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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지다

by 두두 Feb 23.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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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처지면 안 돼!

남들에게 밀리면 안 돼!


이런 말들이 내 20대의 표어였다


뒤처지지 않기 위해

남들에게 밀리지 않기 위해

보란 듯이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이를 악물고 열심히 살았다


내 형편에 맞게 스펙도 나름

열심히 만들었다

법대 수석졸업, 한국어문회 한자 1급

야학 봉사활동, 토익 950점

공인노무사 1차 합격 기타 등등


졸업 무렵, 100개도 넘는 회사에

취업 원서를 넣었지만


돌아오는 답은,


귀하는 훌륭한 인재이나

저희 회사의 사정으로 인해...


불합격 불합격 불합격


서울로 인적성 시험을 치러 갈 때도

토익 시험을 치를 때도

서울로 면접을 보러 갈 때도

모두 내 돈 내 산

내가 벌어 내가 해결해야 했다

모든 시험, 면접 비용을 구직자인 내가 내야만 했다


오~오~오~필승 코리아의

자랑스러운 일원이 되기 위한

기업들에게 꼭 필요한 인재가 되기 위한

치열한 자기계발, 자기 착취, 자기 투자, 자기 학대

 

새벽 1시에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나

가장 먼저 도서관 자리를 잡고

오전엔 영어 공부

중간중간 학과 공부

오후에는 아르바이트

틈틈이 자소서 작성


오~오~오~끔찍한 자소서

자소서를 쓰다 보면 손발이 오글거렸고

나 자신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자존감이 한없이 떨어짐을 느꼈다


1년 이상의 마음고생과 몸 고생 끝에

드디어 꿈에도 그리던 취업 성공!!


1차 서류 통과

2차 인적성 시험 통과

3차 심층 압박 면접 통과


1명 채용하는데 100명 이상이 몰렸다


운이 좋아 합격했고

난 그때 내가 최종 승자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남들에게 뒤처지진 않았다는

알량한 안도감이 밀려왔다

부러움과 시샘이 섞인 친구들의 축하와 핀잔

자랑스럽게 나를 바라보는 가족과 친척들

이제 승승장구할 일만 남은 것 같았다


어리석은 생각이었다

삶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꿈만 같던 신입 사원 연수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첫 직장 생활

그러나

매일매일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듯한

지옥 같은 첫 직장 생활이었다


견딜 수가 없어서 그만두었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아무도 내 편이 아니었다

그들은 내가 나약하고 어리석다고 말했다

배가 불러서 그 좋은 직장을

그렇게 쉽게 그만둔 거냐고 핀잔을 줬다

아무도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응원해 주지 않았다

혀를 차며 싸늘하게 바라보기만 했을 뿐


세상이 다 끝난 것 같은 마음에

몇 번인가 자살 시도를 했지만

운 좋게도 살아남았고

그때로부터 1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까지 별문제 없이 생계를 유지하며

잘 살고 있다


전화위복이란 말은 진리다


한때는 내 선택을 후회하고

자책하곤 했지만 지금은

그때의 그 선택이 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내 안과 밖에 붙어있던 모든 가짜들이

그때, 비로소 실체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가짜 우정 가짜 사랑 가짜 믿음

가짜 인연 가짜 관념 가짜 마음


내 안의 가짜와 내 밖의 가짜가

모두 다 그 실체를 드러냈다


이제 내 안과 밖에는

가짜가 남아있지 않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앞서거나 뒤처지는 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화장터로

걸어 들어가는 게 인생이다

앞서는 인생, 뒤처지는 인생이란 게 과연

존재하기는 하는 것일까? 참 웃긴 개소리다

앞서 나가는 게 결코 좋은 것이 아니고

뒤처지는 게 결코 나쁜 것도 아니다


그래서 마음 편하게 뒤처지기로 했다

2020년부터 참 자주 쉬었다

1년에 6개월은 일하고 6개월은 백수로 지냈다

2021년에 2개월 쉬었고

2022년에 6개월 일하고 6개월 쉬었으며

2023년에 또 6개월 일하고 6개월 쉬었다


6개월 일하면서 모은 돈으로

6개월 백수로 지내는 것이다

백수 기간 동안 과로도 하지 않고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맘 편하게 지내니

아마도 큰 병 없이 장수할지도 모른다


이제 앞서 나가려는 마음을,

뒤처지지 않고 싶은 마음을,

완전히, 철저히 버리기로 했다

한없이 뒤처져서 맨 뒤에 있을 생각이다

남들이 모두 나를

완전히, 철저히 추월하도록 내버려 두고 싶다

시간에 쫓기며 살 필요도 없고

남을 이기려 애면글면 애쓸 필요도 없다


다만, 내가 즐거워하는 일을

타인 따위는 배제한 채로 그저 재밌게 하고

그 결과는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다


밥벌이는 놀이처럼 편한 마음으로 쉽게

놀이는 밥벌이처럼 진지하고 성실하게


어차피 남은 인생 혼자 살다가 혼자 갈 건데

무슨 그리 큰 고민이 필요할까?

마음 편하게 유유자적 내 몸뚱이 하나만

제대로 유지하며 맘껏 놀다가 가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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