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 마그리트, <골콩드 Golconde>
“세상에 반은 남자라잖아.”
나를 위로 해준다며 친구, 세아가 내뱉은 말이었다. 그 말에 나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맞는말이다. 세상에 반이 남자이다. 주륵주륵 내리는 저 비처럼 세상천지 넘치는 것이 남자다. 그러니 나를 떠난 빗방울 하나, 남자 하나에 이리 울 필요 없을 일이다. 그러나 어쩐지 먹먹한 마음이 나아지지 않아 나는 다시금 소주 한잔을 들이켰다. 알콜의 알싸함이 심장을 잠시 시원하게 해주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아니, 오히려 더 외로운 기분이 되어 버린다.
“야, 그러지 말고 내가 남자 소개 시켜줄게. 세상에 남자가 걔 하나 뿐이라니?”
세아는 여전히 울적히 가라앉은 내게 말한다.
“싫어. 난 자만추거든.”
나는 농담반, 진단반으로 장난스레 세아에게 말했다. 사랑은 내리는 저 비와 같다. 하늘에서 미친 듯이 쏟아져 내리지만 저 내리는 비가 산성비는 아닐까, 혹 비를 맞다가 감기라도 걸리거나 잘못 벼락이라도 맞을까 우산을 쓰고 나를 가린다. 하지만 그러다 우산을 들고 오지 않은 날에 비가 내리면 결국 홀딱 젖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래, 내게 사랑은 그런 것이었다. 예상치 못하게 나를 찾아와 엉망으로 만들고는 사라져버리는 것, 지금도 봐라. 주륵주륵 쉴틈 없이 내리던 비가 어느새 그쳐 해가 쨍쨍했다.
“야, 대낮부터 이게 무슨 주접이냐.”
세아는 날 어르고 달래다가 이제 안되겠는지 나무라기 시작한다.
“그러지말고 여기 좀 봐봐.”
그녀는 인스타를 보여주며 말한다. 마당발인 그녀의 인간관계는 나로서는 거대한 미로같이 느껴졌다. 세아는 내게 이 남자, 저 남자를 보여주며 어떠냐고 묻기 시작했다. 모두 나무랄 것 없는 이들이었다. 그러나 난 이미 우산을 써버렸는 걸. 굳게 닫힌 맘을 숨긴 채 나는 세아의 물음에 대충 답을 해주었다. 그러다 문득, 익숙한 얼굴이 보여 나도 모르게 굳어버렸다.
“어?”
나도 모르게 나간 목소리에 세아도 다시 휴대폰을 확인한다.
“이승민, 얘 좋지.”
“응, 나 얘 알아.”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내려 했는데 어쩐지 볼이 붉으스름해지는 건 술 때문인지 어린 시절 설렘이 떠올라서 인지는 모르겠다.
“응? 승민이랑 아는 사이였어?”
“그냥 같은 중학교를 다녔었거든.”
난 대수롭지 않은 듯 말했다. 이승민, 내 어린 풋 사랑의 주인공이었다. 몽글몽글한 어릴적 기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헤에, 그래서 한 번 만남을 추진해봐?”
세아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다.
“됐어. 그냥 친구야.”
나는 웃으며 손사레쳤다. 그러자 세아는 아쉽다는 듯 본인이 입맛을 다신다.
“아아, 그래서 넌 헤어진지 며칠이 지나도록 혼자 술이나 마시겠다고?”
“난 자만추라니까.”
장난스레 말하며 난 다시 밖을 바라보았다. 소나기가 지나간 건지 맑게 겐 하늘은 푸르기만 하다. 그렇게 몇 번을 세아와 장난스러운 농담을 주고 받다 나는 집으로 향했다.
***
취할 정도로 마신 것도 아닌데 어쩐지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아마 내리는 햇볕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훅훅-하며 오르막길을 걷는데 익숙한 사진이 실체가 되어 걸어오고 있었다. 이승민이었다.
이게 우연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모르겠다. 아는 체할까, 그냥 지나갈까를 잠시 고민하다는데 날 마주하기 전에 골목길로 들어서는 승민을 보니 굳이 마주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안도와 섭섭한 마음이 동시에 들며 나는 다시 집으로 가는 길에 멈춰 섰다.
오르막길이 힘들어서 일까, 아까 본 하늘이 예뻐서 일까, 문득 하늘을 바라보았다.
무심한 하늘 놈은 뻔뻔스러운 얼굴로 푸르기만 하다. 비는 한점도 내릴 것 같지가 않다. 그저 아까 내렸던 빗물이 바닥에 고여 진흙탕이 되어 있을 따름이다. 나는 문득 하늘을 보던 시선을 내려 바닥을 바라보았다. 흙탕물이 첨벙거리며 발걸음을 붙든다. 다시금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흙탕물 하나에 물장구치며 놀던 시절들, 티 하나 없던 웃음들, 붉게 물든 볼따구와 순수한 마음은 어린시절에만 가질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때는 왜 별 것 아닌 것도 재밌고 행복했는지 모를 일이다. 나는 다시금 승민이 향했던 골목을 바라보았다. 멀찍이 사라졌을 줄 알았던 그는 여직 뒷통수가 보였다. 걸음이 느리네. 여상스러운 생각을 하며 나도 모르게 그쪽으로 한걸음 걸었다. 자연스러운 만남, 그것도 좋지만 가끔은 내가 일으키는 물장난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며 익숙한 뒷모습을 쫓았다.
아마 이 이후의 이야기는 익숙하지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