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산부 배려석

배려는 자리를 비우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내어주는 일

by 양지드림

임신 9개월 차, 거울 앞에 선 나는 하루하루 커져가는 배를 바라보며 새삼 생명의 무게를 실감하곤 한다. 주변 사람들은 종종 “배가 정말 많이 나왔어요”라며 놀란 눈으로 말을 건넨다. 주로 자가용을 이용해 이동해온 나에게 대중교통은 오랫동안 낯선 세계였다. 하지만 출산휴직에 들어온 후, 맑고 화창한 날씨에 이끌려 간만에 지하철을 타보기로 마음먹었다. 가족들은 “택시를 타는 게 낫지 않겠어?”라고 걱정했지만, 나는 “요즘엔 임산부 배려석도 많고 괜찮아요. 오히려 이게 더 편할 수 있어요”라며 안심시켰다. 사실 장시간 운전은 임산에게 좋지 않다는 말도 있으니, 대중교통이 더 안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오늘, 그 생각은 조용히 무너졌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뒤뚱뒤뚱 조심스럽게 탑승한 나는, 가장 먼저 임산부 배려석을 찾았다. 그 자리는 이미 다양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흰 머리의 어르신, 교복을 입은 학생, 그리고 아무리 봐도 건장한 청년까지. ‘혹시 저 친구도 임신 중일 수 있겠지’라는 억지 낙관 속에 말을 아꼈지만, 자리는 쉽게 비워지지 않았다.


나는 그 앞에서 가만히 섰다. 임산부 배려석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지만, 사람들은 무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청년은 휴대폰 화면을 응시하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나는 속으로 문득 기대했다. 누군가가 “저기요, 임산부가 계신데 자리 좀 비켜주세요”라고 말해주기를. 마치 드라마 속 시민 영웅처럼.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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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고개를 숙이고, 귀를 막고, 눈을 돌렸다. 나 역시 그에게 직접 말을 걸지 못했다. 이미 배려석에 앉아 있는 그가, 임산부를 마주하고도 요동 하나 없는 모습을 보며, ‘이 사람에게 말해 뭐하나’ 하는 무력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버스로 갈아타면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임산부 배려석에는 비교적 건강해 보이는 중년 여성들이 앉아 있었고,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지하철보다 훨씬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나는 다리에 무리가 가고 중심을 잃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배가 불룩한 내 몸은 평소보다 훨씬 더 위태로웠다. 그제야 절실히 느껴졌다. 이 배려석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안전’을 위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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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버스를 타고 15분쯤 지났을까, 한 노인이 내 앞에서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가씨, 여기에라도 앉아요. 내가 못 보겠어. 아니야, 여기 앉아요.”
나는 여러 번 사양했다. “정말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노인은 끝내 자리를 내어주셨다. 그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노약자가 노약자석을 내어주는 현실 속에서, 임산부 배려석에 앉은 이들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젊고 건강한 이들로 가득한 일반석에서도 누구 하나 내게 손 내미는 이는 없었다.

슬프게도, 오늘 내가 마주한 사회는 ‘배려’를 말로만 하는 사회였다.

그 누구도 법적으로 나에게 자리를 양보할 의무는 없다. 장애인 주차구역처럼 강제력이 있는 제도도 아니다. 그러나 임산부 배려석의 본질은 임산부의 편의가 아니라, 태아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다. 유산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서서 이동하지 않도록 만든 자리다.


간혹 “임산부 배려석은 없어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그런 말조차, “그 자리를 없애더라도 임산부가 나타났을 때는 최소한의 배려는 필요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다. 오늘 내가 만난 현실은 그 전제마저 무너진 세상이었다.


어쩌면, 이 나라는 아직 ‘자리 하나 비워두는 마음’조차 갖지 못한 사회일지도 모른다.

배려란 거창한 행동이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의 고통을 상상해보는 작은 상상력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 상상력은 자리를 내주는 손짓, “괜찮으세요?”라는 한마디, “여기 앉으세요”라는 따뜻한 제안으로 이어진다.

임산부 배려석은, 그 이름처럼 배려를 위한 자리다. 단지 앉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서로를 생각하는 사회가 되어가기 위한 조용한 연습장이다. 나는 오늘 그 자리가 얼마나 먼 길을 돌아야 제 기능을 할 수 있는지, 깊이 실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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