습관이었다. "민후야, 리더의 기억력은 휘발성이지만, 기록은 영구적인 자산이다. 받아적는 놈이 결국 앞서가는 놈이야. 적자생존을 기억해. 적는자가 생존한다" 마지막에 썰렁한 아재개그로 마무리하긴 했지만 그 가르침 덕분에 민후는 지금의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오전 10시, 팀 주간 회의 시간. 민후는 화이트보드 앞에 서서 열변을 토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자꾸만 예인 씨의 빈 손등으로 향했다. 예인 씨는 펜 한 자루 쥐지 않은 채, 턱을 괸 채 민후의 말을 눈으로만 쫓고 있었다.


“예인 씨, 내가 지금 하는 말 다 받아적고 있는 거 맞죠? 메모 안 해요?”


민후의 말투에 날이 섰다. 예인 씨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스마트폰을 톡톡 두드렸다.


“아, 팀장님. 제 머릿속에 다 입력됐어요. 필요하면 녹음도 하고 있고요. 요즘 누가 수첩에 일일이 다 적나요?”

민후는 뒷목이 당겼다. ‘받아적는 정성’이 곧 ‘업무에 대한 태도’라고 믿어온 그에게 예인 씨의 태도는 오만함 그 자체였다. 그때, 회의실 유리창 너머로 마 팀장이 자기 팀원에게 수첩을 집어 던지는 장면이 목격되었다.


“야! 내가 말할 때 토 달지 말고 다 적으라고 했지! 너 같은 놈들은 손이라도 부지런해야 밥값이라도 할 거 아냐! 네 머리를 믿지 말고 내 입을 믿어, 인마!”


마 팀장의 고함에 민후는 묘한 동질감을 느꼈다. '그래, 마 팀장 말이 거칠긴 해도 본질은 맞지. 리더의 경험을 고스란히 옮겨 적는 게 성장의 지름길인데.' 민후는 예인 씨를 향해 차갑게 덧붙였다. “예인 씨, 내일부터는 꼭 수첩 지참하세요. 기록하지 않는 리더는 없습니다.”


그날 밤, 민후는 거실에서 수첩을 정리하며 씩씩거렸다. 그때 미로가 소파 위로 폴짝 뛰어올라 민후의 수첩을 앞발로 툭 쳤다.


“강 팀장, 그 수첩이 자기를 성공시킨 보물지도라는 건 인정해. 근데 말이야, 지금은 그게 눈을 가리는 안대가 된 거 아냐?”


민후는 펜을 내려놓으며 반박했다. “기록은 존중이야, 미로야. 상사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라고.”


미로가 코웃음을 쳤다.


“적는 게 존중이면, 그걸 똑같이 하라고 강요하는 건 '박제'지. 강 팀장, ‘코이(Koi)’라는 물고기 얘기 들어봤어? 작은 어항에 넣으면 5cm밖에 안 자라지만, 넓은 강물에 풀어주면 1m가 넘는 대어가 되는 놈이야.”


“물고기 얘기는 갑자기 왜?”


“강 팀장의 그 낡은 수첩이 예인 씨에게는 너무 좁은 어항일 수도 있다는 뜻이야. 리더가 내가 걸어온 길을 그대로 복제하라고 강요하는 순간, 예인 씨는 절대 강 팀장보다 큰 물고기가 될 수 없어. 리더는 자기 수첩 속에 직원을 가두는 사람이 아니라, 수첩을 덮고 직원이 헤엄칠 강물을 보여주는 사람이어야지.”


민후는 수첩의 빳빳한 종이 질감을 만져보았다. 마 팀장은 팀원들을 자신의 손바닥 안에 가두려 했고, 자신 역시 '기록'이라는 명목으로 예인 씨의 사고방식을 통제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마 팀장 봐봐. 팀원들 수첩에 마팀장 욕설만 가득 채우고 있잖아. C를 쓰고 옆에 발도 그리고. 강 팀장은 부디 그러지 마. 예인 씨가 자기만의 방식으로 강물을 헤엄치게 둬봐. 그러다 폭포를 만나면 그때 강 팀장이 잡아주면 되는 거니까.”


미로는 민후의 수첩 위에 턱을 괴고 잠을 청했다. 민후는 예인 씨에게 수첩을 강요하던 자신의 경직된 손가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받아적는 놈이 앞서가는 시대는 끝났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앞서가게 판을 깔아주는 놈이 진짜 리더인 시대였다.



� 미로의 한마디: "수첩에 빼곡한 글씨보다 무서운 건, 그 글씨 속에 갇힌 빼곡이 들어찬 낡은 생각이야. 팀원의 손에 펜을 쥐여주기 전에, 먼저 그들의 눈 앞에 넓은 지도를 펼쳐줘 봐. 코이는 강물에서 자랄 때 가장 아름답거든.“


적자생존: 적는 자가 생존한다.


적는 습관이 나의 생각을 시각화하고 타인에게

쉽게 설명할 수 있게 도움을 준다.

리더를 꿈꾼다면 자신의 생각을 제대로 쉽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지시를 제대로 못하면 가짜 일을 시키게 된다.

왜냐면 같은 일을 다시 해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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