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관하여]백년만의깨달음
사랑을 깨닫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
잭은 한심한 사내였다. 그는 부유한 집안환경과 누구보다 금실 좋은 디렌가의 외동아들로 태어났으나 안타깝게도 그는 그다지 올바르게 크지는 않았다. 잭은 거짓말을 일삼고 배움을 경시했으며 주변의 모든 이들을 자신보다 낮게 여겼다. 그런 그를 좋아하기란 싶지 않은 일 같지만 놀랍게도 그를 좋아하는 이들은 꽤 많았다. 물론 그들은 잭과 함께 한심하다로 일컬어지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단 그 중에 단 한명, 릴리는 그렇지 않았다. 릴리는 마을의 빼어난 미인이자 뛰어난 과학자였다. 또한 겸손하고 상냥한 그녀는 마음 또한 고왔고 여러모로 잭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그녀는 잭을 사랑했다. 그녀는 잭은 거짓말을 뛰어난 언변이라 말하고 배움을 경시하는 태도를 자유로움이라 말했으며 그의 오만함은 자존감이라 생각했다. 전혀 다른 둘은 연인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잭과 릴리의 관계를 못마땅하게 여겼고 잭을 비난했다. 잭은 세상에게 당한 모욕을 릴리에게 고함을 지르며 풀고 있었다.
“다 너 때문이야! 난 널 좋아한적도 없는데 말이야. 사람들도 웃기지. 네가 내게 매달리는 것도 모르고 다들 네 편이니 말이야. 솔직히 말해봐. 네가 소문 낸거 아니야?”
잭은 릴리를 보고 잔뜩 인상을 찌푸린 채 말했다. 릴리는 당황스러운 얼굴로 잭을 바라보다가 울먹였다.
“잭, 그만해. 사람들의 말은 신경쓰지 않아도 되잖아.”
잭은 그런 릴리를 보고도 화가 풀리지 않는지 씩씩대었다. 잭은 아름다웠던 릴리른 보자 더 자신의 꼴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신경질적으로 쓰레기통을 걷어 차며 잭은 자신의 감정을 표출했다.
“젠장! 망할 인간들. 하여간 인간은 다 한심하다니까.”
잭은 잔뜩 성이 나 중얼거렸다. 잭은 부모님이 죽고 재산을 도박에 탕진했고 아무 벌이도 없었다. 그는 허풍이 잔뜩 들어간 소설을 지으며 자신을 예술가라 칭했다. 그러나 아무도 한심한 사내, 잭의 책을 사는 이는 없었다.
“이 세상은 나를 알아주지 않아!”
잭은 분노로 소리쳤다. 그는 자신이 찬 쓰레기통에서 나온 종이들을 다시 한번 걷어찼다. 종이 한 장이 펄럭 위로 날아오르며 잭은 무릎에 앉았다. 잭은 더 화가나 종이를 잡고 바닥에 내치려는데 구겨진 종이에 묘한 문구가 눈에 띄어 종이를 펴보았다.
“새로운 세상에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잭은 허풍만큼이나 우스운 이야기였지만 잭에게는 흥미가 돋았다.
“이게 뭐야?”
잭이 묻자 릴리가 놀라 다가왔다.
“아, 이건 지금 연구 중인 실험이야. 냉동인간으로 백년 후에 깨어나기 위한 연구지. 이걸로 돈을 많이 벌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을거야. 그러니 걱정하지마.”
릴리는 여전히 상냥하게 잭에게 말했다. 잭은 그녀의 말은 제대로 듣지 않은 채 다시 종이를 보고 소리쳤다.
“그래! 이거야! 이거면 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
잭은 냉동인간이 되기 위해 기기에 누워있었다. 잭이 릴리에게 며칠간 조르고 조른 결과였다. 기기는 마치 투명한 관처럼 크고 편안했다. 릴리는 창백하게 희어진 얼굴로 잭을 바라보았다.
“잭, 정말 후회하지 않겠어?”
다시금 릴리는 물었지만 잭은 변함이 없었다. 릴리는 슬픈 얼굴로 투명한 뚜껑을 덮으며 잭과의 마지막인사를 고했다.
“안녕, 잭. 다시 만난 세계는 너를 사랑하길 바래. 그리고 너도 그때에는...”
릴리는 나지막히 말하며 기기의 전원을 켰다. 잭의 몸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릴리는 투명한 기기에 손을 얹으며 잭을 바라보았다. 잭의 모습은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릴리는 잭이 미워졌다. 그러나 잭은 백년 후에나 깨어날 수 있을 것이다. 릴리는 잭을 두고 밖으로 나갔다.
