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들다 남기도 사라지기도 하는
주변에서 플리마켓을 준비 중이다. 집에 있는 것 중 팔만한 물품을 가져다 놓으라 몇 차례 공지가 있었다. 다른 일로 바쁘기도 하고 우리 집에 그런 물건들이 얼마나 있겠어? 하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어제저녁 베란다 한쪽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가는 부피가 큰 물건이 눈에 띄었다. 지구본이다. 둥그런 지구본에 세계 도시 이름이 빼곡히 적혀 있고 전기를 이용해 콘센트가 연결되어 있어 밤에 불 켜면 별자리가 야광으로 나오기까지 하는 물건이다. 작은아들이 초등학생 때 호기심으로 세계도시와 별자리를 들여다보며 신나서 가지고 놀던 거다. 이제는 세월과 함께 색이 조금 바랜 채로 집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 가져가 아들처럼 호기심 어린 눈을 반짝일 걸 상상하며 깨끗이 닦아 내놓기로 했다. 추억이 깃든 거지만 충분히 그 시간을 향유했다. 그 아래 부직포주머니가 말 그대로 삭아 한쪽면이 부스스 떨어져 있는 채 담겨있는 젠가도 발견했다. 이것도 아이들이 어릴 때 같이 소리 지르며 아슬아슬한 순간을 즐기며 놀던 거다. 부직포를 버리고 깨끗한 봉지에 넣어 가져갈 가방에 담았다. 그러다 안방 미니 책꽂이 위에 놓인 멀끔한 카카오프렌즈 인형이 눈에 띈다. 어느 날 재활용 가방에 이 멀끔한 인형이 버려져 있었다.
“어머 이거 뭐야? 새 거를 왜, 누가 버렸어?”
“저요”
아들은 심드렁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말한다.
“왜? 이거 인기 상품이잖아?”
“아 그냥 버려요.”
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알고 보니 헤어진 여자 친구가 준 선물이었다고 한다. 주황색 인형이 순진하게 웃고 있다. 물건은 잘못이 없다. 사연이 있는 인형을 바라보다 나는 몰래 방으로 가져다 놨다. 이제 세월이 흘러 아들은 인형에 개의치 않는 거 같다. 아까워서 가지고 있는 나보다, 좋아서 가지고 있는 누군가를 위해 이것도 가방에 넣는다. 옷은 가져오지 말랬지만 옷장에 혹시 뭐가 있나 열어본다. 비싸게 주고 사서 전혀 쓰지 않는 모자 두 개가 눈에 띈다. 그 당시 살 때는 아주 매일 쓰고 다닐 거 같았지만 이상하게 그렇게 되지 않는 물건들이 있다. 이 두 모자가 그렇다. 하나는 재색으로 고전영화에 나오는 여배우들이 썼던 걸 연상시키는 모양이고 하나는 심플한 모자다. 나와의 추억 없이 옷장에 들어있느니 다른 사람에게 기회를 주는 게 좋을 거 같아 꺼내든다.
새 물건도 제법 있다. 한 번도 뜯지 않은 미니 선풍기들, 양말 세트, 행주 세트, 한꺼번에 사놓았던 클렌징오일, 휴대폰 충전기기등 서랍에 들어있는 나누고 싶은 새 물건들도 가방에 담았다. 오래된 물건에 담겼었던 소중한 감정은 우리 집에 남아있다. 물건만 우리 집과 유통기한이 끝났다.
바퀴 달린 가방에 실어 물건들을 가져다 놓고 집에 와서 무심코 유튜브 음악을 틀었다. 다른 일을 하는 사이 어느새 알고리즘이 내가 예전에 자주 듣던 지나간 음악들을 소환해 틀어주고 있었다. 한동안 듣다가 질려서 듣지 않던 곡들이다. 그 음악들을 듣다 보니 예전에 감정이 소환되는 게 느껴진다. 그렇다고 다시 그 감정으로 돌아가지는 않는다. 물건과 음악에 실리던 감정은 시간과 함게 변한다. 그들은 물리적으로 존재하고, 인간은 거기에 시간과 함께 감정을 싣는다. 그 음악을 한참 들을 때의 마음이 떠오른다. 힘든 것도 있고 행복한 것도 있다. 뭉클하기도 하다. 음악은 우리 상상의 질서에서 몽글몽글한 감정을 가져다주는 아름다운 선물이다. 지금 이 글도 예전에 듣던 음악을 들으며 쓰고 있다. 인간은 능력자다. 음악과 물건으로 추억을 만들기도 소환하기도 하고 현실 속에서 현재를 살아가기도 하며, 안갯속에 숨어있는 미래의 설렘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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