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한 불편함

by 주댕맘

3일간 아이를 지켜보는 내내 내 몸과 마음은 자꾸 한발 앞선다.


익숙함과 편안함과 사랑의 마음을 담아 아이가 하기도 전에 내가 먼저 해주려는 행동에 멈칫한다. 아이 가방에 넣을 물통을 정수기 아래로 받치다, 아차. 아이 입을 태권도복을 꺼내러 옷장 문을 열다, 아차. 아이 얼굴에 바를 선스틱을 꺼내다, 아차. 멈춘 채 이야기로 대신 한다. 물통 챙겨, 태권도복 입어, 선스틱 발라. 그리고 이 말마저 줄여가야지 싶다.


아이랑 영어 텀테스트 준비를 위해 나란히 침대에 앉았다. 예전 같으면 내 핸드폰 일정에 시험분량을 나눠 적고 나 혼자 기억하고 아이를 다그쳤을텐데. 이젠 그렇게 하지 않는다. 종이 하나와 연필 하나를 꺼내 아이에게 내민다. 텀테스트 몇 일 남았어? 4일. 그럼 종이를 네 등분해서 접어. 접혀진 칸에 날짜를 하나씩 적어. 여기에 시험 분량 확인해서 니가 할 수 있을만큼 적어봐. 혼자 골똘히 생각하더니, 나름의 계획을 써내려간다.


이거 어때?
좋네.
최대한 지켜보려고 하고, 못한 건 다른 날짜로 옮겨가며 해봐.


내 마음은 사실 그것과 다르게 적어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자기가 결정한 것에 책임을 지길 바라면서. 실천하지 못하는 것들을 또 마주한 다음에 온갖 징징거림을 들어야 할 수도 있지만, 그조차도 해보면서 알게 되길 바라면서.


그럼 오늘 해야 할 건 뭐야?

단어 외우는거랑 소설 워크시트 전체 읽어보는 거.

그래, 해봐. 모르는건 물어보고.


옆에 끼고 하나하나 짚어가며 달래가며 가르쳐 줄 줄 알았던 엄마가 이제 모르쇠로 일관하자, 얼굴이 하얗다. 그래도 아직 남은 3일의 계획을 보고, 다시 단어장을 펼친다.


엄마, 나 이거 테스트 해줘.

그래.

이 중에 요 세 개는 정말 외울 수 없을 것 같아.

그럼 그런건 스킵해.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해.

알겠어.


아이는 이 많은 걸 언제 다하나 싶은 한숨 섞인 얼굴로, 생각보다 꾀나 걸린 시간으로, 지쳐갔다. 아이 곁에 앉아 그 과정 모두를 감독하는 대신, 집안일을 하며, 때로는 책을 읽으며, 거리를 두고 그 공간 안에 머물렀다. 모르면 찾아오도록.


점차 마무리해갈 분량이 줄어가자, 안도하는 얼굴.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가 계획한 다 끝냈고, 아직 자기 전 놀 시간이 두 시간 넘게 남았음에 기뻐하는 얼굴.


엄마, 아직 일곱시야.

그래, 어때 해보니까.

할 만했어.

잘했어.

내일 계획은 뭐야.

다음 단어랑 문법이야.

그래, 그것도 니가 잘 챙겨.

응.

이제 뭐할거야?

남은 시간은 같이 영화 볼까?

그래.


일본 도쿄의 풍경을 볼 수 있는. 그리고 아주 잔잔한 일상을 성실하게 살아가는 남자 이야기. 마지막 남자의 눈물 가득한 눈과 미소를 머금은 입을 보며 물었다.


저 남자, 슬픈 것 같아, 기쁜 것 같아?

내 생각엔 슬픈 게 더 큰 것 같아.


미주알 고주알 영화 장면마다 곱씹으며 잠자리에 누운 아들. 오늘도 이마에 잘자라고 입맞춰준다.


엄마, 오늘은 같이 자면 안돼?
응, 안돼. 내일 행복하게 만나.
응.


불을 끄고 나온다.


아주 따뜻한 온실 속에서 문을 열고 나와, 커다란 울타리가 쳐진 곳에 아이가 있다. 비바람을 직접 맞되, 큰 재앙은 막아주는 울타리. 그리고 필요하면 언제고 다시금 발을 들여 따뜻하게 몸을 녹일 온실이 그 자리에 있다. 그 중간지대에서 아이가 안전한 불편감을 느끼도록, 그 불편감을 견디고 이겨내보도록. 이후 울타리 밖 더 차갑고도 커다란 세상으로 나아가도록.


그 불편함을 엄마인 내가 예방접종 놓듯, 아플 걸 알면서 주기. 더 단단해질 너를 그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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