***
백년 후, 드디어 잭은 깨어났다. 그리고 그런 잭을 보기 위한 기자들과 구경꾼들이 모여 있었다. 릴리, 아니, 이제는 릴리의 증손녀인 이사벨라의 연구실은 사람들로 가득찼다. 냉동인간이 된 잭을 백년전 사람들은 실종이라 여겼다. 잭을 찾는 이들에 의해 릴리의 ‘냉동인간 기기’는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그 후 냉동인간 잭은 유명인이 되었다. 물론 이제 릴리 세대의 사람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후손들은 냉동인간이 깨어나는 것을 목도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마치 겨울에 따스한 볕이 내리는 것처럼 오묘한 일이었다. 얼어붙었던 잭의 얼굴에 조금씩 생기가 돋더니 잭이 눈을 뜬 것이다.
“와! 정말이다! 100년전 사람이 눈을 떴어!”
사람들은 소리쳤고 기자들은 사진을 찍기 바빴다. 막 눈을 뜬 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다 웃음 지었다. 드디어 잭이 원하던 세상에 온 것이었다. 그들은 잭을 보고 환호했다. 그들 눈에 잭은 마치 현묘한 과거의 현자라 여겨졌다. 게다가 잭의 외향만은 분명 아름다운 사내였다. 그는 고동색 눈으로 자신에게 환호하는 이들에게 인사했다. 그러나 그런 그를 못마땅하게 보는 여인이 있었다. 릴리의 딸의 아들의 딸, 즉 릴리의 증손녀인 이사벨라이다.
“어? 릴리?”
멀직한 곳에서 자신을 보고 있는 이사벨라를 발견한 잭은 깜짝 놀랐다. 그러나 이내 그녀가 릴리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챘다. 분명 너무나도 닮았지만 릴리는 저렇게 차가운 눈으로 자신을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서였다. 잭은 이사벨라의 후손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닫고 이사벨라에게 걸어갔다. 싸한 눈으로 잭을 보던 이사벨라는 불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너는... 릴리의?”
“...증소녀에요.”
이사벨라는 차갑게 대답했다. 잭은 이사벨라를 빤히 보았다. 그는 이사벨라를 보며 릴리를 떠올려보았다. 그는 그녀의 푸른 눈이 슬픔으로 젖어가던 것을 기억했다.
“이제 깨어났으면 그만 이곳을 나가요. 여긴 대대로 우리 집안의 연구소로 사용되었어요. 당신은 그 연구소에 돈 한 푼 안내고 100년을 살았으니 이제 그만 나갈 때도 되었죠.”
“...릴리는 날 내쫓지 않았을거야.”
잭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이사벨라는 인상을 찌푸렸다.
“난 릴리 할머니가 아니라 이사벨라에요. 그리고 당신이 나가길 바래요.”
잭은 그런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실상 잭은 유명인이었기에 갈 곳은 많았다. 사람들은 잭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잭은 그들의 집에서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본래 잭은 오만한 인간이었다. 그런 오만한 사내는 자신을 추종하는 눈빛으로 쫓는 이들을 보며 만족감을 얻을지언정 그들 자체를 좋아하지는 않는다.
“릴리의 손녀라면서 날 내쫓겠다고? 애초에 릴리가 이 곳을 마련한 건 날 냉동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였어.”
“증조할머니는 돌아가셨어요.”
“하지만 그 후손인 넌 살아있지.”
그러다 문득 잭은 릴리가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녀가 자신을 잊고 결혼을 했었다니. 잭은 이사벨라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았다.
“릴리는 누구와 결혼했지?”
누구라도 놀랍지는 않았다. 릴리는 마을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아가씨였다. 잭의 심장의 얼음이 잭을 콕콕 찌르는 것 같았다.
“그게 왜 궁금하죠?”
“딱히 궁금한 건 아니야.”
잭은 이사벨라의 눈을 보며 말했다. 어쩐지 시선이 가는 눈이었다.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깊은 눈동자의 잭은 넋을 놓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잭, 앞으로 이사벨라의 집에서 지내게 되는 겁니까?”
기자 한명이 잭에게 물었다. 이사벨라가 말도 안되는 소리라고 소리치려 했으나 잭이 더 빨랐다.
“네, 그럴 겁니다. 이사벨라는 제 친구의 후손이니 절 잘 보살펴 줄 겁니다. 제 친구, 릴리의 후손이니 그녀만큼 마음씨 따스한 아가씨겠죠.”
잭의 말에 이사벨라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가여운 증조할머니를 생각하며 이사벨라는 결국 잭을 집에 들이게 되었다.
