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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디 May 23. 2024

소녀의 짝사랑

(아주 오래된)

  

시골에서 하루 종일 햇빛을 받고 놀거나, 밭에서 일하는 게 전부인 소녀는 피부가 새까맸다. 모자는 운동회 때 청군 백군 할 때나 쓰는 것이지, 모자를 써서 피부를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고 늘 놀기 바빴다. 동네 아이들도 비슷해서 다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어느 날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일이 생겼다. 딴 세계 사람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옆집 호랑이 할머니네 집에 서울 사는 손자가 놀러 왔다. 소녀와 집 앞에서 마주친 소년은 영화나 티브이 만화에서 나올 법한 백마 탄 어린 왕자님 같았다. 피부가 백옥같이 하얗고 잘 생기고 말도 나긋나긋하게 했다.  동네 남자애들은 충청도 사투리로 '응'을  ‘그려’ ‘이’라고 말하는데, 그 애는 서울말을 쓰고 말투도 전혀 거칠지 않았다. 소년을 본 소녀의 가슴은 콩닥거렸다. 두근두근.

‘세상에는 저런 남자애도 있구나’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집에 와서 거울을 보니 찰흙같이 까만 소녀가 서 있었다. 소년은 방학이면 할머니 집에 놀러 왔다. 아버지는 대학 병원 의사라고 했다. 한 번 소년이 소녀 집에 할머니가 무얼 빌려오라 해서 찾아온 적이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소년이 서 있어서 뒤로 자빠질 뻔했다.

 “안녕. 할머니가 연장을 좀 빌려달라는데 너네 아버지한테 말씀 좀 전해줄래?” 어머나. 책에서나 볼법한 말을 구사했다. 소녀는 아버지한테 말을 하지도 않고 얼른 창고로 가서 

“여기”

 하고 전해주었다. 

“응, 고마워” 

와 고맙다니 그런 말은 영화에서나 나오는 말 아닌가? 또래에서 그런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늘 놀리거나 비아냥 거리거나 장난치는 말투였다.


 해마다 소녀는 방학을 기다렸다. 그렇게 소녀도 소년도 가까운 공간이지만 특별한 접점은 없는 상태로 인연이 흘러갔다. 소년은 점점 더 멋진 청년으로 자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등학생이 되어 소녀가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소년이 미국 유학을 간다는 말을 들었다. 소녀의 가슴은 텅 비었다. 부럽기도 하고 자신과는 다른 세계를 사는 소년이 이젠 정말 더 다른 세계로 가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며칠 후,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소년이 유학 가기 전날 친구들과 술을 먹고 집에 와서 쓰러져 잠들었는데 영원히 깨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소식을 듣고 너무 놀라 눈물도 안 났다.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 지어낸 이야기 아닐까!     


소년의 할머니는 손주들이 많았는데 유독 그 소년을 가장 사랑했다고 한다. 그래서 가족들은 할머니가 98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소년이 그렇게 된 것을 끝내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할머니는 늘 궁금해서 물어보고, 보고 싶어 하다 생을 마쳤다.      


소녀의  짝사랑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소녀의 평행우주에서는, 아직도 하얀 얼굴로 웃고 있는 소년을 수줍게 보고 있는 소녀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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