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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디 May 20. 2024

차표 없이 서울에  

(소녀의 어린 시절 에피소드 2)

  

아홉 살 소녀는 시골에서 노는 것도 좋아했지만 새로운 장소도 가보고 싶었다. 소녀는 셋째 딸로 할머니가 주로 큰언니나 작은언니만 데리고 서울 작은아버지 집에 가는 게 늘 부러웠다. 


어느 날 동네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서 아이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할머니가 보따리에 뭔가를 가득 싸서 무겁게 들고 행길 쪽으로 오는 게 보였다. 소녀는 얼른 뛰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 어디가?”

“응. 서울 작은아버지 집에 댕겨올게. 잘 놀고 있어. 올 때 과자 사 올게”

순간 소녀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게 있었다. 언니들을 데리고 가지 않고

 ‘할머니가 혼자 간 적은 없는데... 이건 기회가 아닌가? 내가 갈 수 있는... ’

소녀는 아침부터 밖에서 놀아 옷도 그렇고 손이나 얼굴도 지저분했다. 아무리 어려도 그 차림으로 따라가는 건 무리였다. 그래도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할머니 그거 무겁지? 내가 버스 타는 곳까지 갖다 줄게”

“아녀. 혼자 들 수 있어”

“아이 줘봐. 내가 들어다 준다니까”

소녀는 얼른 할머니 짐을 빼앗아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짐은 꽤 무거웠다. 소녀는 낑낑거리며 들고 갔다. 

“아이코. 무겁다니까. 이리 줘”

소녀는 짐을 절대 뺏기지 않고 종종걸음으로 버스정류장까지 들고 갔다.  정류장에 도착하자 할머니는

 "짐 이리 주고 언릉 집에 가"라고 했다. 

“할머니 차 타는 거 보고 갈게”


소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드디어 비포장도로에 먼지를 풀썩거리며 버스가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할머니가 주머니에서 차비를 꺼내는 찰나 소녀는 껑충 뛰어 버스에 올라탔다. 

“아이코. 너 뭐하는겨? 얼른 안 내려?”

“아아아아. 안 내려. 나 할머니 따라 서울 갈 거야”

그렇다. 소녀는 할머니 짐을 드는 순간부터 이렇게 해서 서울까지 따라갈 심산이었다. 할머니는 놀라 버스를 타며 소녀에게 다시 얼른 내리라고 했다. 둘이 실랑이하는 사이 버스 기사는 그냥 출발해 버렸다. 할머니는 당황하기 시작했다. 소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빈자리에 얼른 앉았다. 할머니는

 "한 정거장 더 가서 얼른 내려서 집으로 들어가"

 라고 했다.

“싫어. 나도 가고 싶다고. 왜 나만 안 데리고 다녀요?”     

소녀는 고집을 피웠다. 


다른 사람들이 쳐다보자 할머니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이내 포기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걱정이 있었다. 할머니는 여윳돈이 없었다. 버스에서 내려 성환역에서 노량진까지 가는 완행열차를 타고 가야 는데 할머니는 딱 어른 한 사람 차비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환역에서 탈 때는 차표 검사하는 사람이 할머니와 잘 알고 있어 할머니 표만 보여주고 타면 되는데 문제는 노량진역이었다.

“네 기차 값은 없는데 어떡할 거야?”

“어떡해야 돼?”

세상 물정을 모르는 소녀는 오히려 되물었다. 이제 와서 집으로 가기엔 너무 늦었다. 뭔가를 고심하던 할머니는 묘책을 냈다. 

“노량진에서 내려서 표 검사할 때, 얼른 뛰어서 통과해라 알았지?”

“응. 알았어”

이런 세상에! 그렇게 가르치는 할머니나 알았다고 하는 소녀나  못 말리는 사람들이었다. 소녀는 열 개 이상의 역을 지나면서 열차 밖 풍경을 신기한 듯이 바라보았다. 그러나 중간중간 걱정이 되었다. 

‘내가 잽싸게 표 검사할 때 도망갈 수 있을까? 아저씨가 쫓아 오면 어떡하지?’



 소녀가 졸다가 걱정하다 하는 사이 드디어 노량진역에 도착했다. 무거운 짐은 할머니가 들고 소녀는 뛸 준비를 하며 점점 표 통과문을 향해 걸어갔다. 파란 모자를 쓰고 푸르스름한 제복을 입고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는 철도 직원이 기차에서 나오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표를 받고 지나가게 하고 있었다. 소녀는 가슴이 콩닥콩닥했다. 드디어 소녀와 아저씨가 마주한 순간. 소녀는 있는 힘을 다해 냅다 뛰어 문을 통과해 마구 달리기 시작했다. 

“야. 너 뭐야. 거기 안 서!”

아저씨가 소리 지르며 빠른 속도로 쫓아왔다. 소녀는 너무 무서워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대합실을 지나 계단을 마구 뛰어 내려가다가 뒤를 쳐다보니 아저씨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잠시 섰다가 ‘에이!’하며 뒤돌아 가는 게 보였다. 소녀는 그제야 ‘휴 이제 안 쫓아오는 건가’ 하며 천천히 걸어 내려가 계단 아래 서 있었다. 가슴이 여전히 뛰고 있었다. 그래도 왠지 임무를 완수한 기분이었다. 할머니가 웃으면서 내려오는 게 보였다.      


작은아버지 집에 도착해 할머니는 내가 차비 때문에 뛴 이야기를 하자 작은아버지와 작은엄마는 박장대소를 했다. 작은아버지는 사실 철도회사에서 근무하고 있었는데 조카가 무임승차를 하다니... 너무 부끄러운 일이다. 따라오지 말았어야는데.


      

그러나 기분은 그날 하루만 나빴고 끝없이 지어진 집들과 빌딩들, 어마어마한 자동차들, 시골에는 없는 구경거리들이 즐비한 서울은 그야말로 딴 세상이었다. 소녀는 꼬질꼬질한 옷을 입고도 며칠간 실컷 서울 생활을 즐기다 시골로 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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