***
잭은 처음에는 즐거웠었다. 아니, 즐겁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오래 가지 못했다. 잭에 대한 사람들의 환호와 관심도 조금씩 줄어갔다. 그러나 잭이 즐거움을 잃은 것은 그 때문은 아니었다. 잭은 돈을 벌었고 우스운 허풍으로 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잭은 심장 한켠의 고통으로 밤마다 잠을 자지 못했다.
“릴리, 그게 나한테 무슨 짓을 한 게 틀림없어.”
잭은 릴리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며 욱신거리는 심장을 보여잡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고통스러울리 없다 생각한 잭은 벽난로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여전했다. 잭은 답답하게 조여오는 통증에 숨을 훅훅- 몰아 쉴 뿐이었다.
“릴리, 릴리, 릴리!!!”
잭은 소리쳤고 그 소리에 깜짝 놀라 잠이 깬 이사벨라가 잭의 방문을 열었다.
“제발 조용히 좀 해요!”
이사벨라의 짜증어린 목소리에 잭은 놀라 토끼 눈을 하고 이사벨라를 보았다. 제멋대로 인생을 살아 온 잭은 어쩐지 이사벨라 앞에서는 종종 작아지고는 했다. 처음 잭은 그것이 자신이 그녀의 집에서 신세지고 있어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쩐지 지금은 릴리를 닮은 저 외모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것 또한 릴리가 자신에게 부린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잭은 인상을 잔뜩 쓰고는 이사벨라를 노려보았다.
“젠장할! 이게 다 네 증조할머니, 릴리 때문이라고!”
잭은 화가 나 소리쳤다. 백년, 백년이 지나 세상 한심한 사내이던 잭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는 과거에서 온 현자로 변모했다. 그는 부와 명예를 얻었고, 문명의 발전으로 더 많은 즐거움을 누렸다. 허나 부족했다. 잭은 어쩌면 백년이 아닌 더 뒤로 갔어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의 가슴통증은 이제 폐속까지 밀려들었다. 그가 숨을 들이 쉴 때면 허망이라는 바람이 그의 몸 속에 파고들었다.
“왜 그래요? 어디 아픈거에요?”
이사벨라는 내심 걱정이 되었는지 잭에게 다가왔다.
“저리 치워!”
잭이 놀란 듯 그녀의 손을 쳐냈다.
“뭐에요? 걱정해줬더니... 역시 당신 같은 사람을 신경쓰는 게 아니였는데. 증조 할머니도 참 불쌍하지. 당신같은 사람을 사랑했다니.”
“뭐?”
이사벨라의 눈에 잭이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뭐가요?”
“너 릴리를 알아?”
이사벨라는 릴리를 한 번도 본적 없었다. 그러니 릴리를 알리 만무하다. 허나 재밌게도 이사벨라는 릴리를 알았다. 실제로 만난 적은 없지만 릴리는 일기를 남겼고 그걸 읽은 건 이사벨라였다. 그래서 이사벨라는 잭을 미워했다. 자신의 증조할머니를 마음 아프게 한 멍청한 남자니까.
“...할머니의 일기를 읽었으니 아예 모르지는 않죠.”
잭은 그제야 저녁이면 늘 일기를 쓰던 릴리의 모습을 떠올렸다.
“릴리가 내 이야기를 썼나?”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그 말에 잭은 말문이 막혀 대답하지 못했다. 그랬다. 자신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잭은 늘 일기 쓰던 릴리를 보며 쓸대없는 일은 한다고 타박하곤 했다. 잭은 다시금 통증을 느꼈다.
“릴리.”
릴리의 고동색 눈동자는 언제나 잭에게 편안함을 주고는 했다. 잭은 그것이 그녀의 짙은 갈색 눈이 마치 숲의 나무 색과 같아서 마음이 편해진다 여겼다. 그러나 잭은 이제야 깨달았다. 그런 이유가 아니다. 릴리를 보면 마음이 편해졌던 것도 지금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도 릴리의 탓이 아니었다. 그건 잭, 본인의 문제였다. 아니, 문제랄 것은 없었다. 단지 잭은 자신의 아둔하고 어리석은 사랑을 이제야 깨달은 것 뿐이니 말이다. 백년 전, 그는 아무 것도 아닌 볼품 없는 모든 것을 다 잃은 사내였다. 그때에 그를 사랑한 건 릴리 뿐이었다. 백년 후, 잭은 유명 인사가 되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내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볼품 없었다. 그는 왜 자신이 백년 후로 왔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되고 싶었다. 대단한 사내가. 그러나 그 이유를 깨닫지 못하고 와버렸다. 그리고 백년 후에 깨달아 버렸다. 참으로 어리석은, 역시나 한심한 사내였다.
