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을 지내느라 노고 한 분들께 감사를
명절 이야기를 하는데 거창하게 사피엔스의 구절을 인용하는 것은 명절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가 수세기에 걸쳐 '상상의 질서'로 자리매김해 온 이야기와 이제는 급속하게 변하고 있는 걸 말하고 싶어서이다. 기록을 찾아보니 추석 명절은 삼국시대에서 유래하여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국 고속도로가 귀성객들의 차량으로 꽉꽉 막히더라도 사람들은 고향으로 부모님과 형제자매들을 만나러 기꺼이 시간과 돈을 들여 집을 나선다. 장을 보고 며느리와 딸들은 몇 시간에 걸쳐 땀 흘리며 푸짐하게 음식을 만든다. 으레 그래왔고 그래야만 했던 질서다. 오랜만에 만나는 가족 친지들과 안부를 묻고 정겨운 이야기들이 오가기도 하지만 세대차이 인식차이 공감능력부족차이 사소한 오해등으로 서로 얼굴을 붉히거나 안 좋은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내 세대 부모세대 그위의 수많은 조상들의 세대는 오랫동안 명절이라는 문화는 반드시 지켜야 하고 어기면 마치 도리를 못하는 인간으로 평가하면서 급격히 나쁜 사람으로 이미지를 낙하시키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를 지내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마치 불문율과 같았던 문화가 개인주의 삶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커지고 집단사회보다는 가족, 가족보다는 개인으로 초점이 맞춰지면서 오래전부터 이어져 왔던 명절이라는 우리 민족의 ‘상상의 질서’가 많이 바뀌고 있다. 돌아가신 조상을 위해 현실적인 시간과 경제의 효율을 우선으로 생각해 제사 지내는 일을 그만두기도 하고, 고향에 가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자유로운 여행을 선택하고, 불 앞에서 하루 종일 서성이며 음식을 하느니 돈을 주고 간단히 사 먹는 선택을 하는 등의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물론 오래전부터 바뀌어왔지만 최근엔 마치 절벽처럼 급속히-
이번 명절 다음날 우리 친정 가족들이 다 모여 점심을 밖에서 먹고 헤어지려는 데 가는 식당과 대형카페가 인산인해 인걸 보니 더 체감이 갔다. 사람들의 생각이 확 변했고 더 변하고 있다.
우리 친정 가족의 명절도 이제는 새로운 방향으로 나갈 전망이다. 엄마가 연세가 많아 힘들어도 결혼해서 60년 가까이 지내온 제사를 이제는 더 이상 지내지 않겠다고 선언하셨다. 어렸을 때부터 늘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반드시 하셨던 분이 생각을 바꾼 게 조금 의외였지만 진작부터 우리들이 이야기했던 거라 놀라지는 않았다. 단 엄마에게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결심인 듯하다. 뭔가 조상님한테 잘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표정도 조금 남아있고, 궁색한 변명을 하고 싶어 하는 모습도 살짝 엿보인다. 사피엔스에서 나온 대로 사람들에게 세뇌시키고 있는 상상의 질서는 엄청난 힘을 갖고 있음을 엄마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특히 그것은 근거 없는 ‘죄책감’이라는 강력한 무기를 지니고 다닌다. 사람들은 ‘죄책감’에 이상하리만치 순한 양처럼 항복하려는 모양새를 갖춘다.
어쨌든 앞으로 친정의 명절 그림이 바뀔 예정이다. 대찬성이다. 나이가 많은 엄마가 아들과 며느리에게 미안해하며 명절 준비를 안 해도 되고 명절날 굳이 차 막히는 걸 감수하며 가족끼리 모이지 않아도 된다. 우리들은 명절과 관계없이 미리 한 두 주 전에 모여 펜션을 빌려 즐겁게 놀기로 했다. 명절이라는 문화 틀에서의 만남이 아니라 가족 간의 진정한 화합과 화목의 장으로 모여 함께 즐기자는 취지로 우리만의 문화를 만들기로 했다.
'상상의 질서'의 기준을 어디다 둬야 할까? 인간의 행복과 가치에 두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지 않을까? 물론 행복과 가치도 사피엔스의 생물학적인 면이 아니라 문화적인 면에서의 설명이겠지만 이 두 가지의 특징으로 살아왔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면 좋은 방향으로의 타협과 조율이 필요해 보인다. (사실 이 외에도 복잡한 면을 내포하고 있는 사피엔스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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