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일탈
새벽에
“우르릉 쾅쾅”
“쏴아아 아”
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창문을 여니 반가운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태풍 '종다리' 영향으로 바람도 세차게 불었다. 명상을 마치고 아침 7시쯤 문득 생각이 떠올랐다. 아! 황톳길! 요즘 집 앞 공원에 조성해 놓은 맨발 황톳길을 밤마다 거닌다. 전날 비가 오면 황토가 말랑말랑해서 걷기에 딱 좋다. 요즘은 비가 오지 않아 황토가 딱딱했다. 그래도 걷지 않는 것보다는 나아 아이들과 이야기 나누며 걸었다. 비를 기다렸다. 밤새 반가운 비가 내렸으니 황토는 얼마나 말랑말랑한 길이 되었을까? 빨리 나가보고 싶었다. 아침 일탈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발수건을 비닐봉지에 넣어 크로스백에 휴대폰과 함께 챙겨 넣고 혹시 조금 선선할 수 있으니 스카프도 챙기고 모자를 눌러쓰고, 장우산을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가다 6층에서 출근하는 아빠와 중학생 아들로 보이는 사람들이 탔다. 1층 현관으로 나가니 생각보다 비바람이 거세게 휘몰아치고 있었다.
“헤? 태풍이야?”
중학생 아들이 놀라며 외쳤다. 둘은 큰 우산을 펼치며 어떻게든 덜 젖으려고 몸을 움츠리며 걷기 시작한다. 그들은 젖으면 안 되는 몸이라 몸을 움츠렸지만 나는 젖어도 괜찮은 몸이라 씩씩하게 공원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장 우산이라도 비가 사방에서 내려 조금은 맞을 수밖에 없다. 도로 가장자리는 작은 도랑이 되어 빗물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신발이 금방 젖었다. 공원에 도착하니 역시 아무도 없고 주황빛 황토 흙이 빗물에 쓸려 공원 아래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 고독한 자유로움! 신발을 벗고 한 발을 디디려는데 살짝 흥분됐다. 얼마 만의 일탈인가? 어릴 적 비가 오면 가끔 맨발로 첨벙첨벙 집까지 걸어간 적이 있었다. 다시 소녀가 된 기분이다. 오른쪽은 공원이고 왼쪽은 야트막한 야산으로 황톳길 주변에 소나무 전나무 오리나무들이 심어져 있어 비바람 소리에 "쏴쏴 사아~’"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발아래 흙은 미끄러웠다. 조심조심하며 여유 있게 걸었다. 뿌연 빗물이 가득한 웅덩이가 세 군데나 만들어져 있었다. 뿌연 물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른다. 물고기가 있을지 지렁이가 있을지. 첨벙첨벙 천천히 걷는다. 조금 미끄러운 곳은 난간을 잡을 수 있게 해 놨다. 전나무에서 피톤치드 향이 난다. 젖은 나무 기둥을 만져본다.
‘그동안 얼마나 목이 말랐니? 실컷 마시렴’
기둥이 축축하다. 잠시 멈춰 야산을 바라본다. 문득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가 생각난다.
‘이 숲이 누구의 것인지 알 거 같다....’
샛 누런 웅덩이를 건널 때는 연암 박지원의 ‘일야강구도하기’가 생각난다. 컴컴한 밤에 굽이치는 강을 아홉 번이나 건넜다는. (너무 뜬금없고 비교가 안 되지만 어쨌든...) 그리고 영화 ‘테스’에서 예쁘게 차려입은 테스를 에인젤이 번쩍 안고 웅덩이를 첨벙첨벙 건너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따금 어둑어둑한 아침 길에 헤드라이트를 밝게 킨 차들이 저만치서 지나간다.
'내가 보이려나? 저 사람은 저기서 머 하는 거야? 하고 생각하려나? '
하는 생각도 해본다. 작년에 도서관 독서모임에서 어떤 분이 입만 열면 황톳길 예찬을 했는데 그분의 마음을 십분 알 거 같다.
빗소리에 발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우와 간지러’ ‘미끈미끈해’
‘짱 좋아’ ‘너무 신난다’ ‘이게 얼마 만이야’ ‘하루 종일 이래도 좋을 거 같아’ ‘와 이 부드러운 감촉’
어릴 적 논에 맨발로 들어간 적이 있다. 어른들은 장화를 신었지만 애들 몫까지는 없으니 맨발로 들어가 모를 심었다. 지금 우리 애들한테 말하면 '호랑이 담배 피워요?' 할지도. 그때의 감촉이 오버랩된다. 발가락 사이로 올챙이들이 지나가고 이따금 무시무시한 거머리가 종아리에 붙기도 했다. 아 아까운 내 피!
폭포 소리 같은 빗소리를 들으며 몇 바퀴를 도는 사이 장 우산이 점점 무거워진다. 배도 고파온다. 슬슬 나갈 때가 됐다. 친절하게 발 씻는 곳까지 해 놔서 열심히 흙 묻은 발을 씻고 신발을 신는다.
캬~~ 꿀꺽!
발이 천연 사이다를 먹었다. 표현하기 힘든 시원함 청량함 상쾌함이 발을 타고 머리까지 올라온다. 아 그렇다. 나는 황톳길과 사랑에 빠졌구나! 일탈 성공! 약간의 망설임이 있던 얼굴이 개선장군의 얼굴로 변해 집을 걷기 시작한다. 빗줄기가 약해졌다.
황톳길 산책이 인생에 황금길로 이어질 거 같은 행복한 상상을 하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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