“릴리는 나를 원망했겠지?”
잭의 풀이 죽은 목소리에 이사벨라가 별 꼴이라는 듯 그를 보았다. 악을 쓰더니 갑자기 죽을 사람처럼 쪼그라 든 그가 우스웠다.
“...신기하게도 그러지 않았어요.”
이사벨라의 말은 사실이었다. 릴리는 슬펐지만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잭은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고 릴리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게됬었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미어졌다. 잭은 자리에 벌떡 일어났다. 그는 처벅처벅 집 밖으로 나왔다. 밖은 비가 오고 있었고 잭은 신도 신지 않고 진흙밭이 된 땅을 걸어나갔다. 그 꼴을 보던 이사벨라가 놀라 뒤쫓아 나왔다.
“미쳤어요? 어딜가려고요?”
“됐어. 난 이제 떠나겠어. 그동안 살게 해준 건 고맙지만 이제 됐어.”
잭의 달라진 눈빛에 이사벨라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대체 저 놈의 인간은 어찌된 인간이기에 저리 지멋대로인 걸까. 이사벨라는 잭을 향해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잭을 뒤쫓았다. 잭은 이사벨라를 신경쓰지 않고 강가로 걸어갔다. 흐르는 비에 강은 이미 제 땅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더 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것을 보던 잭은 그 모습이 마치 자신과 같다고 생각했다.
“그만가요. 이제 위험해요!”
소리치는 이사벨라의 목소리도 빗소리에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넌 날 미워하면서 왜 날 살려두려고 해?”
잭은 이사벨라를 보며 릴리에게 말하듯 물었다. 그러나 그 작은 목소리는 이사벨라에게 닿지 못했다. 잭은 점점 더 물에 가까워졌다. 그는 이 고통스럽고 불타는 심장을 멈출 길은 죽음 뿐이라 생각했다.
“젠장할!!!”
이사벨라는 더 이상 어쩔 수 없다는 듯 달려와 잭을 끌어안고 막았다.
“저리가. 넌 나랑 상관없잖아.”
잭은 이사벨라를 밀어냈다. 이사벨라는 이를 악물었다.
“어서 가. 괜히 너까지 휘말리지 말고. 릴리에 이어 릴리의 자손까지 나와 엮일 필요는 없지.”
“이미 엮였어요!”
“이제라도 끊으면 될 일이야.”
잭이 무심히 말했다.
“아무리 망나니라지만 혈연도 끊어내려고요?”
“뭐?”
잭이 그제야 멈춰섰다.
“빌어먹을, 그래요. 당신이 내 증조 할아버지에요. 증조 할머니, 릴리는 당신이 냉동인간이 될 시기에 내 할머니이자 당신의 딸인 이자벨를 임신했었으니까요. 증조 할머니는 당신이 당신의 자손들을 만나기를 기다렸어요. 비록 자신과는 다신 만나지 못하더라도.”
잭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이사벨라를 보았다. 잭은 죄악감으로 몸이 흠뻑 젖어 바닥에 주저 앉고 말았다. 그는 으으으-소리를 내며 한참을 괴로워했다. 릴리,릴리. 그는 몇 번이고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제야 그는 입맛이 없다던,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을 보던 그녀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릴리 할머니도 그걸 원할 거에요.”
이사벨라는 자신의 증조 할아버지, 잭을 바라보았다. 이사벨라는 잭이 싫었다. 멍청하고 어리석고 오만한 사내라 생각했다. 왜 자신의 증조할머니는 저런 사내를 사랑했던 걸까 라고 항상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늘 무기질의 눈을 하고 오만함, 거짓으로 잔뜩 둘러쌓여 있던 사내의 진심을,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던 사내의 사랑을 보면 누구라도 마음이 흔들릴 수 밖에 없었다. 릴리는 분명 잭의 사랑을 알았을 것이다.
“릴리, 넌 내게 뭘 어쩌라는 거야.”
잭은 괴로웠다. 괴롭고 괴로웠다. 그는 눈을 들어 자신의 증손녀인 이사벨라를 바라보았다. 그는 인정했다. 자신은 살아가야 했다. 릴리가 보내 준 자신의 가족을 위해, 릴리가 사랑하는 본인 그 자신을 위해, 릴리를 위해, 그는 이제 한심한 사내에서 벗어나 드디어 눈을 뜰 때였다. 한 한심한 사내가 사랑을 깨닫는 것은 백년, 백년이 걸린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